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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탄생의 비밀…열쇠는 '정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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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탄생의 비밀…열쇠는 '정관사'!

[철학자의 서재] <지중해 철학 기행>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여행을 하다가 큰 기대도 없이 들어간 허름한 밥집에서 그 지역의 깊이 곰삭은 맛을 맛보는 것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오랜 세월이 흘러 문득 그 근방을 지나다가도 그 맛이 생각나고 그 정취가 떠오른다. 좋은 책도 그렇다. 별 기대도 않고 집어 들었다가 끝내 밤을 꼴딱 새워버린 경험이 더러 있지 않은가!

근래에는 나이가 좀 들어서인지(?) 웬만한 책을 봐서는 그리 흥이 일지 않는다. 가끔씩 서점에 들러 제호에 이끌려 몇 장 넘겨보고는 '뭐, 그저 그렇고 그런 책이군' 하거나 '이런 책을 쓸 바에야 차라리 쓰지 않는 것이 낫겠군. 종이가 아깝네' 하고, 나도 책을 두어 권 낸 주제에 눈 밝은 사람이 나를 뒷전에서 꾸짖을 것은 생각도 않고, 뇌까리면서 책을 내려놓고는 했다.

그만그만한 책들이 그만그만한 제호를 달고서 날마다 쏟아져 나와서 내용을 꼼꼼히 훑어보기도 전에 지레짐작으로 두어 장 넘겨보고는 내려놓게 된다. 정말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하는' 격이다. 그래서 억울한 책이 얼마나 많을까? 그런데 간만에 거의 추리소설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철학사 책을 읽었다.

'큰 책은 큰 악'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책의 도덕적인 선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책이 크면 그만큼 더 골칫거리라는 말이다. 읽기도 힘들고 들고 다니기도 힘들 테니까. 그런데 <지중해 철학 기행>(클라우스 헬트 지음, 이강서 옮김, 효형출판 펴냄), 이 책도 650쪽이 넘는, 참 두툼한 책이다. 들고 다니며 읽기에는 꽤나 골칫거리이다.

더구나 철학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닌가? 그런데 내용도 무게도 무거운 책이지만 그 골치를 이겨내고 읽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정말 재미있다. 철학책이 재미있으면 얼마나 재미있을라고? 내가 남의 책 광고나 해주게 생겼나? 그런데 재미있다. 좋은 책은 어려워도 읽어야 한다. 좋은 책이라면 큰 골칫거리라도 읽어야 한다. 그래서 배우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조금이라도 이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좋은 책이면서 재미도 있다면 금상첨화. 무엇을 더 바라랴!

그래도 이 책이 어렵다고 한다면? 아무리 쉬운 말로 풀고 이야기 형식으로 꾸민다 해도 어려운 것은 어려운 것이다. 저자도 말했듯이 '이발소의 소크라테스'나 '에피쿠로스와 거위 간 파이'로 말랑말랑하게 엮어낸다고 해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나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쉽게 이해될까?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chalepa ta kala)!" 어려움을 이겨내고 책을 읽어보라. 그러면 분명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다.

하나라도 더 알고 죽자

▲ <지중해 철학 기행>(클라우스 헬트 지음, 이강서 옮김, 효형출판 펴냄). ⓒ프레시안
1980년대 초 대학에 들어와 서양 고대 철학사 강의를 주로 거스리의 <희랍 철학 입문>으로 입문하였다. 표지가 너덜너덜하여 창호지로 덧씌워가며 열심히 읽었다. 고전을 전공하지 않는 인문 학생들을 위한 교양 강의를 책으로 만든 것이라고 했는데도 참 어려웠다. 그렇지만 강의를 따라가기 위해, 대학원 입학 시험 준비를 위해, 여러 번 되풀이 읽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 책은 고대 헬라스의 철학을 탈레스부터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깔끔하게 잘 정리한 책이다. 그런데 이런 책을 우리나라 대학생들 가운데 교양으로 읽을 사람이 있을까?

거스리의 책이 일종의 전공 서적이라면 <지중해 철학 기행>은 그야말로 인문 교양서다. 지중해 지역을 따라가면서 그 지역에 연고를 가진 철학자와 철학 사상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공간으로는 헬라스의 밀레토스에서부터 에스파냐의 세비야까지, 시간으로는 탈레스 때로부터 16세기 르네상스까지 서양의 철학사를 서술해간다.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등 고대와 중세 서양의 철학사를 수놓은 밤하늘의 별과 같은 철학자들의 철학 사상을 그들과 관련한 일화를 이야기하지 않고서도 이렇게 재미있게 소개하다니! 이 책을 읽고 얻은 것이 무척 많지만 두어 가지만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 책의 부제(副題)처럼(원서에서는 원래의 제목인) '모든 길은 플라톤으로' 통하니까 말이다.

이 책의 저자는 무뚝뚝하게 자기 할 말만 했지만 소크라테스에 얽힌 일화 하나가 떠오른다. 친구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이다. 소크라테스는 서양 철학을 상징하는 철인답게 웬 일화가 그렇게도 많은지. 일화의 성격상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이야기다.

소크라테스가 사형 판결을 받고 사형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날 아침이 되었다. 같이 사형을 받기로 되어 있는 사형수 한 사람이 참 구슬프게도 자기 고장의 노래인지 시인지를 읊조렸다. 너무나 의미심장하고 애절한 내용에 감동을 받은 소크라테스가 다시 한 번 읊어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사형수가 심드렁하게 무엇 하러 그러느냐고 물었겠지. 소크라테스 왈, 너무도 좋은 내용이라 배워보려고 그런다고. 어이가 없어진 사형수 왈, 참 댁도 딱하시오. 금방 죽을 사람이 배워서 무엇 하게요? 그러자 우리의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말했단다. "죽기 전에 하나라도 더 알고 죽으려고요."

참 우스개인지 일화인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촌철살인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한 말은 참 경건하고 진지한 공자님 말씀이다. 그러나 죽기 전에 하나라도 더 알고 죽으려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빙충맞아 보이기도 하고, 가끔씩은 현실적인, 너무도 현실적인 마누라한테 바가지도 긁히고 구정물도 뒤집어쓰고, 아름다운 미소년과 미소녀를 보면 사족을 못 쓰고 달려가 구경하고, 낫살이나 먹고 점잖지 못하다는 핀잔에 머리를 긁적거리며 의뭉을 떠는, 딱 소크라테스의 말이다. 그런데 철인이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다 통하는가? 도가 통한 사람들끼리는 과연!

왜 헬라스에서 철학이?

아마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지? '사람은 나면서부터 알고자 한다'고. 헬라스 사람들은 앎 자체를 알려고 했단다. 그렇지. 공자도 배우고 때마다 익히면 즐겁다고 했지만, 배움이라는 것,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지. 그리고 그걸 알려고 하지도 않으셨고. 그런데 헬라스 사람들은, 배움,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려고 하고 궁금하게 여겼단다. 그리하여 고대 헬라스에서는 마침내 학문(철학)이라는 것이 생겨났단다.

헬라스에서 학문이 생겨난 아주 중요한 까닭 가운데 하나로서 이 책의 저자는 고대 언어 가운데서 이 언어에만 독특한 정관사에서 찾는다. 물론 다른 요인도 여러 가지 들고 있지만. 정관사나 부정관사는 인도유럽어에 속하는 언어에는, 몇 나라 말을 제외하고는 대개 발달해 있다. 그런데 처음으로 이런 정관사를 고안해낸 사람들이 고대 헬라스어를 쓰던 사람들이었단다. 정관사를 발명한 언어에 주어진 공로의 월계관이 바로 학문(철학)의 발생이었던 셈이다.

왜 정관사는 철학이 태어나는 데 산파 역할을 했을까? 정관사는 어떤 말 앞에 붙어서 그 말을 명사로 만든다. 그리하여 정관사가 붙은 말은 실체가 된다. 쉽게 말하자면 정관사가 붙은 말은 무엇이든 간에 그 무엇으로 불릴 수 있다. 자립적인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장미꽃은 붉다'거나 '말이 달린다'고 할 때 '붉다'는 장미의 속성을, '달린다'는 말의 동작을 나타내는 말로서 자립적인 것이 아니지만 장미와 말은 자립적인 것이다.

우리말로는 특별히 어느 하나를 한정해서 가리키지 않는 한 장미와 말 앞에 아무런 말이 덧붙지 않지만 영어를 비롯한 인도유럽어에 속하는 대부분의 말들에서는 the rose(la rose, la rosa, die Rose), the horse(le cheval, il cavallo, das Pferd)처럼 반드시 관사가 붙는다. 관사가 붙는 말은 명사이다. 학문은 바로 이 명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속성을 나타내는 말에도 정관사가 붙으면 명사가 된다. 바로 이렇게 명사가 아닌 것을 명사로 탈바꿈하게 하는 것이 관사이다. 자립적 존재자가 아닌 것도 관사가 붙으면 자립적인 존재자, 추상명사가 되는 것이다. 장미꽃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이었던 '붉다'에 관사가 붙어 '붉음(the red, le rouge, il rosso, das Rot)'이 됨으로써 '붉음'은 추상명사가 되고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말 '붉음'은 형용사 '붉다'에 명사화접미사 'ㅁ'이 붙어서 명사가 된 것이지만 서양 언어에서는 그냥 앞에 정관사만 붙어서 그 모양 그대로 명사가 된다. 헬라스 사람들은 정관사 덕택에 처음으로 명사가 아닌 것을 자유로이 명사로 만들 수 있었단다. 이렇게 만들어낸 추상명사는 연관된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설명하고 규정할 수 있고, 개념화할 수 있다. 그리하여 속성을 개념화함으로써 학문이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나이 학당'의 중앙에서 플라톤은 왼손에는 <티마이오스>라는 책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역시 왼손에는 <윤리학>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바닥을 땅으로 향한 채 앞으로 뻗고 있다. <티마이오스>는 플라톤의 우주론을 담은 책이다. 이 책에서 플라톤은 인간의 삶이 우주적 질서에 동화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인간이 이 땅에서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가를 다룬다. 그래서 이 그림은 관념과 이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플라톤과 현실과 경험을 중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원한 대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 저 예지의 세계만 쳐다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만 머물러 있었을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흔히 생각하듯 그렇게 대립적이고 대조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서 20년 동안이나 수학을 했으니 나중에 아무리 스승을 비판하고 스승과 갈라져 나가서 따로 독립했다 하더라도 플라톤의 사상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죽고 없는 플라톤을 마음껏 두들기며 연습을 하여 철학의 대가가 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공동생활에서 최선의 공동체를 찾는 데 가장 큰 관심을 두었다.

두 사람은 모두 인간의 정치적 공동생활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하는 물음에서 출발하였다. 그런데 두 사람이 얻은 답은 각각 달랐다. 플라톤은 공동생활의 성공 여부는 정의와 이를 통해 보장되는 공동체의 평화에 달려 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를 최고가는 정치적 선으로 보았다. 이리하여 두 사람의 개성은 이후 유럽의 정치 질서를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놓았다. 두 사람의 긴장과 갈등과 대립과 타협이 이후 정치사를 수놓았다. 곧 자유와 평등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권을 갖는가? 자유와 정의는 조화할 수 있는 것인가?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는 바로 정의로운 공동체를 주도면밀하게, 시인의 입을 함부로 놀리지 못하도록 겁을 주고, 여자를 비롯한 모든 소유물을 공유하게 하면서까지, 구성하고 있다. 플라톤이 설계한 국가는 그야말로 유토피아, 있지 않는 곳이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로 분장한 플라톤이 이런 나라는 실제로 있는 나라는 아니라고, 그저 나라의 '뽄'으로서 생각해보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도덕주의자는 근본주의자이다. 근본주의자는 혁명가이다. 이 책의 저자 선생님이 플라톤을 서술하는 논리를 따라가 보면 그렇다. 플라톤은 정의롭지 않은 사회를 통렬하게 혁파하기 위해 정의로운 공동체를 아주 곧이곧대로 설계해보았던 것이다.

확실히 현실적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의 목적이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삶', 곧 잘 사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공동체의 목적이지 단순히 생존만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그렇게도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바, 덕을 갖춘, 가장 탁월한 자(들), 철학자가 다스리는 가족적 구성을 가진 공동체를 거부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철학자가 왕이 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단다. 플라톤에게서는 척도에 따른 공동체를 구축하는 최고 전문가인 철인제왕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인간의 모든 삶을 규제하고 도덕을 평가하는 심판관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삶이 규제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규제는 철인제왕의 선량한 양심에 의해 승인되기까지 한단다. 완벽하게 조직된 정의는 억압과 부자유를 초래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시민 각자의 자유가 정치 질서의 중심이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시민은 동등한 자유를 누려야 한다. 헬라스는 바로 이 가치를 지키려고 페르시아와 맞서 싸웠던 것이다. 공동체의 구성과 운영은 전문가의 소관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책무이다. 그러므로 이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공동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갖가지 상황을 적절하게 평가하고 올바른 결론을 끌어내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런데 지금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사회는 여전히 정의(평등)와 자유 사이에서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남은 궁금증

그러고 보니 이 책에는 아르케란 말이 없잖은가! 거스리의 책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철학 개론과 서양 철학사 책에서는 만물의 아르케를 묻는 데서 철학이 출발했다고 했는데 말이다. 이웃한 대학 철학과에 유학 온 고향의 동창생 녀석이, 당시 시골에서 올라온 대학 신입생들 사이에서는 학보 보내기가 유행했는데, 내게 자기 대학 학보를 보내면서 보내는 사람 이름에 아르케(Arche)라고 떡 적어서 보내지를 않았었나!

그만큼 철학을 공부한다 하면 거의 맨 먼저 배우는 말이 아르케였다. 그런데 이 책은 아르케라는 말은 한 마디도 안 쓰고서 고대 헬라스 철학을 이야기한다. 아르케 대신에 요소(stoicheion)라는 말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여기저기서 헬라스 원어를 이것저것 쓰면서 정작 아르케라는 말은 왜 안 썼을까?

또 한 가지! 이 책의 제목은 분명히 <지중해 철학 기행>이다. 그런데 지중해를 둘러싼 여러 지역과 연관 있는 철학자의 철학 사상은 알차고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기행이 빠진 것 같다. 내가 제대로 읽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그렇구나.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여 철학을 여행한 것이지 지중해 지역을 여행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 내가 잘못 읽었구나!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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