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과 레게가 뗄 수 없는 한 집안이라는 사실은 굳이 말하면 입만 아프다. 지난 2006년 겨울, 힙합 그룹 다일레이티드 피플스(Dilated Peoples)와 대망(?)의 인터뷰(☞ 바로보기)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멤버 라카(Rakaa, 어머니가 한국인이다)의 답변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자메이카의 레게 문화는 디제이 쿨 허크(DJ Kool Herc)를 탄생시켰고, 디제이 쿨 허크는 곧 힙합 문화의 아버지이자 개척자이다. 레게가 없었다면 힙합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나무의 열매뿐만 아니라 뿌리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나스와 데미안 말리 [Distant Relatives]. ⓒ유니버설뮤직 제공 |
나스의 경우를 보면, 이 앨범은 [Untitled]의 연장선이다. 물론 나스는 데뷔 때부터 '의식 충만한' 가사로 이름을 날려 온 인물이다. 그러나 그러한 면모가 앨범 전체를 휘감는 콘셉트로 확장된 것은 [Untitled] 혹은 [Hiphop is Dead]부터다. 그는 [Hiphop is Dead]에서 상업 논리에 놀아나는 힙합에 사망 선고를 내렸고, [Untitled]에서는 흑인형제들의 각성을 촉구하더니, 이제 [Distant Relatives]를 통해 정신적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가려고 한다. 멋진 행보다.
데미안이 프로듀싱 전권을 거의 거머쥔 이 앨범은 그런 까닭인지 힙합 앨범이라기보다는 레게-랩 앨범에 가깝다. 이는 두 가지 면에서 미덕으로 다가온다. 먼저 걸출한 랩 실력에 비해 비트를 고르는 혜안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아온 나스가 만약 본작의 음악을 지휘했다면 이보다 완성도가 떨어졌을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상이 하나. 그리고 아프리카를 주제로 삼은 콘셉트 앨범이니만큼 '작품 의도'를 더 명확히 반영하기 위해서는 대미안의 색채가 강조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 다른 하나다.
실제로 데미안의 프로듀싱은 제법 단단하다. 그는 자신의 레게 정체성을 기반으로 록, 힙합 등을 적절히 섞어낸다. 댄서블 비트를 시도하기도 하고(As We Enter), 아프리카 토속 리듬을 가미하기도 한다(Tribal War). <Land Of Promise>와 <Friends>에는 레게 특유의 느릿한 끈적끈적함이 묻어난다. 반면 <Nah Mean>은 힙합 비트에 가깝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중심축을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다채롭지만 '산란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맥락에서 [Distant Relatives]의 사운드 프로덕션은 성공적이다.
그런가 하면 메시지는 감동의 향연이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이 형들은 진짜 믿어도 되는 진실한 형들이라는 느낌이 온다. 이로움이 아닌 의로움을 좇는 참된 형들. 나스와 데미안은 진심으로 아프리카와 흑인형제들을 걱정하고 또 격려한다.
이념과 여러 조건으로 나뉘고 반목하는 범-흑인사회를 꼬집는 <Tribal War>, 살아남기 위해 강한 힘을 기를 것을 촉구하는 <Strong Will Continue>, 세상의 모든 지도자들을 향한 헌사 <Leaders>, 나스가 작년에 태어난 자신의 첫 아들을 언급하면서 긍정적인 삶의 자세와 안분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Count Your Blessings>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하이라이트는 역시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 나스, 데미안, 그리고 릴 웨인(Lil Wayne)이 각자의 입장에서 진솔하게 희망을 그려보는 <My Generation>은 보기에 따라 다소 식상한 감동 동원 장치인 '아이들의 합창'을 삽입했음에도 (또는 그렇기 때문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 ⓒ유니버설뮤직 제공 |
또한 7분여에 달하는 대곡 <Africa Must Wake Up>은 앨범의 마지막 곡답게 그 자체로 [Distant Relatives]의 존재 이유를 상징한다.
아프리카에서 뻗어나간 형제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가사('The first architect/ The first philosophers/ Astronomers/ The first prophets and the doctors/ Was us')는 물론이요, 후반부에 흐르는 나스의 내레이션('당신이 어디에서 왔든, 어디에 살든, 그곳이 얼마나 멀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다 같은 형제이고 먼 친척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프리카라는 한 곳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모여야 하는 이유이고 나와 대미안이 뭉친 이유입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 여러 곳에 흩어져 있을 뿐, 내 먼 친척들이여, 이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갑시다') 앞에서는 민족주의 비스무리한 것들과 담을 쌓고 지내는 나조차도 철저하게 무장해제 당하고 만다.
고백하건대 이 앨범의 사운드는 대체적으로 내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그래서 앞으로 이 앨범을 얼마나 즐겨들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나는 이 앨범의 성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균형미와 완성도를 갖추면서도 앨범 콘셉트를 충실히 대변하는 사운드, 진실한 격려와 애정 어린 비판이 공존하는 메시지. 이것들은 분명 취향으로 폄하 가능한 것들이 아니다. 취향과 평가를 냉정히 구분할 수밖에 없다.
이즈음에서 꿈같은 질문 하나를 슬그머니 다시 떠올려 본다. '과연 음악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공교롭게도 이 앨범은 월드컵 개막 즈음에 나왔고, 개최국은 아프리카에 있다(!). 그리고 축구공은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줄 것이다. 나스와 데미안의 음악 역시 그럴 수 있을까? 꿈은 꾸는 자의 것임을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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