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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이젠 말할 수 있다…형들이 돌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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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이젠 말할 수 있다…형들이 돌아왔어"

[김봉현의 블랙비트] 6년 만의 신보로 돌아온 사이프레스 힐

형들이 돌아왔다. 형 is back. 물론 따지고 보면 매년 돌아오는 형들이 한둘은 아니지만 귀추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 또 한 무리의 형들이 다시 돌아와 막 우리 앞에 섰다. 형들의 존함은 바로 사이프레스 힐(Cypress Hill).

그런데 잠깐. 다른 이야기를 조금 하자. 아마 사이프레스 힐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한국인 대다수는 이런 단어들을 함께 떠올리지 않을까? 서태지, 컴백홈, H.O.T., 전사의후예, 유영진….

사이프레스 힐의 몇 곡을 본 따 비트는 물론이요 언어가 엄연히 다름에도 발음까지 똑같이 흉내 내어 라임을 맞추는 눈물겨운 노력을 보여주었던 <전사의후예>는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문제는 서태지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서태지 편.

▲사이프레스 힐의 신보 [Rise Up]. ⓒ워너뮤직
<Come Back Home>을 표절이라고 주장하고픈 것이 아니다. 당연히 표절은 아니다. 그러나 비트뿐 아니라 랩까지 사이프레스 힐의 아바타와 다를 바 없는 곡을 발표해 놓고, '영향은 받았으나 표절이 아니니까 괜찮다'는 태도를 취했던 그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이미 십수 년 전의 일이니 이런저런 환경의 제약과 의식의 미성숙을 근거로 정상 참작해야 하는 걸까? 서태지는 천재 뮤지션이자 음악 영웅인가, 아니면 시기를 잘 타고난 감각 있는 유행 전도사인가.

무엇보다 서태지의 실수는 사이프레스 힐의 메인 래퍼 비-리얼(B-Real)의 코맹맹이 랩까지 그대로 흉내 냈다는 점에 있다. 비트는 넓은 마음으로 양보해 '사이프레스 힐만의 것을 따라했다'기보다는 '갱스타 힙합의 문법을 따른 것'이라고 치자. 그러나 비-리얼의 랩 스타일은 '갱스타 힙합의 것'이 아니라 '사이프레스 힐 고유의 것'이다. 따라서 <Come Back Home>은 '갱스타 힙합 스타일을 국내에 전도한 곡'이라는 평가보다는 '갱스타 힙합을 추구하는 사이프레스 힐의 음악을 그럴 듯하게 재현한 아류작'이라는 평가가 더 어울린다. 보기에 따라 같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굉장한 차이다.

자, 이제 그만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왜 새 앨범을 내서 괜히 이런 얘길 다시 하게 만드나. 내 잘못 아니다. 그리고 실은 힙합음악에 특별히 관심 없는 사람에게도 사이프레스 힐이 이렇게나 친숙한 팀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미 형들은 우리 마음 속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온 우리의 오랜 벗인 셈이다.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사이프레스 힐의 음악은 대체로 이렇게 규정 가능하다. 마리화나 향 가득한 음습하고 둔탁한 비트, 살벌하고 불량한 가사, 그리고 간간히 드러나는 록 및 라틴 친화 성향. 여기에다 앞서 말한 비-리얼의 코맹맹이 랩이 가세하면 더욱 좋다.

[Rise Up]은 6년 만의 신작이다. 커리어 사상 가장 긴 공백이다. 물론 팀의 프로듀서 디제이 먹스(DJ Muggs)가 꾸준히 프로젝트 앨범을 냈고, 비-리얼 역시 데뷔 근 20년 만인 작년에 첫 솔로 앨범을 발표한 바 있지만 사이프레스 힐의 이름으로는 6년 만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뒤통수를 후려칠만한 파격 같은 건 없다. 디제이 먹스의 저조한 참여(2곡)에 따른 미묘한 변화가 있지만 큰 틀로 보면 하던 것을 계속 하는 인상이다. 도덕 교과서 25페이지에 나오는 공자의 정명(正名) 사상을 설명할 때 좋은 예로 삼을 만하다. 다만 전체적으로 보다 규모가 커지고, 세련되고, 힘이 붙은 인상이다. 즉 스타일은 대체로 고수하되 힘 있고 풍성한 사운드를 담았다. 긍정적이다.

대입해보면 쉽다. 그간의 록 친화 성향은 <Rise Up>, <Shut 'Em Down> 등이 이어받았다. 그리고 여기서 빠뜨릴 수 없는 이름이 바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의 기타리스트 톰 모렐로(Tom Morello)다. 사실상 톰 모렐로의 기타에 사이프레스 힐이 얹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곡들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지만 동시에 충분히 강렬한 랩-록이다.

한편 <Pass The Dutch>와 <Take My Pain>은 일명 '마리화나 트랙'의 전통을 이어간다. 90년대 초반의 길거리와 지하실에서 탄생한 사이프레스 힐의 마리화나 표 음악은 2010년에 이르러 디제이 먹스와 디제이 카릴(DJ Khalil)의 공동 작업에 의해 이렇듯 멋들어진 소리로 다시 태어났다. 또한 가득한 에너지로 앨범의 문을 여는 <It Ain't Nothin'>, 팝-친화 프로듀서로 각인되어 있는 짐 존신(Jim Jonsin)의 또 다른 면모가 담긴 <Get It Anyway>, 린킨 파크(Linkin Park)의 마이크 시노다(Mike Shinoda)가 딱 그다운 곡을 선사한 <Carry Me Away>도 불합격보다는 합격에 가까운 곡들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앨범에는 '가장 보통의 순간' 역시 존재한다. 일단 <Armada Latina>는 라디오 에어플레이를 노리는 명백한 의도가 보이는 곡일뿐더러 그래서인지 앨범의 가장 끝에 부록처럼 수록되어 있으므로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문제는 중후반부에 배치되어 있는 <Bang Bang>, <K.U.S.H.>, <Get 'Em Up>, <I Unlimited>같은 곡들이다. 공교롭게도 하나같이(!) 비-리얼이 주도적으로 프로듀싱한 이 곡들은 조잡하거나 너무 뻔한 사운드로 앨범의 완성도를 아래로 끌어내린다(여담이지만 외국 포럼에도 'B-Real's beats suck!'같은 의견이 있는 걸 보니 역시 귀는 다들 비슷한가 보다). 힙합계의 방망이 깎는 노인으로 칭할만한 장인 프로듀서 피트 록(Pete Rock)의 비트(<Light It Up>)가 기대 이하인 점도 마음에 걸린다.

고로, 이 앨범은 결국 '같기도 행 특급 열차'를 타고 만다. 이건 명작도 아니고 졸작도 아니여.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혀. 그러나 만약 이분법의 폭력을 동원해야 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형들 편에 서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형들의 건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앨범은 과거의 영광을 애써 되새기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형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다 꿇어!'할 만큼은 아니더라도 '와, 멋있네. 이 형들 아직 안 죽었구나'라고 말할 만큼은 충분히 된다는 이야기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노장은 죽지 않는다. 다만 더 노련해질 뿐이다.

▲ ⓒ워너뮤직

*필자의 블로그에서 더 많은 음악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http://kbhman.tistory.com)

*아래 뮤직비디오는 사이프레스 힐의 싱글 <Rise Up>의 비디오클립입니다. 본 영상의 저작권은 워너뮤직에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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