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다"는 저 유명한 헤겔의 명제가 함축하듯이 이념은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 이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현실의 변화는 이념의 교체를 요구하며, 한 이념의 의미와 성격도 바꾸어 놓는다. 실제로 서구 근대 사회의 역사는 현실의 변화에 의해서 이념의 우선순위와 의미가 변화되어온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서구 근대 사회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현실에 대한 이성 비판의 과정으로서 비판적 이성의 역사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비판적 이성이 비판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비판의 준거를 마련해야 하는데, 이념은 바로 비판의 준거 역할을 한다. 따라서 비판 이성은 이념을 전제하고, 달리 말하면 유토피아를 전제한다.
이념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신의 시대에 일어난 사건인 프랑스 혁명 속에서 근대 비판 이성의 총체적인 모습을 발견한 칸트의 판단은 적절했다. 왜냐하면 프랑스 혁명이 제시했던 세 이념, 즉 자유, 평등, 형제애가 바로 지금까지 근대를 이끌어 온 이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근대 서구 사회의 역사는 바로 이 세 이념이 순차적으로 실현되어온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현실의 변화에 따라 이 세 이념의 의미가 달라지면서 순차적으로 비판의 준거 역할을 해오고 있는 과정인 것이다.
자본주의 형성 과정이었던 17, 18세기에는 봉건제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과제였기 때문에 자유가 비판적 이성의 준거로서 현실적 이념의 역할을 하였다. 자유는 소극적으로는 중세 봉건제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였고, 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의 기초인 처분권으로서의 사적 소유권을 정당화하는 이념 역할을 하였다. 때문에 이 시기 자유주의는 반봉건 사상으로서 진보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확립된 19세기 이후의 현실은 전혀 달랐다. 자본주의 확립 이후 생산은 급격히 증대했지만 분배 문제가 모순으로 등장했고, 노동자들은 형식적인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강제에 얽매어 착취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는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 등장하고, 따라서 사회주의는 근대 비판적 이성의 두 번째 단계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바로 평등이란 이념이 비판의 준거가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 거의 한 세기 동안 끈질기게 지속된 사회주의의 흐름은 많은 현실적 역작용에도 불구하고, 평등을 실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사회주의의 도전 때문에 자본주의 스스로 복지 국가 모델을 창출하여, 사회주의의 주장을 나름대로 체제 내화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늘날 서구 사회는 평등의 제도화가 상당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결국 사회주의의 쇠퇴에는 이러한 전체적인 진보로 인해 평등이란 이념의 현실적 효용성이 상대적으로 약해진 상황도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세계화로 인해 전 지구적 문제가 이제 우리의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시장과 민주주의의 실패로 인한 전 지구적 양극화의 갈등, 그리고 생태적 위기, 핵의 위기, 에너지 위기, 식량의 위기, 물의 위기 등으로 지구 위의 모든 생명을 파괴할 절멸의 가능성은 이제 분명한 우리의 현실이다. 한 국가 내부의 평등이라는 이념은 세계적 차원에서 확대되어야 할 상황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평등이라는 이념을 뛰어넘어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이념이 요구되고 있다. 이런 요구에 대해 자크 아탈리의 <합리적인 미치광이>(자크 아탈리 지음, 이세욱 옮김, 중앙M&B 펴냄)는 형제애를 새로운 이념으로 제안하고 있는 책이다.
형제애란 무엇인가?
▲ <합리적인 미치광이>(자크 아탈리 지음, 이세욱 옮김, 중앙M&B 펴냄). ⓒ프레시안 |
"형제애를 가장 넓은 의미로 정의하면, 과거에 살았거나 지금 살고 있거나 미래에 살게 될 모든 존재의 행복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타자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이타주의, 그것이 바로 형제애이다."
고전적인 개념에 따르면 형제애란 "모든 사람이 내재적인 경쟁심을 잊고 서로 돕고 사랑하며 서로의 차이와 욕구를 용인하고 남의 성공에 기뻐하며 남의 행복을 자기의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조건들의 총체"로 규정할 수 있다고 한다. 결국 형제애는 "남의 행복에서 기쁨을 찾고자 하는" 타자 지향적 삶의 태도이며,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의 무한 경쟁이 추구하는 제로섬(zero-sum) 게임과는 달리 서로가 상대의 성공을 필요로 하는 넌제로섬(non-zero-sum) 게임이나 윈윈(win-win) 게임을 추구하는 이념이다. 이러한 형제애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는 "주는 사람이 행복할 뿐만 아니라 받는 사람이 모욕을 느끼지 않는 방식"을 가능하게 하여 진정한 파트너십으로 뭉쳐진 사회가 될 수 있다.
아탈리는 세계화로 인한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형제애의 유토피아'를 제안한다. 이는 남을 행복하게 하는 데서 자기의 행복을 찾는 유토피아이며, 자유의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시장이나 평등의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민주주의와는 달리 형제애라는 도덕적인 의무를 기초로 하는 유토피아이다. 세계화 시대에 존재하는 시장과 민주주의의 대립, 즉 자유와 평등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형제애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탈리가 책의 후반부에서 제시하고 있는 형제애를 실현하기 위한 10가지 조치를 보면 이 유토피아는 결국 복지국가적 성격이 강화된 국가와 NGO의 자발적 활동을 통해 제도화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환대와 형제애
아탈리가 제시하는 형제애는 근대 이후 세계 시민의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된 환대에 대한 철학적 논의의 맥락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환대를 먼저 강조한 철학자는 칸트이다.
칸트의 환대는 이방인을 자기 땅에 맞아들이는 자의 의무이자, 누구든 낯선 땅에서 적대적으로 대우받지 않을 권리로서 근본적으로는 내가 손님이 될 때를 염두에 둔 대칭적 상호성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이 환대는 충돌과 갈등을 자기 관점에서 조정하고자 하는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근본적으로는 타자와 공동체 내부의 차별성을 전제하면서 단지 배척되지 않을 소극적 권리만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칸트의 환대는 자유주의의 닫혀 있음과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 최근 우리 사회가 이주 노동자들에게 보여주는 환대는 아직 이런 수준이라 판단된다.
이에 반해 레비나스와 데리다는 다른 의미의 환대를 주장한다. 이들이 제시하는 환대는 상호적인 권리로서의 환대가 아닌 무조건적이고 유보 없는 환대이다. 그것은 상호적이고 쌍무적인 방식의 어떠한 제약도 부과되지 않는 비대칭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나와 공통된 것만 받아들이고 타자를 '자기화'하려는 동일화의 지배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고, 이 점에서 환대는 자유주의의 극복이 가능한 원리로 주장된다. 자기 자리를 내어주는 '타자에 대한 비대칭적 수용'으로서의 환대야말로 자본주의적 교환 관계와 자유주의적 이념의 문제를 해결해 줄, 아니 최소한 비판해줄 새로운 유토피아의 원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나 데리다가 말하는 환대에 대하여 또 다시 한 가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그 물음은 바로 상호적인 권리로서의 환대, 쌍무적인 방식의 환대가 아닌, 무조건적이고 '비대칭적인' 환대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환대해야 하는가? 왜 나와 타자, 즉 환대하는 자와 환대받는 자 사이에 더 이상 확고한 구별과 교환의 대칭관계가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물론 '자기 중심적 동일화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는 답이 제시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화되는 타자의 관점, 약자의 관점에서 제시할 수 있는 답이지, 오히려 이러한 동일화를 추구하고 있는 강자에게 이런 답이 먹혀 들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약자에 대한 환대를 거부하는 강자에게 무엇을 근거로 환대를 요구하고 강제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현실적인 질문에 대해 레비나스나 데리다의 환대 개념은 무력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강자에게 환대를 요구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형제애'이다. 강자와 약자 모두 형제와 같은 사이라는 것을 강자가 약자를 도와야 할 이유로 제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강대국에 대해서 약소국에 대한 원조를 무엇을 근거로 요구할 수 있는가? 그리고 강대국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환경 협약을 파기할 때, 무엇을 근거로 환경 협약의 준수를 요구할 수 있는가? 바로 형제애라는 이념이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 그래서 형제애는 환대의 근거이고 기반이다. 우리는 서로 형제라는 전제를 받아들일 때에만 비대칭적인 환대가 의무로 부가될 수 있는 것이다.
형제애가 권리의 문제를 초월한다는 사실의 좋은 예를 상속 문제에서 볼 수 있다. 권리의 측면에서는 형제들이 동일한 상속의 권리를 갖고 있다. 이것은 평등과 정의의 관점에서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형은 아주 잘 살고, 동생이 극히 사정이 어려운 경우, 형은 권리를 넘어서 적게 상속받거나, 상속을 포기하고, 어려운 동생에게 양보할 수 있다. 혹은 형이 동일한 상속을 원할 경우, 집안의 어른들이 동생의 어려운 처지를 내세워 형에게 양보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이때 무엇을 근거로 권리의 포기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형제애는 강력한 근거로 작용한다.
형제애의 현실적 근거
그러나 아탈리가 제안하는 형제애에 대해 이는 너무 소박한 도덕적 태도로서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제도화되기는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형제애를 환대의 근거로 제시한다고 해도 이는 논리적인 결론이라서 '왜 형제애가 필요한가? 왜 우리는 서로 형제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떤 근거에서 우리는 형제애를 요구할 수 있는가?' 하는 현실적 문제가 다시금 제기될 수 있다.
아탈리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실제로 19세기와 20세기의 혁명가들은 대부분 형제애를 모호하고 순진한 개념으로 간주하여 외면하였다. 이들의 태도는 상당 정도 타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동안은 형제애가 추상적인 도덕적 권장 사항의 목록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형제애의 관점에 서지 않고는 생존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현실의 위기의식이 바로 형제애라는 이념의 현실적인 근거이며 형제애를 단순한 도덕적 덕목의 차원에서 끄집어내어 사회 제도 속에 구체화시켜야 할 필요성의 토대로 작용하고 있다. 형제애는 더 이상 눈만 감으면 외면할 수 있는 추상적인 당위 법칙이나 관념적인 도덕 규범이 아니라, 냉엄한 물질적 현실과 생태적 사실에 토대를 둔 현실적 이념으로 성격이 변화되었다.
무엇보다도 세계 시장화로 인해 전 지구적 문제가 전면에 등장한 현재의 상황이 형제애를 현실적 이념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왜 우리가 형제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현실에서 답이 제시된다. "함께 살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니까." 더군다나 하버마스가 지적하듯이 형제애를 구체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세계 시민사회의 실현이 정치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상당 수준 가능해졌다는 점도 형제애가 추상적인 규범에서 벗어나 현실적 이념이 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
따라서 이제 진보를 지향하는 비판적 이성은 형제애를 비판의 준거로 삼아 앞서 말한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전 지구적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NGO들이 세계적인 연대를 이루면서 생태 문제를 포함한 많은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은 바로 비판적 이성의 새로운 활동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아탈리의 '형제애 유토피아'는 새로운 이념을 모색하고자 하는 노력에 디딤돌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비판적으로 보면 세계화 시대에 아탈리의 형제애 유토피아가 중요한 의미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대안적 이념으로 승격되기 위해서는 많은 보완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정운영은 자크 아탈리에 대해 자본의 세계화라는 엄밀한 경제학적 현실 속에서 "형제애로 세상을 구하라는 말씀은 부흥회 설교이지 경제학의 처방이 아니다"고 비판하면서, '좌'는 가고 중도만 남는 그 중도 좌파의 일그러진 시대상에 씁쓸해하며 비아냥거린 적이 있다.
정운영의 지적은 타당하다. 왜냐하면 세계화의 현실은 '자본'의 세계화이기 때문에 여전히 불평등이라는 현실이 도처에 깔려있고, '평등'이라는 이념은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형제애가 새로운 이념으로 부각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전면화되기에는 한계가 있고, 어디까지나 보완적 성격을 가진다. 변화되지 않는 측면도 있지만, 변화하고 있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단지 문제의 새로운 양상에 대한 처방으로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아탈리의 의미이자 한계인 지점,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출발해야 할 것이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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