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참' 공익근무요원 A씨의 하루
서울 소재 구청에 근무 중인 공익근무요원 A씨의 출근 시간은 오전 9시. 하지만 그는 이른바 '꺾어지는 1년'이 지난 후론 정시에 출근해 본 적이 없다. 일찍 출근하면 오전 10시, 늦으면 오후에 출근한다. 출근 전산기록부에 서명은 후임이 한다.
출근해서도 그가 하는 일은 없다. 아니 하지 않는다. 그의 직함은 '지적행정보조'. 토지대장, 도시개발계획서 등을 발급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하지만 그가 창구에 앉는 일은 거의 없다. 후임이 그의 일을 알아서 다 해준다.
그가 출근해서 하는 일은 이른바 '판치기'다. 컴퓨터로 만화책 보기, 게임하기 등이다. 전날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창고에서 잠을 잔다. 그나마 자신의 '사수'인 공무원이 그에게 일을 시키면 마지못해 하는 시늉을 할 뿐이다.
퇴근 시간은 오후 6시. 하지만 지킨 적은 거의 없다. 오후 4시쯤 되면 공익근무요원 옷을 사복으로 갈아입고 유유히 구청을 나선다. 저녁에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여자 친구를 만난다.
가끔 구청 공무원에게 "어딜 갔느냐. 돌아와라"고 전화를 받지만 그냥 "내일 일찍 출근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무시한다. 아주 가끔 병무청에서 점검이 '뜰' 경우에만 하루 종일 긴장한다.
'신입' 공익근무요원 B씨의 하루
석 달 전 구청 지적과에 배정받은 B씨. 그의 하루는 정말 정신이 없다. 출근 시간은 오전 9시지만 7시 30분에 출근해야 한다. 출근해서는 사무실 공무원의 쓰레기통을 비우고, 민원실 바닥을 쓸고 대걸레로 닦는다. 꽃에 물도 줘야 한다.
그러다 보면 오전 9시. 아직까지 출근하지 않은 '고참'을 위해 출근 전산기록부에 대신 로그인을 해서 서명을 한다. 만약 이것을 하지 않을 경우 '고참'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얼마 전에는 깜빡 잊고 서명을 하지 않아 1시간 넘게 창고에서 호되게 혼나야 했다.
오전 9시가 넘으면 민원인이 구청을 방문한다. 하지만 창구에 일하는 사람이 부족해 항상 민원인에게 부대낀다. 그런 와중에 구토지대장 등 옛날 대장을 발급해 달라는 손님이라도 있으면 정말 죽고 싶다. 일일이 복사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손님이 원하는 대장을 찾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B씨의 일을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일을 B씨에게 맡긴 고참 A씨는 서고에서 컴퓨터 게임만 할 뿐이다. 어디 투서라도 넣고 싶지만 그랬다간 공익들 사이에서 '왕따'가 되거나 부서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기 때문에 꾹 참는다.
무엇보다 B씨를 화나게 하는 건 바쁜 줄 뻔히 알면서도 개인 심부름을 시키는 공무원들이다. 정작 놀고 있는 '고참'에게는 별 지시도 내리지 않는 공무원은 B씨에게는 잡다한 일을 시킨다.
얼마 전에는 공무원 중 한 명이 자신에게 그림책을 던져주며 10부를 복사하라고 했다. 자신의 여섯 살 난 아들이 그림을 그리는데 그림책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 "네가 해라"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공무원이 '고참'에게 "신입 교육 똑바로 시켜라" 이런 한 마디라도 하면 당장 집합이다.
B씨는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는 '고참'을 보며 욕지거리를 꾹 참았다. '나도 조금만 참으면 '꺽어지는 1년'이다.'
공익근무요원 문제, 대책은?
공익근무요원. 사회 공익에 필요한 분야를 지원하고자 1996년 신설된 대체 복무 제도다. 하지만 이런 공익근무요원 제도가 제몫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공익근무요원 중 상당수가 앞에서 살펴본 A, B씨의 경험에 공감할 것이다.
실제로 매달 끊이지 않고 공익근무요원과 관련한 사건,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장애인용 교통카드를 훔쳐 다른 사람에게 나눠준 서울 모 구청 동주민센터 공익근무요원 C(22) 씨가 경찰에 불구속 입건됐다. C씨는 지난 2008년부터 지난 2월까지 미등록 장애인용 교통카드 41매를 훔쳐 담당자 아이디, 비밀번호로 접속해 교통카드를 부정 발급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남 마산중부경찰서는 지난 3월 시립화장장에서 근무하며 화장 비용을 횡령한 혐의로 공익근무요원 D(27) 씨를 구속했다. D씨는 지난해 7월부터 마산시립화장장에 예약 접수 및 화장 비용을 받는 보조 업무로 근무하던 중 화장장 사용료를 받고도 전산 입력을 누락하는 방법으로 68차례에 걸쳐 2040만 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다.
특히 D씨는 지난 2007년 10월 절도 혐의로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 받는 등 전과 2범 전력이 있어 병무청의 '관심 자원 관리 프로그램'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현행법상 1년 6개월 이상의 실형을 받은 전과자는 면제 대상이지만 그 미만일 경우 공익근무요원 소집 대상으로 분류된다.
물론 병무청은 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 놓았다. 병무청은 2008년부터 공익근무요원만을 담당하는 복무지도관 67명을 충원, 공익근무요원 상담과 실태 조사 등을 진행하고 있다. 4주간 군사 교육 후 바로 공공 기관에 배치됐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는 5일 동안 소양 교육도 진행하고 있다. 또 복무 부실이 발생할 경우, 위탁 교육 등을 통해 공익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병무청 공보관 관계자는 "이런 노력으로 복무 위반으로 고발된 현황이 점차 줄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2007년 1.7퍼센트, 2008년 1퍼센트, 2009년 0.9퍼센트로 고발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A, B씨의 사례처럼 이런 통계가 말하지 않는 부분이 여전히 크다.
"관리 시스템 없는 게 가장 큰 문제"
실제로 현장에서는 고발 조치에 들어가지 않은 복무 불량 등의 사례가 상당하다. 공공 기관에서 공익근무요원의 방만한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가장 큰 문제는 공익근무요원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 부재다. 행정안전자치부 소속인 공익근무요원은 군법이 아닌 형법으로 규제를 받는다. 공익근무요원이 공공 기관에 배치되면 해당 기관이 복무 실태 점검은 물론 소재 파악, 복무 독촉 등을 관리해야 한다.
예를 들면, 통상 7일 이내의 복무 이탈을 할 경우 해당 공익근무요원은 빠진 날짜의 5배수를 연장 근무해야 한다. 공익근무요원이 8일 이상 복무 이탈을 할 경우, 형사 고발을 통해 3년 이하의 징역을 받는다.
또 다른 사람의 근무를 방해하거나 근무 태만일 경우, 다른 공익근무요원에게 가혹 행위를 할 때는 경고 조치가 가해진다. 1회 경고마다 복무가 5일 연장된다. 이것이 4회 이상 누적될 경우 고발 조치당해 1년 이하의 징역을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경고, 고발 조치가 이뤄지는 사례는 거의 드물다. 서울 모 구청에서 공익근무요원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는 공무원 이동만(가명) 씨는 "20대 초·중반인 젊은이들의 미래를 망칠수도 있기 때문에 경고나 형사 고발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토로했다.
이 씨는 "대부분이 처음 1년까지는 잘하지만 그 후에는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다고 해서 1년 넘게 얼굴을 맞대며 생활해온 사람을 형사 고발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는 "공익근무요원 나름의 위계 질서가 있어서 간섭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서울 모 구청에서 구청 전체 공익근무요원을 담당하는 박민서(가명) 씨도 "솔직히 고발 조치 말고는 공익근무요원들을 통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는 것도 문제"라며 "제대로 된 관리, 감시 시스템도 없는 상태에서 무조건 공익근무요원을 관리하라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무늬만 바뀐 공익근무요원 제도, 문제 개선에는 의문
이런 공익근무요원 제도를 개선하고자 정부는 2008년부터 대체 복무 제도를 사회 복무 제도로 바꿨다. 2012년까지 사회 복무 제도로 대체 복무 제도를 대체하겠다는 것.
이 제도에 따라 앞으로 공익근무요원은 사회복무요원으로 명칭이 바뀐다. 담당 업무도 현재 공공 기관의 단순, 보조, 경비, 감시 업무 등에서 장애인, 노인 수발 등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바뀐다. 이미 지금도 상당수가 사회 서비스에 복무 중이다.
병무청 관계자는 "2월 말 기준으로 5만2000여 명의 공익근무요원 중 47퍼센트가 사회 서비스에 복무, 즉 사회복무요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며 "사회 서비스 복무를 더욱 확대시키려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렇게 제도만 바뀐다고 공익근무요원 제도를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점이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문제의 근본 원인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복지 시설에서 사회 서비스에 종사하는 이들의 관리 역시 또 다른 문제로 대두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한 공무원은 "대체 복무 제도가 갈수록 늘어나는 게 앞으로의 추세인 만큼, 대체 복무 인력의 관리에 대한 근본적인 체계 점검이 필요하다"며 "그렇지 않을 경우,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