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끔찍한 참사가 일어난 지 355일이 지나서야 희생자 5명에 대한 범국민장이 치러졌다. 그게 지난 1월 9일 토요일이다. 망자들의 발길을 붙드는 듯 그날 하늘에선 하염없이 흰 눈이 너풀거렸다. 이제 시작이라며,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꾹꾹 누르며 마지막 인사를 올리는 유족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망자들을 먼 길로 떠나보냈다.
두 시부터 시작된 장례식의 모든 절차는 어둠이 깊이 내린 뒤에야 끝났다. 몇 명의 동료 작가와 함께 막걸리를 사들고 그 늦은 시간에 찾아간 곳은 홍대입구역 근처에 있는 두리반이다. 남일당 망루만 같은 막막한 현실이 또 거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은 선배 작가 유채림이 한국토지신탁의 강제 철거에 맞서 농성 중이다. 유난히 온후한 성정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가 유채림을 실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왔다. 그러니 살뜰하게 지내온 기억조차 가물가물한데 하필이면 이런 가슴 아픈 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신공항행 철도 공사로 흔들리는 좁은 길가에 두리반은 위태롭게 남아 있었다. 한국토지신탁의 용역들이 전기를 끊어놓아 이웃에서 끌어다 쓴다는 전기로 백열전구 두 개를 밝힌 실내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밤은 그렇게 눈이 많이 내렸었나보다.
ⓒ프레시안(최형락) |
봄기운이 꼬물꼬물 피어오르기 시작한 어느 날 다시 두리반을 찾았다. 그 사이 사람들의 손길로 많이 온화해졌다. 작은 글씨로 채워놓은 응원 쪽지가 벽 한쪽을 점점이 채워가고 있었다. 행사 안내 포스터도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농성장 두리반은 어느새 사람들이 찾아와 함께 마음을 나누는 공연장이 되고 영화 상영장이 돼 있었다. 춥고 혹독했던 추위와 싸워온 기나긴 시간이 언제였던가. 요일마다 각기 다른 행사를 치르느라 봄기운 같은 온기가 두리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봄볕이 짙은 어느 날 두리반을 다시 찾았다. 토요일 저녁이었는데, 인디밴드의 공연이 있었다. 여섯 밴드 공연 중 첫 번째로 나선 주자가 '이랑'이었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소개했다. 1년 동안 파트타임으로 일해 번 돈과 부모의 도움으로 홍대 앞에 조그만 옷가게를 낸 적 있다고 했다.
옷가게는 곧잘 됐으나 2년이 채 안 된 어느 날 두리반처럼 느닷없이 쫓겨난 경험이 있다고 했다. 단 한 푼의 돈도 건지지 못한 채 쫓겨났기에 그날의 울분이 여태도 남아 있다고 했다. 그녀는 두리반이 고맙다고 했다. 반드시 투기꾼 자본에 승리하여 자신처럼 못난 세입자들에게 희망의 불꽃이 돼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노래하는 내내 목소리에서 물기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두리반이 이길 때까지 함께하겠다는 인사를 끝으로 다음 주자인 '단편선'에게 자리를 넘겼다.
지난 해 크리스마스 때부터 시작된 두리반 농성은 그렇게 하루하루 다양한 연대 세력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다. 가공할 투기 자본의 폭압에 맞서 노래 공연과 영화 상영, 촛불 예배 등을 통해 소통의 통로를 넓히는 동안 그만큼 맞서 싸울 힘도 길러지고 있었다. 그것이 비록 유하고 작은 힘이지만 더할 수 없이 질긴 희망임을 믿는다.
바라기는 '작은 용산' 두리반이 참으로 비정한 투기꾼 세상에 일침을 놓아 비록 세입자일망정 함부로 내칠 수 없다는 선례가 되기를! 그리하여 다시 두리반을 펼쳐놓고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눌 수 있기까지 나 역시 힘을 보태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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