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란바토르에서 가장 먼저 가야할 곳은 도심에서 3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 자이산 언덕이다. 이곳 꼭대기에 자리를 잡은 승전기념탑은 관광 명소일 뿐만 아니라 전망이 좋기로 유명하다. 승전기념탑에 오르면 몽골 고원의 고도 1350미터에 자리를 잡은 '붉은 영웅'(울란바토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곳에서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몽골기와 함께 태극기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도대체 울란바토르 한복판, 관광 명소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태극기가 왜 나부끼는 것일까? 몽골기와 태극기가 서 있는 곳은 바로 2001년 7월에 만들어진 '이태준 기념 공원'이다. 이태준? 그는 누구인가?
▲ 울란바토르 남쪽 자이산 전승기념탑 앞에서 내려다보면 태극기와 몽골기가 나부끼는 모습이 눈에 띈다. 이 곳이 바로 이태준 기념 공원이다. ⓒ동은의학박물관 |
의사 이태준, 독립운동의 꿈을 품다
지난 6월 3일 울란바토르 이태준 기념 공원에서 뜻 깊은 행사가 열렸다. 국가보훈처, 연세대학교의료원, 주몽골 한국대사관 등이 주도해 공원 내에 통나무집 형태로 이태준 기념관을 지었고, 이날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울란바토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태준(1883~1921)의 삶이 고스란히 기록돼 몽골인과 이곳을 방문한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을 만날 예정이다.
국내에서 생소한 이태준은 몽골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나서서 예우를 할 정도로 각별하다. 몽골 정부는 이미 공원 조성을 위한 땅 약 6600제곱미터(약 2000평)를 내놓았다. 이렇게 마련한 땅에 연세의료원, 연세대학교의과대학 총동창회 등이 기금을 마련하고 울란바토르의 몽골연세친선병원, 주몽골 한국대사관 등이 중심이 돼 지난 2001년 공원을 조성했다.
궁금증이 더해진다. 이태준을 기념하고자 몽골 정부가 나서고, 또 연세의료원이 적극적인 역할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의문을 해결하려면 이태준의 삶부터 살펴야 한다. 이태준의 삶은 한 세기 전 독립의 꿈을 안고 한반도, 중국, 러시아, 몽골을 누볐던 피 끓는 청년들의 삶과 겹친다.
1883년 경상남도 함안에서 태어난 이태준은 연세의료원의 전신인 세브란스병원의학교(연세대학교 의과대학)를 1911년(제2회) 졸업했다. 의사 면허 제92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입학 전부터 안창호 등의 영향을 받았던 이태준은 졸업하자마자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중국으로 건너간다. 그의 짧지만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지난 6월 3일 준공한 이태준 기념 공원 내의 이태준 기념관. 이곳에서 이태준 지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동은의학박물관 |
몽골의 항일 독립운동가, 이태준
중국 난징에서 병원(기독회의원)을 개업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이태준은 지인(김규식)의 권유로 몽골의 울란바토르(당시 지명은 후레)로 근거지를 옮긴다. 울란바토르는 중국, 몽골, 러시아를 가로지르는 독립운동 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의사로서 인술을 펼칠 공간이었다.
이태준은 울란바토르에 병원 '동의의국(同義醫局)'을 개원한다. '같은 뜻을 가진 동지들의 병원'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단순한 병원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각지의 독립지사 간의 연락을 하는 곳이자,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는 이들의 머물러 가는 일종의 중간 기지였다.
울란바토르에서 이태준이 독립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반병률 교수의 연구를 통해서 그 전모가 상당히 밝혀졌다. 반 교수의 연구를 보면, 1920년 러시아의 레닌 정부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200만 루블에 해당하는 독립 자금을 지원하기로 하고, 이 중 1차로 40만 루블의 금괴를 나눠서 운반한다.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상하이로 운반되는 40만 루블 중에서 이태준은 12만 루블의 금괴 운반을 책임졌다. 그는 8만 불의 금괴를 상하이로 운반하도록 지원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나머지 4만 루블을 상하이로 운반하기로 했다. (앞으로 살피겠지만, 이 4만 루블의 금괴는 이태준이 목숨을 잃는 계기가 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태준은 의열단의 적극적인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실은 해방 직후인 1947년 소설가 박태원이 펴낸 <약산과 의열단>(백양당 펴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태준은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직접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울란바토르에 머물던 헝가리 출신의 폭탄 제조 기술을 가진 청년을 소개했다.
▲ 이태준 지사의 항일 행적을 기록한 일본 측 보고서. ⓒ동은의학박물관 |
몽골의 신의, 이태준
그렇다면, 몽골 정부는 왜 이태준을 기념할까? 이태준이 병원을 개원할 당시의 몽골은 19세기 후반의 한국과 마찬가지로 근대 의학의 수용이 전무했다. 특히 유목 생활에서 정주 생활로의 급속한 변화로 성병(性病)과 같은 전염병이 널리 퍼졌다. 전 국민의 70~80퍼센트가 '화류병'이라고 불리는 성병 환자였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이태준의 의술은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는 당시 몽골에 유행하던 성병의 절멸에 큰 공헌을 해 널리 이름을 떨쳤다. 몽골인이 그를 "신인", "극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을 대하듯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몽골인에게 도움을 줬는지 알 수 있다.
의술을 인정받은 덕분에 이태준은 몽골의 마지막 왕인 보그드칸의 주치의로 활동한다. 보그다칸은 1919년 7월 그의 공을 기려서 국가 훈장을 수여한다. 아직 걸음마 단계였던 20세기 초 한국의 근대 의학 수용의 수준을 염두에 두면, 일찌감치 몽골에 근대 의학을 전파하는데 기여한 그의 행보는 한국 의학사에서도 독보적이다.
미국인 의사든, 일본인 의사든 한국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동양의 근대 의학 수용은 제국주의라는 어두운 얼굴을 가진다. 이런 상황에서 이태준의 예는 제국주의와 관계 없는 방식으로 근대 의학을 전파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제3의 길을 선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렇게 몽골에서 의사로서 얻은 명성은 앞에서 언급한 이태준의 독립운동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런 명성("항일 운동에 힘쓴 유명한 의사") 탓에 그는 수많은 가능성을 남긴 채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그는 1921년 불과 서른여덟 살의 나이에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에 저항하며 몽골까지 쫓겨 온 백군 잔당에게 살해당했다.
독립운동 임무 수행하다 살해당해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1917년)에 반대하며 내전을 치르던 백군 중 일부가 1921년 2월 울란바토르를 점령한다. 이들은 울란바토르에 거주하는 유태인을 학살하고, 중국인이 경영하던 은행을 약탈하는 등 살육, 약탈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이태준의 병원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백군이 울란바토르를 점령하기 전, 이태준은 주치의로 보살피던 몽골 주재 중국군 사령관 가오시린으로부터 몸을 피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백군이 울란바토르를 점령하고 살육, 약탈을 할 때까지 피신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울란바토르에 남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반병률 교수는 한 논문에서 "이태준은 자기에게 부과된 임무, 즉 모스크바에서 온 자금 중 일부(4만 루블)의 운송 책임과 의열단 단장 김원봉에게 (폭탄 제조 기술을 가진) 헝가리 사람을 소개하기로 한 약속을 완수하고자 가오시린의 동행 요구를 거부하면서까지 울란바토르에 남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많은 기록은 이런 설명을 뒷받침한다. 박태원은 <약산과 의열단>에서 백군이 이미 울란바토르를 점령하고 나서야, 이태준이 헝가리인과 함께 베이징으로 향한 사실을 언급한다. 또 러시아에서 찾아낸 문서도, 그가 백군으로부터 금괴를 숨기는데 성공해 베이징으로 향한 사실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태준은 끝내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베이징으로 향하던 그는 백군에게 잡혀 결국 살해당했다. 그가 살해당한 데는 백군에게 부역하던 일본인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그가 죽기 직전 면담했던 러시아인, 박태원 등은 일관되게 그의 죽음에 "항일 활동을 하는 유명한 조선인 의사"의 존재를 아는 일본인이 관여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 최근 확인된 이태준 지사의 얼굴을 몽골 화가가 그린 초상화. 이태준 기념관의 한쪽 벽에 걸려 있다. ⓒ동은의학박물관 |
이태준의 부활을 꿈꾸며
한국 정부는 뒤늦게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해 이태준에게 1990년 건국훈장을 추서했다(1980년 대통령 표창).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반병률 교수의 연구가 있기 전까지 그의 삶의 전모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뒤늦게 연세의료원 등의 노력으로 2000년 기념비, 가묘가 세워지고, 2001년 공원도 개장했으나 여전히 한국에서 이태준은 생경하다.
울란바토르를 방문한 한국인이 자이산 승전기념탑에서 태극기를 보고 공원을 방문하고 나서야 이태준의 존재를 처음 아는 경우가 태반이다. 몽골인 역시 그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접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해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 국가보훈처, 연세의료원, 주몽골 한국대사관 등이 나서서 기념관의 건립을 추진한 것도 이 때문이다.
기념관 준공에 앞서 마지막 점검을 하고자 지난 5월 몽골을 방문한 박창일 연세의료원장은 "이태준은 국적과 인종을 뛰어넘는 인간 사랑을 실천한 대의(大醫)였다"며 "한국인, 몽골인 모두 다 이 기념관을 계기로 그의 숭고한 삶을 배우고 또 따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 이태준 기념 공원에서 올려다본 자이산 전승기념탑. 태극기와 몽골기 사이로 보이는 곳이 전승기념탑이다. 전승기념탑으로 올라가는 구릉의 한 쪽에 이태준 지사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동은의학박물관 |
이태준 묘지에 얽힌 뒷얘기 이태준 기념 공원은 울란바토르의 자이산 바로 밑에 조성됐다. 이를 두고 반병률 교수는 "몽골 정부의 누가 부지를 선정했는지 참으로 기막히게 잘 선정했다"고 찬탄했다. 왜냐 하면, 이 공원이 조성된 자이산 근처가 이태준이 실제로 매장된 곳의 근처라고 추정할 만한 정황이 있기 때문이다. 여운형의 일기가 바로 열쇠다. 1921년 가을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던 길에 울란바토르를 들른 그는 이태준의 묘를 직접 찾는다. 그는 당시의 경험을 1936년 <중앙> 5월호에 발표한 '몽고 사막 여행기'에 이렇게 썼다. "하루는 이곳(울란바토르)에 있다는 조선 사람의 무덤을 찾았다.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인 이 조선 사람의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한 조선 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였다. 그는 이태준이라는 청년 의사로 몽골에서 보낸 5, 6년간의 생활을 (…) 가지가지의 질병의 박멸에 바치고, 마침내 (…) 그 짧은 일생의 최후를 마친 청년이었다. (…) 나는 멀리 보이는 나지막한 구릉의 비탈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 벌거벗은 산비탈을 빈약한 왜림이 이곳저곳을 덮고 있는 경사지의 한복판에서 나는 찾아간 묘지를 발견하였다. 간소한 분묘였다. 이곳에서 건너에 보이는 이 근처의 오직 하나의 울창한 숲속을 가리키면서 안내해 준 몽골 동무(그 숲을 남산, 성산이라고 일컫는다)는…."
박형우 교수는 "비록 자이산의 구릉은 승전기념탑 건립 과정에서 오래 전에 파괴되었지만 이태준 기념 공원은 바로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이니 실로 절묘한 위치"라고 덧붙였다. 몽골의 대초원에 잠든 조선의 청년, 이태준. 나란히 선 태극기와 몽골기를 보면서 웃는 그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
참고 문헌
반병률, '의사 이태준의 독립운동과 몽골',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3집(2000년 여름).
반병률, '의사 이태준의 항일민족운동과 몽골', <건축역사연구> 특별호(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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