외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는 16강 진출이 처음이다. 같은 시간 벌어진 그리스와 아르헨티나의 경기가 아르헨티나의 2대 0 승리로 끝나 한국의 16강 진출 밑거름이 됐다.
이로써 한국은 3전 전승(승점 9)을 기록한 아르헨티나에 이어 1승 1무 1패(승점 4)를 기록, B조 2위로 조별리그를 통과해 A조 1위인 우루과이와 오는 26일 밤 11시 8강행을 놓고 격돌한다.
그간 선수 기용 문제, 전술 문제 등을 두고 논란의 중심에 섰던 허정무 감독은 지역예선을 1위로 통과한데 이어 한국인 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월드컵 승리, 16강전 진출의 위업을 달성해 거스 히딩크 감독 이후 가장 좋은 성과를 일군 '명장' 반열에 올라설 발판을 마련했다.
▲ ⓒ뉴시스 |
불꽃튀는 접전 보여준 전반전
이날 한국은 그리스전에 들고나온 4-4-2 포메이션을 그대로 가동했다. 기용 문제를 두고 논란을 빚었던 오른쪽 측면 수비에는 차두리(프라이부르크)가 다시 들어왔다. 최전방 공격수 역시 박주영(AS 모나코)-염기훈(수원 삼성) 라인을 그대로 가동했다. 그리스전과 마찬가지로 박주영이 사실상 원톱으로 섰고, 염기훈은 2선으로 내려와 수비 가담과 측면 지원에 보다 주력했다. 무조건 이겨야 16강행을 바라볼 수 있는 나이지리아의 측면을 뚫기 위한 예상된 진형이었다.
한국에 맞서 나이지리아는 이번 대회에서 계속 가동한 4-4-2 포메이션을 버리고 미드필드 압박을 강화한 4-2-3-1 포메이션을 세웠다. 측면이 헐거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일라 유수프(디나모 키예프)와 딕슨 에투후(풀럼)를 수비형 미드필더(더블 볼란치)로 세웠다. 공격형 미드필더로는 선발출장이 예상되지 않았던 백전노장 은완코 카누(포츠머스)를 선발 출격시켜 공격을 풀어나가도록 했다. 은완코 카누는 지난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결승전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동점골과 역전골을 기록해 4대 3 역전승을 이끈 주역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익숙한 선수다.
미드필드에서 공방이 치열하리라던 예상과 달리 경기는 초반부터 불을 뿜었다. 나이지리아의 미드필더와 측면 수비수들은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했고, 한국은 그 뒷공간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양팀은 모두 적극적인 압박으로 미드필드에서 상대 패스를 가로채 바로 위력적인 역습을 전개했다.
한국은 전반 시작과 함께 좋은 찬스를 맞았다. 이청용(볼턴 원더러스)이 상대 미드필드진이 돌리던 볼을 가로채 오른쪽을 돌파했고, 곧바로 박주영에게 침투패스를 연결했다. 박주영은 수비 뒷공간을 파고들어 슈팅을 날렸으나 골대 옆으로 빗나갔다. 이어 전반 6분경에는 역시 한국이 미드필드진에서 협력수비로 상대의 패스를 끊어 왼쪽 측면을 돌파했고, 이어 생긴 프리킥 찬스에서 흐른 공을 기성용이 위력적인 중거리슛으로 연결했다.
그러나 기세를 올리던 한국은 나이지리아의 역습에 첫 골을 허용했다. 전반 12분경 한국의 왼쪽 측면에서 던지기 공격으로 공을 받은 오른쪽 풀백 치디 오디아(CSKA 모스크바)가 한국 수비 두 명을 뚫고 들어와 낮은 크로스를 날렸고, 뒤에서 달려들던 칼루 우체(알메리아)가 발을 갖다 대 골로 연결했다. 차두리가 2선에서 침투하는 선수를 잡아내지 못했다.
▲첫 골을 기록한 칼루 우체가 익살스런 표정으로 골 세러모니를 하는 모습. ⓒ뉴시스 |
경기 초반 계속 밀리던 나이지리아는 이 골을 계기로 분위기를 가져가기 시작했다. 전반 21분과 22분, 연달아 위력적인 중거리슛을 시도했다. 한국은 실점 이후 수비와 미드필드 간격이 눈에 띄게 벌어지면서 상대에게 계속해서 공간을 허용했다. 실점 후 측면 수비수가 중앙으로 몰려 측면 돌파를 허용하는 모습도 아르헨티나전에 이어 재연됐다. 공격수들은 기세가 오른 상대 미드필드진의 압박에 철저하게 고립되는 현상도 이어졌다.
실마리는 박지성이 풀었다. 특유의 활발한 돌파와 영리한 파울 유도로 프리킥 찬스를 얻어내 분위기를 바꿨다. 전반 31분, 박지성이 상대 오프사이드 트랩을 뚫고 긴 패스를 받아 단번에 단독 찬스를 잡았다. 수비수가 없었던 상황이라 빈센트 엔예마(하포엘 텔 아비브) 골키퍼는 박지성의 옷을 고의로 낚아챌 수밖에 없었다. 기성용이 왼쪽 측면에서 크로스를 올렸으나 혼전상황에서 볼을 잡아준 선수가 없어 좋은 찬스를 살리지 못했다.
다시 기세를 올리던 한국은 전반 35분, 결정적인 실점 기회를 내줬다. 미드필드에서 돌리던 볼을 나이지리아에 뺏겨 칼루 우체에게 중거리슛 찬스를 줬다. 골대를 맞고 나왔으나 문제가 됐던 수비와 미드필드 간격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아 자초한 위기였다. 반면 나이지리아는 수비라인을 더욱 끌어올려 호시탐탐 역습을 노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국이 나이지리아가 끌어올린 수비라인을 효과적으로 파고들어 동점골을 만들었다. 중거리슛을 허용한 바로 1분 후 이영표가 오버래핑으로 왼쪽 측면을 파고들었고, 크로스를 올리기 직전 상대 수비 오바시(1899 오펜하임)에게 파울을 유도해 프리킥 찬스를 만들었다. 그리스전과 마찬가지로 기성용이 절묘하게 뚝 떨어지는 프리킥을 날렸고, 상대 수비 뒤에서 파고들던 이정수(가시마 앤틀러스)가 발을 갖다대 동점골을 기록했다. 그리스전 선제골과 완벽히 똑같은 상황이었다.
▲이정수의 동점골. ⓒ뉴시스 |
'숨막히는 20분' 버텨내 16강행
후반 시작과 함께 나이지리아는 센터백 조셉 요보를 빼고 부상을 입었던 에티에질레(렌)를 투입했다. 조셉 요보가 부상으로 인해 생긴 공백을 막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 나이지리아는 이번 대회 들어 유난히 부상 악령이 시달렸다.
후반 3분 만에 한국의 16강행을 결정짓는 골이 나왔다. 아르헨티나전 자책골을 기록해 부진이 우려됐던 박주영은 헤딩 경합에서 상대 수비수 대니 시투(볼턴 원더러스)에게 따낸 프리킥 찬스를 스스로 해결해 역전골을 만들어냈다. 수비벽 측면을 절묘하게 돌아나가 가장 구석에 꽂히는 공은 지난 두 경기 연속 '최우수 선수(맨 오브 더 매치)'로 선정된 엔예마 골키퍼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이후 기세가 오른 한국은 특유의 압박이 살아나며 경기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받았다. 미드필드에서부터 상대의 공을 계속 차단해 공격전개 자체를 선제 차단했다. 나이지리아는 김정우(상무)를 비롯한 한국의 협력 수비에 완전히 발이 묶인 카누를 빼고 오바페미 마틴스(볼프스부르크)를 투입해 변화를 시도했다.
한국은 수비 집중력 저하로 위기를 자초했으나, 오히려 후반 17분경 결정적인 찬스를 잡았다. 이영표가 측면에서 넘겨준 긴 패스를 전방으로 파고든 염기훈이 한 번에 받았고, 중앙으로 쇄도하던 박주영의 발 앞에 패스했다. 박주영은 넘어지면서 감각적으로 발을 갖다댔으나 엔예마 골키퍼가 눈부신 선방으로 골을 막았다.
▲박주영은 특유의 재미 없는(?) 세러모니를 오랜만에 선보였다. ⓒ뉴시스 |
서서히 한국의 수비조직력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허정무 감독은 공격수 염기훈을 빼고 김남일(톰 톰스크)를 투입해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는 대비책을 세웠다. 김남일은 활발한 움직임으로 상대 공격을 차단했으나 결정적인 실수로 인해 동점골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다.
후반 24분, 교체투입된 마틴스가 한국의 왼쪽 측면을 완벽하게 뚫어 크로스했고, 김남일은 이를 가로챘으나 제 때 처리하지 못하고 상대 공격수에게 무리한 태클을 시도해 패널티킥 찬스를 내줬다. 이동국과 미들즈브러 시절 주전경쟁을 했던 야쿠부(에버턴)는 직접 얻어낸 찬스에서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켜 다시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이후 경기는 양팀 모두 취약한 상대 측면을 노리는 역습 주고받기 양상이 됐다. 한국은 수 차례 역습기회를 맞았으나 결정적인 기회를 잡진 못했다. 도리어 번번이 측면이 뚫리면서 골과 다름없는 위기를 두 번이나 자초했다.
후반 34분경 수비진영에서 돌리던 패스를 빼앗겨 마틴스에게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를 허용했다. 다행히 골대를 빗나갔지만 골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한국 수비는 이후 크게 흔들리며 번번이 상대의 측면돌파를 허용했다.
종료 직전인 후반 44분에도 왼쪽 측면 돌파를 허용해 위험한 상황을 맞았다. 오빈나(인터 밀란)가 날린 슛이 다행히 골대 옆을 빗나갔다. 다행히 추가 실점을 하지 않고 잘 버텨 16강행을 확정했다.
이날 경기에서 선발 출장이 기대됐던 이동국은 끝내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박주영은 세 번의 예선전에서 상대 수비수와의 헤딩경합에서 밀리지 않았고 수비 뒷공간을 노리는 돌파도 선보여 이번 대표팀의 최전방 공격수 자리를 확고히 꿰찼다.
한국은 이날 활발한 공격을 선보였으나 아르헨티나전에서 보여준 수비와 미드필드 간격 조율의 문제를 다시 드러내 우루과이와의 경기를 앞두고 수비 조직력 강화에 힘을 쏟을 것으로 보인다. 우루과이는 세계 최정상급의 공격력을 가진 디에고 포를란(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을 공격에 적극 활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우루과이는 한국에 껄끄러운 상대다. 한국은 우루과이와 역대 전적에서 4전 전패했다. 지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만났으며 0대 1로 패했다. 당시 우루과이 대표팀의 감독이 바로 현재도 팀을 이끄는 오스카 타바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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