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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간다…바로 부처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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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간다…바로 부처의 가르침"

[인터뷰] 명진 스님이 들려주는 '불교 이야기'

불교의 기도는 기원보다 발원에 가깝다. 무언가 이뤄지기를 절대자에게 바라기보다는 그 무엇인가를 이뤄질 수 있도록 스스로 정진하겠다는 각오의 의미가 더 크다. 그런 점에서 온전히 신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기독교와는 다르다.

음력 4월 8일. 초파일은 우리에게 '부처님 오신 날'로 친숙하다. 올해는 양력 5월 21일이다. 거리마다 연등을 달고 사찰마다 초파일 행사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하지만 정작 부처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물질 만능주의, 무한 경쟁주의, 승자 독식 사회…. 현재 우리 사회를 일컫는 말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부처님이 우리 사회에 주는 가르침은 무엇일까. 초파일을 앞두고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서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을 만나 부처의 가르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 명진 스님. ⓒ프레시안(김봉규)

"내가 누구인가 물은 게 부처님 오신 날 의미"'

프레시안 :초파일입니다. 해마다 맞는 부처님 오신 날이지만 실제로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 생각하시는 불기 2554년 부처님 오신 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명진 : 그 물음에 대답을 하려면 '어떤 것이 부처인가' 하는 걸 먼저 알아야 합니다. <금강경>에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색(모양)으로서 나를 보거나 음성(이름)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라는 뜻입니다. 부처라는 이름도 부처라는 어떠한 모양도 참다운 부처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2500년 전 부처님께서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 하나로 깨달음을 얻으신 분입니다. 그분을 기리는 날은 바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는 무엇인가라는 간명하면서도 가장 본질적인 물음을 통해 우리 스스로 깨달음을 얻도록 노력해야 하는 날이지요.

프레시안 :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잘 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명진 :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실제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우리는 '저는 000입니다'라고 이름을 댑니다. 하지만 이름이 참다운 그 사람의 실체일까요? 그가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고, 그 이름은 다른 사람을 구별하는 하나의 징표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도 역시 이름이 그 사람 자신일 수는 없습니다.

또 어떤 이는 누군가의 딸, 혹은 아들, 누군가의 아내나 남편, 동료 등 이런저런 관계를 통해 자신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또한 온전한 답은 아닐 겁니다. 우리는 이 간단한 질문에도 명쾌한 답을 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을 안다고 확신하면서 살까요?

프레시안 : 그렇다면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확실하지 않은 건가요?

명진 : 존재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시간은 어떻습니까? 흔히 지금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기자님께서는 아마 2010년이라고 대답하시겠지요? 왜 2010년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그것이 정확한 시간 개념입니까?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닙니까? 아까 말씀하신 불기로 따지자면 2554년, 단기로 하자면 4343년입니다. 기준에 따라 다른 겁니다. 인류의 역사는 최소한 10만 년이 넘습니다.

그런 점에서 2010년이라는 숫자는 단지 거기를 시작점으로 잡자는 허구의 약속일 뿐입니다. 그걸 확실한 것인양 살고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입니다. 공간은 또 어떻습니까?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의 좌표를 정확히 찍을 수 있습니까? 여기는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입니다. 한국이고 아시아고 지구에 속한 곳입니다. 지구는 태양계, 은하계에 속해 있는데 그 다음은 어딥니까? 우주라는 광활한 백지 위에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딘지 누가 확실히 가리킬 수 있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자기 자신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공간과 시간에 대해서도 무엇 하나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이 있고 종교가 있는 것입니다.

프레시안 : 자신의 존재도 시간도, 공간도 다 불확실하다는 것은 삶이 불확실하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존재의 불안함 때문에 종교가 지금껏 존속할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명진 :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종교인 기독교와 불교는 그 불확실성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기독교는 그 알 수 없는 존재와 시간과 공간이라는 삶의 문제를 하느님에게 넘깁니다. 기독교에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그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고서는 절대자 하느님을 굳게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불교는 의심하는 겁니다. 그 의심으로 묻습니다. 그리고 아주 도발적으로 묻습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셨다면 세상을 만든 하느님은 또 누가 만들었는가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이 됐던 알라신이 됐던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논리적으로는 만든 그 존재도 누군가 만들었을 것이라는 게 성립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불교에서는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겁니다. 부처님이니까 무조건 '예'하지 말고 스스로 그것이 진실인지 묻고 찾아보라는 겁니다. 다른 누구에게 의지하거나 구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물음으로서 깨달으라는 것이죠. 그래서 불교를 물음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는 겁니다. 의심과 물음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야말로 불교입니다.

"업의 안경을 통해 세상과 자신을 보려니 제대로 보지 못할 수밖에"

프레시안 : 하지만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 말처럼 그렇게 쉬울까요?

ⓒ프레시안(김봉규)
명진 : 불교는 바로 그게 어렵다는 고정관념부터 의심하는 겁니다. 그리고 솔직해지는 거죠. 불교에서는 '쉽고도 쉽도다.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잘 모르겠다. 알 수 없다. 바로 그것입니다. 불교는 내가 나를 모른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자는 겁니다. 모르니까 어떻게 됩니까? 오만하지 않고 겸손해지겠지요? 딱 무엇이다 단정할 수 없으니까 고민하고 성찰하겠지요.

불교의 수행은 바로 이런 물음을 집중해서 끊어지지 않게 지속시켜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고정관념, 자기가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학습되어 온 생각에 갇혀서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업(業)이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지 못하지요. 사람은 저마다의 업이 있는데 어떤 이는 붉은색 안경, 또 어떤 이는 푸른색 안경이라는 업의 안경을 통해 세상과 자신을 보려고 하니까 제대로 볼 수 없는 거죠.

프레시안 : 자기 업에 따라 판단하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은 앞서 말씀하신 스스로가 자신을 찾는다는 것과 달리 우리 삶이 업의 궤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얘기처럼 들립니다.

명진 : 의심하지 않고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사는 것, 그게 업입니다. 그러나 이게 맞나 하는 의심이 살다보면 순간순간 생기지 않습니까? 사춘기에 우리는 지독한 열병처럼 나는 뭔가, 왜 사나 하는 물음을 겪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는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다 외면하지요. 그러면서도 가슴 한 곳에는 내가 왜 사나 하는 끝없는 갈증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그 의문을, 그 의심을 지속적으로 집중함을 통해 참다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업대로 살아가는 것이 운명에 속박되는 것이라면 수행은 바로 그러한 자기 자신의 업을 벗어던지는 길입니다. 고정관념과 업에 갇혀 살지 말고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회의하고 의심하고 물음으로서 참다운 지혜를 얻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나만 옳다는 오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프레시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옳은가? 하고 되묻는 성찰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자칫 불가지론, 혹은 회의주의로 귀결되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 복잡한 경쟁 사회 속에서는 이게 맞는 것일까 회의하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저만치 달려가버리니까 낙오될 수도 있는 거구요.

명진 : 앞서 불교는 수행을 통해 자신의 고정관념 혹은 전도된 생각이라는 업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기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라는 주관적인 태도의 업을 우리는 옳은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는 자기 자신의 생각이지 객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닙니다. 나는 이게 옳고 진실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닐 수 있는 겁니다.

같은 사안을 두고도 전혀 다른 해석과 의견이 존재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런 업의 차이, 입장과 지식의 차이로 인한 충돌과 마찰이 늘 생겨납니다. 불교는 바로 그러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의심하는 거죠. 그런 의심은 이것이야말로 옳다는 판단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진정 옳음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겁니다. 내 것만이 옳다, 이 길만이 옳다는 외통수의 관점이 아니라 옳은 것을 수용하겠다는 열린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나의 태도, 나의 입장, 나의 생각만이 옳다는 고집에서 벗어난다는 겁이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불교는 의심과 물음을 통해 결국은 삶을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편견이나 오만,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어리석게 살지 말고 두루 살피고 성찰하는 지혜를 갖고 살라는 것이지요. 회의주의나 불가지론과는 다른 것이지요.

프레시안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불교를 물음을 통해 깨달음과 지혜를 얻는 종교로 기억하기보다 솔직히 고리타분하거나 기복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불교에 대한 책도 너무 많고요. 한마디로 접근하기가 무척 힘듭니다.

명진 : 내적인 요인과 외적인 요인이 다 있지요. 사실 불교라는 것이 앞서 얘기했듯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것인데 뭔가 어렵고 신비한 것인 것처럼 왜곡된 점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인간은 왜 생로병사라는 고통 속에서 헤매는가라는 물음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 불교의 전부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런 물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불교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독교는 한 권으로 엮인 구약, 신약을 보면 되지만 불교에는 팔만대장경에서 보듯 너무 가르침이 많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그동안 불교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대화하고 쉽게 대중에게 알리려고 애는 써왔지만 아직 미진한 점이 많습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불안 등에 대한 해법보다는 기복적인 측면이 많은데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가르칠 수 있도록 체제를 개편해야되겠지요.

"미군정 때 한국사회 기독교화 시스템 구축돼"

프레시안 :1700년 동안 우리 역사와 함께 숨쉬어온 불교가 대중에게 멀어진 데는 '역사적인 평가절하'가 있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프레시안(김봉규)
명진 :
우리 문화재의 70~80퍼센트가 불교 문화재입니다. 그리고 1700년 우리 겨레와 함께 희노애락을 함께 해온 게 불교입니다. 숭유억불의 조선 시대에도 불교가 이처럼 쇠락하지 않았는데 해방 이후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의도적 홀대를 받았습니다. 오늘의 한국 사회는 일제시대와 미군정이라는 서구적 시스템의 기반 위에서 만들어진 사회입니다. 미군정 당시 미국은 공격적인 선교를 통해 한국 사회를 기독교화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통해 온갖 물자 지원을 합니다. 고아원, 병원, 복지 시설 설립 등을 통해 개신교는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고 선진 문물로 인식되기 시작한 반면, 불교는 고리타분하고 미신적인 것으로 매도됐습니다.

일례로 '부처님 오신 날'은 1975년에야 겨우 법정 공휴일로 지정 공포됐습니다. 그것도 각종 행정소송과 항의를 통해서 이뤄졌습니다. 크리스마스가 1945년 미군정에 의해 국가 공휴일로 지정된 반면에 말입니다.

프레시안 : 하지만 미국이 한국을 물적인 부분에서 상당 부분 도와줬다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명진 : 미국이 전후 우리나라에 많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미국과 서구의 문물을 동경하며, 우리 자신의 문화를 평가절하하는 일종의 문화적 열등감 같은 것이 생겨난 것이 문제입니다. 예컨대 절에 간다고 하면 사람들은 할머니가 쌀 한 되 들고 자식들 복이나 빌러 가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간다고 하면 세련된 하얀 옷을 입고 가족과 찬송가를 부르러 간다고 인식합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그런 이미지를 주입받고 거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교가 기독교에 비해 재정구조가 취약해 포교가 어려운 점도 홀대받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십일조가 있지 않습니까? 신자들에게 그것은 핵심적인 책무로 강조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초파일에 한 번 절을 찾아와도 신자입니다. 절에 돈 내는 것만이 불공이 아니라 지나가는 배고픈 강아지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도 불공이라고 합니다. 철학적으로는 위대하지만 이러한 시스템으로 인해 재정이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절집에서는 우스갯소리 같지만 부처님은 마케팅에는 실패한 분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의 길은 우리 마음에 있다"

프레시안 :외적이고 물량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는 기독교에 비해 불교는 정신성을 강조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기독교의 본산인 서양에서는 근래 기독교는 쇠퇴하고 인류를 구할 대안으로 불교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불교가 기독교를 좇아가려고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명진 : 옳은 지적입니다. 기독교에서도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간다고 하지요. 아주 불교적인 표현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욕심이 없고 번뇌가 없는 사람, 마음이 쉬어 텅 빈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에게 무슨 집착이 있겠습니까? 집착도 구함도 없는 이에게 무슨 괴로움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천국에 가지 않아도 이미 그 삶이 천국인 것입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 경쟁하고 그것이 지금의 사회입니다. 결국 무한 경쟁의 삶인데 그럴수록 인간이 더 피폐해지고 있지요.

물질적으로 앞선 서구에서 마음의 문제, 정신의 문제를 더 본질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관심이 불교로 향하고 있음을 주목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위대한 가르침인 불교가 있는데 그동안 너무 서구의 것을 좇고 외향적 발전만을 쫓았던 겁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있고 우리들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바로 그 점을 우리들에게 일러주셨기에 인류의 스승이고 등불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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