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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도 우리처럼 된장찌개를 먹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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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도 우리처럼 된장찌개를 먹었을까?

[판다곰의 음식 여행] 된장찌개에 들어가 있는 것들은

음식의 습관은 어떤 면에서는 지독할 정도로 보수적이다. 어려서 맛있게 먹던 것을 늙어서도 새록새록 기억하고 즐겨찾기 마련이다. 그 어려서 먹던 것이란 또 아이의 부모가 즐겨 먹던 것이다. 그렇기에 음식 맛처럼 변하기 어려운 것도 없는 듯싶다. 이러한 보수성 때문에, 지금 우리가 먹는 음식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온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 보수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제사상일 것이다. 조상이 먹던 음식 맛을 바꾸기 어려워 제사상은 가장 보수적으로 차리며, 심지어는 그 재료조차 수입품 쓰기를 꺼린다. 전통을 중시하는 집에서 바나나나 오렌지를 제사상에 올리는 경우는 좀처럼 드물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사과를 올리더라도 이전 할아버지가 먹던 국광이나 홍옥은 살 수 없기에 요즘 나오는 신품종으로 대체해야 한다. 3대조 이상이면 아마도 능금을 올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된장찌개로 보는 입맛의 보수성과 혁신성

한편으로 생각하면 새로운 음식을 받아들이는 속도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요금 아이들이 좋아하는 치킨, 피자, 햄버거, 도넛은 불과 2, 30 년 전만 하더라도 먹어보기 어려운 음식이었다. 또 그 이전의 우유, 치즈, 버터 등의 유제품은 락토오스 분해 효소가 없는 성인들에게는 비릿하기만 하고 역겨운 음식이었다. 새로운 음식 재료도 슬그머니 등장해서 급속도로 퍼진다. 양상추, 파프리카, 셀러리, 키위 같은 서양 채소나 과일들은 이미 친숙해졌으며, 신세대들은 그 어떤 새로운 맛도 받아들일 태세가 갖춰진 듯하다.

그렇다면 과연 음식에는 보수성의 법칙이 우세한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입맛이 우월한 것인가? 60년대 나온 인스턴트 라면과 70년대의 새우깡이 당시의 보수적인 입맛을 넘어서서 득세한 것을 보면 새로운 입맛이 판정승인 것 같고, 아직도 변치 않는 쌀밥과 된장찌개, 김치를 보면 보수성이 우세한 듯하다. 하지만 거기에도 변수는 있다.

지금 우리가 흔히 먹는 된장찌개부터 생각해보도록 하자. 우리는 조상도 우리와 같은 것을 먹고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100년 전의 사람들, 아니 그보다 더 전의 사람들도 과연 그랬을까? 지금 우리 식탁에서 가장 보편적인 된장찌개의 모습이라면 조개, 우렁이, 멸치, 또는 고기로 맛을 낸 국물에 호박이나 파, 감자 등의 채소와 두부가 어우러진 모습을 누구나 상상할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런 종류의 된장찌개는 과연 언제부터 먹었을까?

18세기의 된장찌개도 이랬을까?

우선 찌개와 국의 차이부터 생각해보자. 아무래도 찌개는 국보다 진한 국물을 뜻한다. 된장국은 이전에는 흔히 토장국이라고 불렀는데 국을 한자로 표기할 때는 탕(湯)이라고 했다. 찌개에 해당하는 옛말은 '조치'로, 보통은 간을 새우젓으로 쓰는 맑은 국물을 뜻했던 말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 요즘의 전골 개념보다는 훨씬 맑은 국물이었던 듯싶다. 여러 재료를 쓰는 조치는 계절별로 나는 생선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조치를 끓이려면 생선이나 새우젓과 같이 맛을 내는 것들이 필요하고 과정도 복잡해서 서민적인 음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웬만큼 사는 양반 집에서나 해 먹은 음식의 한 가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된장을 묽게 풀어 넣은 조치도 틀림없이 있었겠지만, 그보다 훨씬 더 서민적인 음식이라면 강된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요즘도 강된장을 즐겨 먹기도 하거니와 가장 간편한 요리법이기에 더욱 그렇다. 보리나 좁쌀로 지은 밥이 주식인 서민 밥상에는 역시 간이 센 된장이 필요했을 것이다. 개화기에 외국인들이 남긴 글을 보면 한국 사람이 먹는 밥의 양에 놀라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주로 밥으로만 배를 채웠으니 양이 많을 수밖에 없다. 반찬은 정말 단순하기 짝이 없어서 김치나 장 한 가지를 놓고도 그 많은 밥을 비웠다. 물론 된장을 그냥 먹기도 했지만 강된장은 있는 양념이나 건더기를 넣고 되직하게 끓여내면 되기에 별다른 조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 국을 끓이는 것은 다시 철마다 나는 채소를 건지로 넣으면 되기에 아주 간단한 응용이다. 아마도 찌개도 여기서 크게 벗어난 요리법은 아닐 것이다. 건더기로 무엇을 넣을 것인지는 정해진 게 아니라 되는 대로 있는 대로 재료를 더해갔을 공산이 크다.

된장찌개는 분명히 반가에서 먹던 조치보다는 훨씬 서민적인 음식이었다. 조치보다 찌개가 더 서민적이라는 사실은, 반가의 규수들이 쓴 음식 책에 조치는 나오지만 찌개라는 명칭은 나오지 않음을 봐도 알 수 있다. 찌개의 어원에 관해 확실한 것은 없지만 대략 19세기에 서울을 중심으로 서민들의 밥상에 올린 뚝배기에 끓인 음식이 일반화되면서 나온 용어인 듯하다.

문헌상 된장찌개가 나온 자료는 많지 않다. 18세기 영조 때에 발행된 <증보산림경제>((유중림이 홍만선의 <산림경제>를 증보하여 낸 것으로, 농사와 양잠 등 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망라했다)에는 된장찌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아욱갱'의 요리법이 실렸는데, '아욱에 마른 새우를 넣고 장에 끓인다'고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갱'이란 '탕'과 대비되는 것이니 '탕'은 요즘의 '국'으로, '갱'은 찌개로 환치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기록을 보면 18세기의 된장찌개는 정말로 단순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프레시안(손문상)

된장찌개에는 어떤 재료들이

그러면 요즘 된장찌개에 들어가는 재료들의 내력을 점검해보기로 하자. 우선 주재료인 된장을 보면 우리나라는 거의 삼한시대부터 장을 먹었다. 된장이야 콩의 단백질을 발효한 음식이니 주재료는 콩과 소금이다. 콩은 요즘의 '대두'로, 고구려의 고지인 남만주가 원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재배된 것으로 확인된다.

소금은 한반도가 유명한 산지 가운데 하나였다. 삼한시대의 장은 요즘의 '간장'이나 짙다는 의미의 '된장'으로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짠맛의 기본 원료로 이용된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파도 오래된 재료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요즘 같은 대파가 아닌 쪽파가 쓰였으며 대파는 최근에 들어서 상용하게 된 것이다. 냉이나 아욱 같은 채소들도 꽤 오래전부터 상식하던 작물들이고 두부는 고려 말부터 사용하던 음식 재료다.

하지만 그 밖의 양파, 호박, 감자, 고추와 같은 재료들은 역사가 일천한 것들이다. 양파는 앞에 붙은 '양'자가 서양에서 전래된 것임을 의미하고 있으니 근대에 들어온 작물이다. 호박처럼 '호' 자가 들어간 것(또는 음이 변해 '후'가 된 것도 포함하여)은 대부분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북방에서의 전래품이라는 사실을 뜻하는 말이다. 호박이 전래된 것은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의 일로, 중국을 통해 전래되었으니 적어도 18, 19세기는 되어서야 들어온 것이다. 고추는 임진왜란 이후에 도입된 것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 초기에 '남만초'. '왜개자'와 같은 이름으로 부른 것을 보아 남쪽을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감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이라 꽤 일찍부터 재배한 것 같지만 실은 고구마보다도 거의 한 세기나 늦게 우리나라에 상륙한다. 고구마는 1763년 조엄이 일본에 통신사로 가던 중 대마도에서 종자를 부산으로 보낸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리하여 19세기 초에는 중부 지방까지 고구마가 재배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고구마도 흔한 것이 된 것은 일제 강점기 이후의 일이다.

하지만 감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조선시대 실학자인 이규경은 잡학 백과사전격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감자가 19세기 초에 청에서 관북 지방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또 이규경은 명천(名川)에 사는 김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북쪽에서 종자를 가지고 왔다는 설과, 청나라 사람이 인삼을 몰래 캐러 왔다가 인삼밭에 심어 놓았던 것이 남아 전파되었다는 설을 동시에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1862년에 김창한이 지은 <원저보(圓藷譜)>를 보면, 1832년 영국의 상선 로드 엠허스트 호가 태안반도에서 약 한 달 동안 머문 적이 있었는데, 이 배에 동승한 네덜란드 선교사가 '마령서(馬鈴薯, 말방울처럼 생긴 마와 같다는 이름이다.))'의 종자를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그 재배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책은 김창한이 그의 아버지가 감자 재배법을 습득하여 전파한 내력과 감자 재배법을 엮은 것으로 상당히 믿을 만한 것이다.

그러니 감자는 대체로 19세기 중반이 되어야 우리 식탁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것도 더 엄격히 말하자면 일제 강점기가 되어야 생산량이 급격히 늘기 시작하니 지금처럼 감자를 사용하게 된 것은 불과 반세기밖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안데스의 산물인 감자는 유럽으로 전해졌으나 땅속에서 난다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유럽에서는 식용 작물이 되는 데에 거의 20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렇기에 유럽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아주 늦은 시기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부정적인 이미지 없이 급속도로 전국에 보급된다.

이런 현상은, 서동요에서 보듯이 옛날부터 이와 유사한 마와 토란 등의 근채를 늘 먹어왔기에 땅속에서 나는 근채에 대해서 별다른 저항감은 없었던 듯하다. 감자는 일제 강점기에 그야말로 급속도로 번져가서 함경도나 강원도에서는 주식의 위치까지 올라갔다. 우리가 감자에 너무도 쉽게 적응하여, 음식의 상용 재료가 되었을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된장찌개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마른 멸치의 사회사

끝으로 된장찌개의 맛을 돋우는 것으로는 우렁이, 조개, 마른 멸치를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우렁이나 조개는 선사시대부터 애용하던 것이니 말할 나위가 없지만 멸치는 좀 다르다. 물론 멸치로 만든 젓갈이야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마른 멸치를 국물의 맛을 내는 데에 쓴 것은 실제 얼마 되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문헌을 보면 청어 말린 것과 마른 새우가 주로 국물 맛을 내는 데 쓴 것으로 나오지 마른 멸치로 국물을 냈다는 기록은 19세기 이전에 문헌에는 없다. 요즘처럼 멸치를 잡자마자 배에서 증기에 쪄서 말린 것은 대체로 20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바닷가에서 고기잡이하는 사람들에게는 멸치는 흔한 물고기였다. 정약전의 <현산어보>에도 '멸어'라는 명칭으로 나온다. 하지만 멸치는 죽으면 쉬이 상하고 작은 고기였기에 내륙까지 전해지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잡아서 바로 말린다 하더라도 워낙 작고 쉽게 상해 큰 물고기처럼 쉽사리 상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멸치는 죽으면 쉽게 상하기에 잡은 시기에 바로 배에서 쪄서 가공하지 않으면 국물 맛이 나빠진다.

더군다나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는 어업은 주로 어량이나 독살을 이용한 근해 어업이었다. 이를 이용하자면 자연 간만의 차이가 크고 갯벌이 발달한 서해안이 주요 어장이었던 셈이다. 어량이나 독살은 일정한 장소에다 발이나 장애물을 설치하여 물고기를 잡는 것이니 아주 작은 치어는 잡기 어렵다. 물론 멸치가 서해안에서도 잡히는 어종이기는 하지만 이를 말려 공급할 정도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말뚝을 세우고 대나무로 촘촘히 막은 죽방렴을 치는 지역에서는 멸치가 가득 잡힌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잡혀도 멸치는 물에서 건지면 바로 죽고 죽으면서 부패가 신속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요즘도 멸치를 회로 먹는 일은 바닷가 아니면 어림없는 일이다. 바닷가에 찌는 장치나 말리는 장치를 대규모로 설치하지 않고서는 이를 가공하기도 어렵다. 이것이 멸치가 상용되기 어렵게 한 요소였던 것이다.

어업사를 보면 19세기 초에 들어와서 멸치잡이가 이루어지는 듯하다. 물론 그물을 이용한 어업도 있었지만 그물도 손으로 건져 올리는 경우라면 그물 발이 성기게 마련이다. 이런 어업 상황에서는 멸치를 잡아서 상용화하지는 못했을 테니 요즘처럼 배 위나 연안에서 잡은 멸치를 쪄서 말려 상용화한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마도 어량이나 죽방렴에서 건진 멸치라면 소금을 뿌려 젓갈로 가공하기는 했을 것이다.

요즘도 멸치잡이는 대규모 선단에 의지한다. 보통은 일곱 척의 배가 선단을 이루어 조류를 따라 던지는 유자망으로 잡으며 어군 탐지기를 포함한 최첨단 장비를 갖추고 있다. 아무리 적은 멸치잡이 선단도 대개는 다섯 척의 배가 무리를 이룬다. 그 가운데에서 한 척은 보통 잡은 멸치를 바로 쪄서 가공하는 가공선이다. 멸치를 잡는 그물도 크레인을 이용해 건져 올릴 정도로 힘든 작업이다. 아마도 이렇게 첨단 장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멸치는 바다 속에 많이 있었겠지만 밥상 위에 올리기는 쉽지 않은 어종이었을 것이다.

ⓒ프레시안(손문상)

맛은 기나긴 사회적 과정을 따라 흐른다

입맛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재료가 나타날 때는 그 보수성의 틀 위에서 재빨리 새로운 재료를 수용한다. 된장이 보수성의 토대고 <증보산림경제>에서 보여준 아욱과 마른 새우는 재빨리 다른 새로운 재료로 대체되는데, 그것이 호박, 고추, 감자, 양파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멸치도 다르지 않다. 멸치는 따뜻한 물에 자라는 고기지만 찬물에서 나는 청어와 같은 어족에 속한다. 그러기에 청어 말린 것과 멸치는 비슷한 맛을 지니고 있다. 말린 청어로 맛을 내던 된장찌개 국물 맛을 멸치가 대신한 것을 보면 음식의 보수성과 혁신성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청어과인 멸치가 마른 청어와 비슷한 맛을 내고 바다에는 엄청난 멸치떼가 있었으니, 그것을 잡아 가공할 기술만 있으면 쉽사리 대체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장찌개 하나에도 들어가는 재료들을 추구하다 보면, 허투루 먹는 된장찌개 변천사는 꽤 복잡하다. 있는 재료를 대충 넣고 끓인 걸쭉한 강된장에서부터 시작해, 새로운 맛을 내는 재료들이 첨가되고 말린 멸치 국물까지 가는 과정은 예상외로 복잡하고 다단한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메주를 담근 기록은 우리나라의 최고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신라 때 왕비가 될 사람에게 보내는 예물에 곡식, 옷감과 함께 메주가 들어 있다. 메주가 있었으니 된장도 있었을 것이다. 된장의 기본적인 장맛은 변하지 않았겠지만 그 변천은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맛을 찾아가는 길고 긴 사회적 과정이었을 것이다.

많은 재료가 새로이 등장하고 새로운 실험들이 더해진 뒤에야 요즘 같은 된장찌개가 완성된 것이다. 된장찌개 하나에도 허투루 이루어진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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