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질없다. 그래서 우습다.
오바마측에서 재협상(또는 추가협상)을 공공연히 얘기하고 있는 판국에, 미국 자동차업계의 이익을 보장해야겠다고 다짐하는 판에 조기비준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게 그렇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는 체 하며 조기비준을 밀어붙이려는 한나라당 지도부의 태도가 부질없고, 이런 현실을 모른 체 하면 '선대책 후비준'이란 생뚱맞은 당론을 내놓는 민주당이 그렇다. 두 모습 모두 '쇼'에 가깝고 '말장난'에 가깝다.
조기비준은 더 이상 논란거리가 아니다. 급부상하고 있는 쟁점은, 유일한 쟁점은 재협상 여부다. 지난해 체결한 한미FTA 협정을 뒤로 물리고 재협상에 나설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재협상에 응한다면 자동차 부문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불리한 독소조항까지 함께 검토하는 것이어야 하고, 재협상에 응하지 않는다면 한미FTA를 없던 일로 되돌리는 것이어야 한다.
어떨까? 각 정당은 어떤 선택을 할까?
한나라당이 재협상을 거부하는 건 쉬 상상할 수 없다. 실물경제가 곤두박질치는 상황에서, 업계의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한미FTA를 무산시키는 건 웬만해선 어렵다. 재협상에 나서자니 이 또한 녹록치 않다. 오바마 측은 자동차만 언급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다른 조항은 내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익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거래'를 성사시킨다고 확신할 수 없다.
민주당의 사정도 그리 여유롭지 않다. 전면적 재협상을 주장하려면 내놔야 한다. 자동차 부문과 맞바꿀 조항을 추려야 한다. 이게 쉽지가 않다. 자칫하다간 자신들이 여당일 때 사인한 한미FTA 협정의 골간을 흔들 수 있다. 눈가림용으로 타협안을 내놓으면 민중 부문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렇다고 한미FTA 무산으로 몰아갈 수도 없다. 그러면 민주당 지도부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반대만 하는 야당'의 이미지가 고착될지 모른다.
난감한 게 하나 더 있다. 시기다.
이태식 주미대사가 전망했다. "내년 하반기나 돼야 FTA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러면 복잡해진다. 내년 하반기에나 미국에서 한미FTA 비준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하면, 이 때부터 재협상 문제가 급부상하면 2010년 지방선거를 관통할 가능성이 커진다. 한미FTA가 지방선거의 최대 이슈로 부상하게 되고 샛길로 빠져나갈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든다.
대선 때에는 한미FTA가 쟁점이 아니었다. 상대방인 미국의 정치상황이 불투명했기 때문에, 그래서 한미FTA 비준 문제가 눈앞의 현실이라고 누구도 생각지 않았기에 그냥 흘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니다. 지방선거에선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다. 이렇게 보니 칼자루는 오바마가, 칼날은 한국 정당이 잡고 있는 셈이다. 한국 정당의 명운이 오바마 행정부의 태도에 달려있는 셈이다.
결과는 그렇다 치자. 과정은 어떨까? 비준 울타리 밖으로 걸어나오는 과정은 어떨까? 한나라당보다 민주당이 더 복잡할 가능성이 크다.
한나라당은 '단절'을 선택하면 된다. 그간 한미FTA를 지지해온 전력이 좀 겸연쩍긴 하지만 상황 변화를 내세우며 입을 씻으면 된다. 참여정부와의 '단절'을 선언하면 된다. 하다가 안 되면 참여정부 탓, 민주당 탓으로 돌리면 된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탓' 타령을 하면 된다.
민주당은 난감하다. 민주당에게 재협상은 후퇴다. 지난해 사인한 협정보다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반대해야 한다. 그게 참여정부 시절 여당의 숙명이다. 민중 부문이 요구하는 것처럼 공세적이고 전면적인 재협상을 요구하고 나서는 방법이 있지만 이건 자기부정이다. 참여정부 시절 여당의 '성과'를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된다.
어렵다. 민주당이 전면적인 재협상을 주장하고 나서기는 쉽지 않다. 더불어 쥘 수가 없다. 한미FTA 문제를 앞장서 끌고 나가기가 쉽지 않다. 한미간의 기류를 살피면서 정부와 여당이 방안을 내놓으면 그에 맞춰 양념을 뿌리든 소금을 뿌리든 하는 보조적 역할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게 분란의 소지가 될 수 있다. 민주당 내에서 전면적 재협상을 주장하는 세력의 반발을 부를 수 있다. 한미FTA 협상을 주도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마저 재협상 필요성을 언급하지 않았는가. 이들이 목소리를 높일 건 자명하다.
물론 속단할 수는 없다. 한미FTA라는 정책사안 하나 때문에 당이 균열상태에 접어들 것이라고 내다보는 건 섣부르다. 정책사안보다 지역기반·당내 역학관계가 정당의 진동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경험칙에 입각해 봐도 속단은 금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있다. 한미FTA가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어차피 민주당은 꼬여있다.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설 수도 없다. 방법은 하나다. 콜럼버스가 달걀을 깨뜨려 세운 것처럼, 알렉산더가 엉킨 매듭을 끊은 것처럼 확실하고도 단호한 선택을 해야 한다.
이 계기가 바로 한미FTA다. 민주당이 멍에와도 같은 정체성 논란을 매듭지을 의미있는 매개다. 한미FTA에 대해 어떤 입장을 세우느냐에 따라 민주당의 좌표가 다시 설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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