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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피디 디스하던 버벌 진트, 같이 노는 이유는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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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피디 디스하던 버벌 진트, 같이 노는 이유는 뭐야?

[김봉현의 블랙비트] 실망스러운 조피디-버벌 진트 합작 [2 The Hard Way]

오랜만에 <노자>를 꺼내 들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의식(?)이라고 생각했다. 10년 전의 저렴한 미디 사운드가 귀를 파고들자 나는 버벌 진트(Verbal Jint)의 랩을 따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도 몰라/ 유치한 rhyme을 조물락/ 길지 않은 verse에도 flow는 호흡 곤란/ 조PD he's a wack 초보자…."

이 순간만큼은 내가 랩 게임의 지배자였다. 나는 점점 빠져들었다. 심취했다. 무아지경에 다다랐다. 그러자 시끄러웠는지 어머니가 방문을 열어보시고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고 다시 방문을 닫으셨다. 그 날은 어버이 날이었다.

<노자>는 2000년에 발표된 곡이다. 조피디(조PD)를 디스(diss: 랩으로 남을 공격하는 일)하는 버벌 진트의 랩이 들어 있다. <노자>가 세상에 나왔을 때를 나는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한다. 당시 버벌 진트와 함께 나우누리 흑인음악 창작 동호회 SNP(Show and Prove의 약자)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나는 운영진을 지냈지만 아쉽게도 창작을 하지는 않았다).

<노자>는 통쾌했다. 가짜에 대한 응징이었다. 동시에 선구적이기도 했다. 한국말 라임의 혁명적인 방법론을 담고 있었다. 실제로 오늘날 당연한 듯 보편화되어 있는 한국 래퍼들의 라임 방식은 거의 통째로 버벌 진트(와 당시 SNP 멤버들인 데프콘(Defconn), 피-타입(P-Type) 등등)에게 빚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아직까지 한국힙합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2000년에 버벌 진트가 제시했던 라임 방법론이다.

▲조PD vs 버벌 진트 [2 The Hard Way]. ⓒ로엔엔터테인먼트
그로부터 10년이 지났고 버벌 진트와 조피디가 합작 앨범을 발표했다. 당연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물론 '앙숙'이니 뭐니 하면서 마치 지난 10년 내내 싸운 것처럼 이야기하는 보도 자료나 언론 기사는 과장이 맞다. 심지어 당시 조피디 본인은 직접 반격한 일이 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관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사연이 있을까.

'욕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같이 앨범 만드냐'는 식의 비판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생각은 변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벌써 10년 전이다. 10년이면 시쳇말로 강산도 변할 세월이다. 월드컵 4강이나 노무현 당선은 예상조차 못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본질은 이유다. '생각이 변하게 된 이유'. 이유가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내가 버벌 진트의 속마음을 알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인터뷰를 시도해보았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단서는 앨범 홍보 인터뷰 동영상에 나온 버벌 진트의 말뿐이다. "그때와는 음악에 대한 생각이나 음악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이 달라졌다. 시류나 대세에 영합해 바뀐 것이 아니라 진화라고 생각한다"고 했던 그의 발언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론에 불과하다. "조피디 형의 <친구여>를 들고 랩 음악이 이런 식으로 즐거움을 줄 수 있구나 하고 느꼈다"는 또 다른 그의 말 역시 판단의 근거로 삼기에는 무언가 불충분하다. 결국 나는 고민 끝에 앨범의 음악을 통해 해답을 찾기로 했다. 음악외적 동기가 결합의 본질이 아니라면, 즉 음악적 동기가 결합의 주된 원인이라면, 반드시 그 성과가 음악을 통해 나타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결과물은 그리 특출하지 않다. 물론 앨범의 모든 것 중 특별히 나쁜 것은 없다. 다만 모든 것이 적당해 문제가 될 뿐이다. 먼저 비트를 보자. <Map Music>은 변화무쌍한 전개와 정교한 소리 배열이 공들인 흔적을 보이지만 넵튠스(Neptunes)와 팀버랜드(Timbaland)를 위시한 여러 공인된 사운드 메이커의 소리를 종합해놓은 것처럼 느껴져 개성과 재미가 덜하다. 노력이 빛을 바래는 순간이다. <Super Hero> 역시 나쁘지 않은 만듦새지만 제이-지(Jay-Z)의 <Ignorant Shit>을 즐겼던 입장에서는 무언가 아류처럼 다가와 즐기기가 쉽지 않다. 힙합보다는 댄스-팝에 가까운 <Man Up>은 딱히 할 말이 없으므로 생략. 마지막 곡 <종의 기원>은 공간감이 돋보이지만 이 역시 익숙한 스타일이다.

랩으로 가자. 조피디의 랩은 예전에 비해 기본기를 가다듬었다는 인상을 주지만 특유의 투박함과 거슬리는 영어 발음은 여전하다. 개성으로 인정하기에는 감상에 지장을 준다. 버벌 진트는 변함없이 본인의 클래스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강렬함이든 뭉클함이든 이 앨범에 담긴 랩보다 더 인상적인 장면을 이미 지난 세월 동안 여럿 만들어놓았다는 것이 문제다. 즉 버벌 진트는 이 앨범에서 과거의 자신과 싸워 이기지 못한다. 블록버스터 멤버들의 랩은 평가 보류. 모든 참여진이 대체적인 랩 스타일을 사전에 합의한 듯 보이는 <종의 기원>만을 가지고는 정확한 평가가 어렵기 때문이다.

구구절절 늘어놨지만 사실 중요한 사안은 따로 있다. 바로 이 앨범이 '유기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버벌 진트와 조피디는 '화학 반응'을 일으키지 못한다. 모스 뎁(Mos Def)과 탈립 콸리(Talib Kweli)처럼 서로 타이트하게 랩을 주고받는다거나 둘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장면이 이 앨범에는 없다. 음악 스타일로 보나 참여 지분으로 보나 이 앨범은 버벌 진트와 조피디의 공동 소유가 아니라 조피디가 실질적인 주인이다. 주인 조피디가 버벌 진트를 손님으로 맞이한 모양새다. 냉정히 말해 이 앨범에 담긴 버벌 진트의 모든 랩을 삭제하고 다른 래퍼의 것으로 대체해도 별 문제가 없다.

특히 <친구여>로 촉발된 조피디 특유 스타일의 연장인 <Man Up>같은 곡은 더욱 그렇다. 즉 이 앨범에서 버벌 진트는 일종의 참여도 높은 카메오 래퍼 같은 존재로 규정된다. 래퀀(Raekwon)의 솔로 앨범에 고스트페이스 킬라(Ghostface Killah)가 아무리 많이 참여했어도 앨범의 주인은 래퀀인 것과 비슷한 이치다(둘의 음악 색이 비슷하다는 점이 버벌 진트-조피디와 다른 점이지만).

당사자들은 이 정도의 결과물에 만족할지 모르나 바라보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더욱이 조피디를 '조롱 대상'에서 '작업 파트너'로 받아들인 버벌 진트에 초점을 맞추면 의문은 여전하다. 이 의문들을 음악으로 멋지게 제압해주길 바랐지만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궁금하다. <노자>를 부를 때보다 진화한 버벌 진트의 음악관은 무엇일까? 라이밍 방식 혹은 랩 자체보다 음악 전체를 폭넓게 바라보게 되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그 음악관에 조피디의 어떤 점이 부합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버벌 진트는 작년 12월에 <리드머(www.rhythmer.net)>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솔자 보이(Soulja Boy)가 미국에서 대세였잖아요. 근데 솔직히 말하자면, 랩을 못 들어줄 것 같은 때가 많아요. 그런데 그 친구가 어떻게든 마케팅에서 성공했잖아요. 자기 노력을 성공이란 결과로 이끌어 냈단 말이죠. 보는 사람들마다 관점이 다르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존중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음악에 있어서 누군가의 스타일이 싫을 수는 있어도 팬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인정하고 존중하거든요. 옛날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어요. 옛날의 제 모습을 생각한다면, 이른바 스타일이 구릴 때, '쟤는 굶어 죽어야 해.'라고 까지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죠."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여전히 모르겠다. '음악에 있어서 누군가의 스타일이 싫을 수는 있어도 팬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음악외적인 부분 아닌가. 싫은 스타일을 가진 사람과 같이 작업할 리는 없으니 말이다.

에잇, 모르겠다. 포기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앨범은 버벌 진트의 이름을 내건 작품 중 가장 별로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만들 거였으면 굳이 합작할 필요가 있었을까? 부디 다음에는 지금껏 그래왔듯 '보여주고 증명하길'(Show and Prove) 기대한다.

*필자의 블로그에서 더 많은 음악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http://kbhma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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