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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메시아 출현! "구린 랩 듣던 너희를 치유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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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메시아 출현! "구린 랩 듣던 너희를 치유하리니"

[김봉현의 블랙비트] 윤미래를 잇는 리미의 출사표

한국 힙합에 여성 래퍼가 없다고들 이야기한다. 산술적 의미와 상징적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전자가 여성 래퍼의 수가 남성 래퍼의 수보다 턱없이 적은 현실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그 적은 수의 여성 래퍼 중에서도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춘 이가 드문 현실을 나타낸다.

한국의 여성 래퍼 중 마니아에게도 인정받는 거의 유일한 인물은 윤미래다. 그룹 업타운(Uptown)의 멤버였고 티(T) 혹은 타샤(Tasha)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현재 타이거JK(TigerJK)의 아내인 그 사람.

여성 래퍼의 실력을 가늠하는 좋은 기준은 '여성'이라는 꼬리표를 떼고도 실력을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다. 윤미래가 바로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리고 그 명단에, 이제 또 하나의 이름을 추가해야 한다. 리미(Rimi). 이제 23살인 그녀는 2008년 믹스테이프를 내며 데뷔했고 약 1년 반 동안 굵직한 힙합 앨범들에 이름을 올리더니 얼마 전 첫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

편을 가르거나 억지 비교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이 신예가 윤미래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 뛰어나다. 래퍼로서 리미의 미덕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실력의 측면. 리미는 랩을 '할 줄' 안다. 단순히 지껄이기만 하면 다 랩이 되는 것은 아니다. 랩의 기본이 되는 라임의 방식, 배치, 구조와 플로우의 형성과 흐름을 이해하고 있어야 제대로 된 랩을 할 수 있다. '잘하는' 래퍼들의 랩이 늘 그렇듯, 리미의 랩은 '뭘 좀 알고 랩한다'는 느낌을 직관적으로 선사한다. 리미의 가사와 랩은 아무렇게나 적힌 낙서장이 아니라 잘 짜인 그물망이다. 페이크(fake)가 아님이 증명되면 자리 잡는 것은 신뢰다.

다음으로 태도의 측면. 리미는 수동적 여성상과는 거리가 먼 여성 래퍼다. 리미는 스스로 더럽길 자처한다. 자신을 'bitch'(당연히 여성을 비하하는 속어다)라 칭하고, 거친 말과 때로는 욕설까지 서슴지 않는다. 성에 대해서도 당당히 이야기한다. 릴 킴(Lil Kim), 폭시 브라운(Foxy Brown), 트리나(Trina) 등에 의해 본토에서는 이미 전통(?)으로 굳어진 이러한 여성 래퍼의 태도는 비록 그 과도함이 문제된 적은 있으나 그 자체는 분명 힙합음악이 지닌 본질적인 카타르시스를 훌륭하게 전달하는 도구다. 여성 래퍼는 스스로 예쁘장해야한다는 강박을 버릴 때 비로소 아름다워진다.

이렇듯 실력과 태도, 두 가지 모두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리미는 다분히 인상적이다. 태도 없는 실력은 매력이 떨어지고 실력 없는 태도는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힙합을 거쳐 간 여성 래퍼를 통틀어 가장 문제적(?) 인물이라고 보고 있다.

▲ 리미 [Rap Messiah]. ⓒHiphopplaya
그런 그녀의 첫 솔로 앨범 타이틀은 [Rap Messiah]다. 랩은 그 랩이고 메시아는 '기독교에서의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뜻이 맞다. '구린 랩을 듣다가 썩은 너희의 귀를 나의 랩으로 치료하고 구원하겠다'는 것이 그녀의 포부다. 힙합 특유의 잘난 척 중에서도 최고 수위다. 그러나 이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뮤지션으로서의 캐릭터 설정은 어디까지나 본인 자유다. 감당하면 된다. 실력으로 증명하면 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랩 메시아]를 두고 '자의식 과잉'이니 하는 비판은 힙합의 중요한 본질 중 하나를 간과하거나 '인간 아무개'와 '래퍼 리미의 캐릭터'를 동일시하는 바람에 발생한 오류다.

1번곡 <Rim is Back>부터 9번곡 <In Da Kitchen>까지 리미는 쉴 새 없이 몰아친다. 그녀는 여왕을 자처하고(<Queen>), 스스로를 교주로 칭하고 자신의 신격화를 주장하기도 하며(<림교>), 성 담론을 여성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입에 올린다(<In Da Kitchen>). 덕분에 우리는 그녀의 랩이 주는 청각적 즐거움과 그녀의 태도가 선사하는 카타르시스를 듣는 내내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앨범에 담긴 리미의 랩을 듣다 보면 '본능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물론 계산과 고민도 반영되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재능의 결과다. 센스를 타고나지 않으면 이런 랩은 할 수가 없다. 비트를 타는 재주라든지(<개이름>), 1분 30초간의 버스(verse)를 변화무쌍하게 운용하며 청자를 흡입하는 능력(<Everyday>) 따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Rap Messiah]는 확실히 강렬하다.

그러나 본작은 아쉬움 또한 내포한다. 먼저 앨범은 마치 두 가지 콘셉트의 물리적인 결합처럼 보인다. 앞서 말했듯 1번곡부터 9번곡까지 우리는 'rap bitch' 리미의 랩을 맛볼 수 있지만 그 후부터는 래퍼 리미가 아닌 인간 아무개가 지배한다. 공존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후반부 곡들의 매력이 떨어지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리미가 <끝내러가는 길>이나 <Tonight>, <얼굴이 못 생겨서 싫었던 거니?>같은 곡을 부르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사운드나 멜로디가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니고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며 가사 역시 특출하지 않은 이런 곡들은 리미 본인의 욕심은 채울 수 있을지 몰라도 앨범 완성도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같은 카테고리 안의 더 뛰어난 곡들은 다른 앨범에서 얼마든지 접할 수 있다(동시에 이 앨범 전반부처럼 뛰어난 랩을 다른 여성 래퍼의 앨범에서 듣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잘하는 것을 해야 한다. 굳이 잘하지 못하는데 하고 싶은 것도 하겠다면 그에 상응하는 평가를 감수해야 옳다.

전반적으로 곡들의 길이가 짧은 점도 장점보다는 단점으로 작용한다. 연이어지는 1~2분대 곡들은 '완성된 곡'이라기보다는 '파편적인 버스의 모음'이라는 생각을 들게 하고, 때로는 3~4분대라는 보편적 길이의 곡을 홀로 커버할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낳는다. 또한 이러한 짧은 러닝타임 때문에 나름의 서사를 담고 있는 스토리텔링 곡들은 이야기가 중간에서 끝나거나 충분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의미에서 <Understand>는 그나마 서사의 완결성을 논할 수 있는 곡이다.

표절 혹은 흉내내기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점도 마음에 걸린다. <Flashing Lights (Skit)>를 듣고 팻 조(Fat Joe)의 <Courtroom Intro>([Don Cartagena] 수록)가 떠오르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지만 '스킷'이 아니라 '정규곡'이 저마다 특정곡을 연상시킨다는 것은 문제다. <Rap Messiah>를 처음 듣자마자 바로 버스타 라임스(Busta Rhymes)의 <Touch It>이 떠오르는 것, <Queen>이 어쩔 수 없이 영 엘에이(Yung LA)의 <Ain't I>와 포개어지는 것 등이 말이다(물론 이 남부힙합 특유의 불길한 전자음이 <Ain't I> 것만은 아니겠지만).

창작자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겠으나 중요한 점은 이 앨범의 몇몇 수록곡이 직관적으로 해외의 특정곡을 연상시킨다는 것이고, 듣는 이의 의지와는 무관한 이러한 연상 작용이 앨범의 온전한 감상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이다. '참조에 의한 재창조'보다 '모작'에 가까운 결과물은 언제나 이렇게 못됐다.

결론적으로 [Rap Messiah]는 성과와 한계가 비교적 뚜렷한 작품이다. 한마디로 본작은 래퍼 리미의 재능을 증명하는 동시에 앨범 아티스트로서 리미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런 맥락에서 리미는 오버클래스(Overclass)의 같은 일원인 스테디 비(Steady B)에게서 좀 배울 필요가 있다. 스테디 비가 리미에 비해 랩 실력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그녀의 2009년 작 [Steady Lady]는 그 해 가장 과소평가된 한국힙합 앨범이었기 때문이다. '랩 잘하는' 리미에서 '음악 잘하는' 리미로 진화하길 바라본다.

▲감자와 듀엣 싱글 발표 당시 리미(왼쪽). ⓒJJ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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