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간판만 봐도 대충 알 수 있듯 한식을 제외하면 중식이 가장 많다. 한국음식업중앙회의 약 42만 가입자 가운데 중식이 2만여 곳 정도 된다. 그다음은 양식이 1만 5000, 일식이 1만 3000여 곳이다. 물론 회원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니 비회원까지 통계로 잡으면 어떨지 모르지만, 그래도 대충 비슷한 비율을 보이지 않을까 한다.
최근에는 돈가스와 일본식 선술집까지 합치면 일본식 음식점의 수가 날이 다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한식이야 한국 안에서의 이야기이니 예외로 쳐도 중식과 일식, 양식은 그 내력이 다르다. 이들 음식점의 역사는 우리 근대사와도 겹쳐져 있다.
함께한 역사만큼 닮아온 삼국 음식 문화
중국과 일본, 한국은 역사적으로도 함께한 세월이 길지만 음식에서도 공통점이 무척 많다. 지금의 세 나라 음식을 놓고 볼 적에는 많이 다르다고 느낄지 몰라도 세계 다른 곳에 비하면 커다란 공통 유산들을 지니고 있다.
우선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이 쌀을 주곡으로 하는 밥 문화권이라는 점이다. 물론 인도와 동남아시아도 쌀의 원산지이고 같은 쌀 문화권이기는 하지만, 한·중·일 세 나라가 중국을 통해 수입한 쌀 문화권이라는 점에서는 함께 묶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쌀 이외의 밀, 조, 보리와 같은 곡식들도 함께 공유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만주 지역의 콩을 중심으로 한 발효 식품의 공유다. 된장과 간장에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콩을 중심으로 한 발효 식품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국수라는 음식도 다른 어느 곳보다 동질성이 뚜렷하다. 역사적 종교적 맥락뿐 아니라 지역성에 따른 재료의 차이로 세 나라의 음식이 서로 달라지긴 했지만, 세계 전체의 음식을 놓고 볼 때에는 이 삼국의 음식만큼 유사한 것도 사실 찾기 어렵다.
한·중·일의 음식은 많은 교류를 통해 서로 동질성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음식의 재료가 되는 농산물과 가축의 전래다. 중국은 넓은 영토를 이루고 있고 동남아시아와 서역을 통해 많은 종자를 들여와 한국과 일본에 전할 수 있었다. 일본도 남쪽으로부터 들어온 종자의 이동에 크게 공헌했다. 예컨대 고구마와 고추가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 한국은 중간에 있어 삼국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한편, 세 나라 반찬의 근간이 되는 콩과 메주를 양쪽에 전파하여 자신의 몫을 다했다.
중국 사신을 따라 들어온 만두
그렇다면 종자와 음식 재료의 교류 이외에 음식의 직접적인 교류는 어떠했을까? 음식이라는 것은 쉽게 상하기에 일부 재료를 제외하면 무역품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사실 재료의 동질성이 있더라도,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음식들은 각기 특성을 달리하게 된다. 우리 팔도음식에서 저마다 나타나는 차이보다는 삼국 간의 차이가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전혀 교류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왕래하게 되면 그곳의 음식을 맛볼 수밖에 없는 법이고, 그렇게 맛본 음식들이 맛있다고 생각하면 조리법까지 배울 수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와 중국은 기나긴 세월 동안 서로 사신이 왕래했으니 그 정도의 음식 교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없다.
만두의 예를 들어보자. 만두가 중국의 발명품임은 틀림없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얇은 피를 만들고 속을 채워 찌거나 삶아 먹는 음식이다. 속설에는 제갈량이 제사용으로 바치는 사람의 목을 대체하고자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만두가 분포하는 지역을 보면 평안도에서 황해도를 거쳐 개성까지 이르는 지역이다. 옛날 사신이 왕래했던 동선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다만 그렇게 왕래를 통해 전해진 음식이 현지의 입맛에 큰 변화를 불러온 것 같지는 않다. 가령 앞의 만두도 속을 채우는 재료가 우리식으로 바뀐다. 만두소로 고기에다 두부, 숙주와 김치까지 등장하며, 개성으로 내려오면 채소만으로 채운 만두도 있다. 그렇다면 '교자'가 아닌 만두는 이제 한국 음식이라 해야 마땅하다.
음식 문화에 남은 일제 강점기의 잔재
일본과의 음식 교류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중국과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 사신의 왕래가 있다면 음식 교류도 필연적이다. 우리의 삼국 시대 때부터 많은 문물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중 콩과 메주를 비롯해 배와 능금, 호두 같은 과일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자와 음식의 제법도 일본으로 건너갔다.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통신사의 교류가 있었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로 17세기 초에 이르면 일본인의 거류지인 왜관도 승인했다. 이 왜관에 일본인들이 머물면서 서로 교역을 하게 된다. 사람이 있으니 음식의 교류 또한 없을 수 없다. 일본인의 거류지 인근에서는 승가기(勝佳妓)라는 이름의 '스키야키'가 성행한다.
물론 이 스키야키는 쇠고기를 주재료로 쓰는 요즘의 것과 달리 다시마 국물에다 해산물을 넣은 일본식 전골이다. 근방에 이런 음식이 유행하는 것과는 별도로 일본식 국수도 퍼져 나간다. 일본식 음식점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일본풍의 음식을 일부에서 해 먹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일본인들이 더욱 활발하게 조선을 드나들던 19세기 말에는 교류가 한층 강화되었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식 음식의 잔재가 수많이 남게 되었다. 술에는 일본식 청주가, 조미료로는 왜간장이, 그리고 '고로케'를 비롯한 일본식 양과자, 어묵과 다쿠앙, 일본식 우동과 메밀국수, 돈가스와 카레라이스 등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특히 돈가스와 고로케, 팥소를 넣은 도넛 같은 것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양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해방되고 나서는 반일 감정이 왜식 문화의 잔재들을 일소하려고 했지만, 사실은 표면적으로 일본식 상호를 내걸지 못했을 뿐이지 일본식 음식점은 굳건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예를 들어, 양식이 낯설었던 1970~80년대만 하더라도 경양식집이 많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파는 음식들은 돈가스나 카레라이스, '함박'이라고 부르던 일본식 햄버거 스테이크가 대종이었다. 양식은 곧 일본식 양식이었고 제대로 된 양식집들은 극히 드물었다.
빵집만 하더라도 대개는 일본인에게 기술을 배운 탓에, 식빵 같은 것들은 본디 모습을 지녔더라도 단팥소를 넣은 도넛, 크로켓의 변형인 일본식 '고로케', 보통 콩소를 넣은 화식 과자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런 것들 대부분은 요즘까지도 굳건하게 살아남았다. 돈가스와 같은 몇몇을 빼면 그것이 일본식이라는 것조차 모르면서 애용하고 있다.
야키니쿠의 아이러니
반일 감정은 여전히 거세다. 특히 역사 교과서나 독도 문제가 불거지면 더없이 거센 반일 감정이 팽배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제는 일본식 라면집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게 되었고, 설사 '오뎅 바'나 일본식 선술집인 '이자카야' 간판이 일본어로 쓰여 있더라도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그보다 더 큰 규모의 일본식 요리점이 온통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로 이름을 지었어도 그러려니 하고 지난다.
그 대부분은 한국 사람이 경영하고 주방을 책임진 요리사도 한국 사람이며, 제아무리 일본식 전통 요릿집이라도 대개 김치는 나오게 마련이지만, 일본의 색채가 뚜렷한 음식점이 차츰 늘어가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일본말로 쓴 간판은 물론이고, 버젓이 일본식 음식을 판다고 쓰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그저 회를 판다고 쓰거나 일식(日食), 일식(日式)이라는 묘한 표현만을 간판 귀퉁이에 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것이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반일 감정이 조금씩 엷어지면서 차츰 번화가를 중심으로 일본식 회와 초밥을 팔기에 이르렀다.
최근에는 횟집이나 초밥집 이외에도 다양한 일본식 음식점이 있다. '라멘' 전문점도 늘어만 가고 한국의 수출품이 다시 역수입된 '야키니쿠' 같은 것도 있다. '야키니쿠'는 재일교포들이 일본 사람들을 상대로 팔던 한국식 불고기다. 재일교포가 많이 살던 오사카를 중심으로 퍼진 한국 음식인 셈이다. 고객이 일본 사람인 만큼 약간 달콤하게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그것이 마치 일본 음식인 양 우리나라에서 팔리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야키니쿠'는 엄격하게 이야기하자면 '일본식 한국 불고기'로 번역해야 옳을 것이다.
중국 음식점 요리 이름으로 보는 한·중·일 삼국지
20세기 이전에는 중국 음식과의 교류가 재료와 종자의 수입 정도로 그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중국에서 사신이 와서 그들 식성에 맞게 고기와 기름진 음식을 대접하더라도 엄연히 한국식 요리법으로 조리한 것들이었다. 드라마 <대장금>에 나오듯 만한전석 같은 중국요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청일전쟁이 끝난 뒤로는 화교들이 우리나라에서 음식점으로 자리 잡기 시작해 일제 강점기에도 살아남았는데, 그 당시 주요 단골은 일본인들이거나 일본과 손잡은 관리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중국 음식점에서도 그 잔재를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중국 음식점에서 메뉴판을 보면 여러 가지 용어가 혼재함을 알게 된다. 우리 음식 같은 이름도 있고, 언뜻 들어도 중국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는 이름도 있다. '팔보채'나 '오향장육' 같은 요리는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는다. 우리 한자 발음으로 읽어도 뜻이 통하고 자연스러우면 자연스럽게 우리식으로 읽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어식 이름도 현대 중국어와는 달라 순전한 중국식 발음이 아니다. 중국 방언의 영향도 얼마간 있다. '깐풍기'와 '기스면'이 그러하다. 깐풍기란, 닭을 조각내어 튀긴 다음에 갖은 양념과 기름을 넣고 한 번 더 볶아서 내오는 음식이다. '깐풍'은 요리 방법이고 '기'는 닭이라는 재료를 뜻한다.
'기스면'의 '기'도 닭을 뜻한다. 그런데 이 닭 계(鷄) 자의 현대 중국어 발음은 '지'가 맞다. 그런데 왜 기라는 다른 발음으로 불릴까? 이것이 바로 한국에 있는 중국 음식점이 산동과 관련되었음을 명확하게 증명하는 발음이다. 닭 계 자의 산동식 발음이 바로 '기'다.
게다가 일본식 이름도 적지 않다. 초창기 화교가 열었던 중국 음식점의 주요 단골이 일본인이었던 까닭이다. 중국 음식점에서 일본식 무절임인 '다쿠앙'과 한국식 김치를 내놓는 것부터가 그렇다. 짬뽕이나 우동이라는 일본식 이름이 있는가 하면, 군만두도 예전에는 일본어와 한국어를 혼용해 '야끼만두'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처럼 중국 음식점의 음식 이름은 여러 역사의 흔적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중국 음식점에는 우리식으로 변한 이름도 있다. 만두라는 명칭이 그것이다. 중국에서는 물에 삶아 먹는 것을 '수이쟈오(水餃子)'라 하고, 찐만두는 '빠오쯔(包子)', 군만두는 '꿔톄(鍋貼)', 속을 넣지 않은 것만 '만터우[饅頭]'(이것을 꽃 모양으로 만든 것이 고추잡채를 먹을 때 나오는 화권이다)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식으로 하자면 모두가 만두다. 삶은 것은 물만두, 찐 것은 찐만두, 기름에 튀긴 것은 군만두라 부르니 자연스럽게 한국식 이름을 얻은 셈이다. 볶음밥이나 잡채밥도 우리식으로 번안한 이름이다.
중국 음식점의 이런 복잡한 음식 이름들은 나름대로 그것이 받아들여지고 변천해온 역사의 흔적들을 지닌 것이다. 해방 후 중국음식은 자장면, 짬뽕으로 대변되는 대중화와, 집이나 사무실로의 '신속 배달'이라는 마법에 힘입어 급속하게 퍼져갔고,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지고 말았다.
ⓒ프레시안(손문상) |
식탁 위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청일전쟁
이제 한국의 중국 음식점도 화교들의 산동식에서 벗어나 꽤 다양해졌다. 광동식의 딤섬을 파는 곳도 있고 한중 수교 이후에는 중국에서 직접 요리사를 모셔다 연 중국 음식점도 많다.
하지만 한·중·일 세 나라를 놓고 볼 때, 우리나라에는 정통이든 아니든 수많은 중국 음식점과 일본 음식점이 있지만 중국과 일본에는 한국음식점이 많지 않다. 물론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한국 관광객을 위한 곳이고,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곳은 무척 적다는 것이다.
김치나 불고기 같은 몇몇 음식이 인기를 끄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일본 음식이나 중국 음식이 보편화된 것에는 아직 한참을 미치지 못한다. 그 배경에는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가 도사리고 있다. 음식 삼국지를 볼 때 우리에게는 참으로 처량한 삼국지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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