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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공방'이 아니라 '진실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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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공방'이 아니라 '진실 게임'이다"

[기고] 조경란은 숨지 말고 전면에 나서라

1. 처음 표절 의혹이 불거졌을 때 나는 이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기를 바랐다. 논쟁이란 치열할수록 좋은 거니까. 논쟁이 자칫 감정싸움으로 번져 인신공격으로 치닫지만 않는다면야 그 치열함속에서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것이 더 많을 거라는 것이 나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것은 논쟁이 아니라 '진실게임'이라는 데에 생각이 다다랐고, 호기심과 함께 '누군가는 크게 다치겠구나' 하는 우려를 갖기 시작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조경란을 바라보는 나의 눈이 '의아함'이라면, 주이란을 바라보는 나의 눈은 '안타까움'이다. 그 '의아함'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조경란의 침묵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침묵이 삼켜버린 주이란의 울부짖음은 나에게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나는 조경란의 침묵을 이해할 수 없다. 표절은 한 작가의 문학적 인격의 파산은 물론 한 개인의 명예에도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이 찍힐 게 뻔한 사안인데, 어쩌자고 침묵으로 일관하는지 답답하면서도 궁금하기 짝이 없다. 혹여 조경란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싸움은 어차피 나에게 잘해야 본전일 수밖에 없다. 표절이라면 그야말로 난 끝장이고, 설사 표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로서는 얻는 게 하나도 없다. 이런 싸움에 내가 굳이 말려들 이유가 없다. 때문에 나는 이 가당찮은 싸움에 철저하게 침묵할 것이다.'

2. 나는 방현석의 글을 읽고 매우 불편하였다. (☞관련 기사 : '혀' 표절 공방이 유발시킨 오해에 대한 해명) 그 글은 내가 이전까지 알고 있던 방현석의 존재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아니, 뭐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누구보다 작금 문단의 생리와 문단 권력의 폐해를 잘 알고 있을 방현석이 앞날이 창창한 한 소설가 지망생에게 진심으로 애정어린 충고를 했다고도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뒤집어보면 방현석의 그런 충고는 비뚤어진 문단 체제를 거부하고 극복해야 할 예비 작가에게 체제 인정과 현실 순응을 미리 주입하는 것 같아서 못마땅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방현석만큼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바람이었으며 내가 알고 있는 방현석의 모습이었으니까. 나는 이 논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책꽂이에 묵혀있는 책 몇 권을 꺼내 다시금 읽을 기회를 가졌는데, <문학권력>(개마고원)이라는 책에 인용된, 방현석이 문학평론가 홍기돈과의 대담에 서 토로했다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오랫동안 눈길이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나서면 안 돼. 나서면 옳은 말만 하게 되잖아? 그리고 그 말에 책임이 따르고 말이야. 그러다 인생 꼬이는 거고…. 그때 했던 말을 지키려다 보니 삶이 이렇게 된 거지. 하여튼 나서면 안 돼. 말을 많이 해도 안 되고."

오해는 풀렸다. 더는 불편하지 않아도 괜찮겠다. 더 이상 못마땅해 할 필요도 없을 터.

3. 그리고 김곰치의 글을 읽었다. (☞관련 기사 : "이 엽기적인 '표절 의혹'에 왜 침묵 하는가")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역시 김곰치'라며 박수를 보탰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나는 조경란과 주이란의 <혀>를 읽지 않았다. 뭐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나 싶었다. 문단의 자존심과도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에 문단이 나서서 이 문제를 투명하고도 납득할 수 있게 매듭지을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단은 침묵했다. 이번에는 독자 한 분이 이 논쟁에 뛰어들었다. (☞관련 기사 : "비수가 '혀'에 꽂혔나? 독자 무시하지 말라")

그리고 김영현의 글을 읽었다. (☞관련 기사 : "문학이여, 나라도 먼저 침을 뱉어 주마") 신랄한 글이었다. 가슴 아픈 글이었다. 무엇보다 문단에 대한 솔직한 자기반성 없이는 쓸 수 없는 그런 글로 읽혔다. 김영현은 겉으로는 침을 뱉는다 했지만 속으로는 절망하고 울었으리라.

"(겉으로는 표절 시비이지만) 이것은 '표절 시비'가 아니다"라는 김영현의 진단에 동의한다. 표절 시비를 넘어 누가, 왜 침묵하는지를 웅변으로 보여주는 글이다. 문단 주류와 관련된 문제인데도, 문단 주류는 철저히 침묵하고, 문단의 아웃사이더나 비주류가 논쟁을 이어가고 있는 현실이 통탄스럽지만, 그럴수록 이러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 <혀>(주이란 지음, 글의꿈 펴냄). ⓒ프레시안

4. 주이란은 지금 힘들고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 앞으로 전개될 싸움은 훨씬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이런 가정을 해보자. 만일에 조경란과 주이란의 '진실 게임'에서 주이란이 승리한다면 어떻게 될까? 시쳇말로 소설가 조경란 혼자서 독박을 쓰고 이 모든 쪽팔림을 감 수하면 그 걸로 끝이 날 것인가? 천만이다. 책을 펴낸 출판사 '문학동네'의 위신과 조경란을 치켜세운 문학평론가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구겨질 것이고, 조경란에게 '동인문학상'을 준 조선일보사의 권위가 형편없이 망가질 것이 뻔하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닌가!

작가 지망생 한 사람이 제기한 '표절 의혹'으로 문단 권력의 한 축이 주저앉을 수도 있는 문제인 것이다. 이런 싸움이 어찌 힘들고 외롭지 않겠는가.

조경란과 문학동네는 이 논쟁에 아예 관심조차 없다는 태도, '내 알 바 아니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 같다. 침묵의 성찰에 들어간 것일까? 알 수 없는 노릇. 왜 그럴까?

조경란과 문학동네는 논쟁이건, 싸움이건, 진실 게임이건 자신들에게 불리할 것이 전혀 없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자신들이 공세적으로 나갈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본 것 같다. 저들의 그러한 낙관은 대체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조경란의 장편소설 <혀>가 표절이라면 그것이 표절임을 증명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주이란인가 조경란인가? 당연히 주이란에게 있는 것이다. 조경란이 나서서 표절이 아님을 애써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독자들의 '의아스럽다'는 눈초리만 잘 견뎌낼 수 있다면, 아쉬운 것은 주이란이지 결코 조경란이 아니라는 말이다. 끝내 법정으로 이 문제가 넘어간다한들 법원이 주이란의 손을 들어주기는 어려울 거라는 판단을 한 것은 아닐까?

5. 문단이 침묵하고, 언론까지 입을 봉한 마당에, 이 논쟁은 이제 독자들의 영역으로 넘어온 느낌이다. 나는 이 논쟁에 독자가 개입하게 된 것을 두고서 문단 쪽에서 이를 수치로 생각한다거나 비분강개하지 않기를 바란다. 작가가 작품의 생산자라면 독자는 최종 소비자이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생산자가 만든 제품의 품질을 따져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출판 시장에서 그 동안 소비자인 독자들의 목소리가 전혀 없었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면 이상한 노릇이 아니던가 말이다. 미루고 미루다가, 주이란과 조경란의 <혀>를 읽었다.

6. 주이란의 <혀>. 엽기적인 식탐을 다룬 첫 부분을 읽는 동안 속이 메슥거렸다. 거짓말하는 혀를 다룬 부분에서 역겨움이 다소 진정되었다. '피도필리아'(소아기호증)를 떠올리게 하는 혀의 세 번째 용도에서는 '변태'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머물렀다. 스스로 혀를 잘라내어 프라이팬에 던져 넣는 소설 끝부분에서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주이란의 <혀>를 그렇게 읽었다. '메슥거렸다'는 표현은 소설의 작품성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비위에 약한 내 속을 대변하는 말이다. 소설의 작품성에 대한 평가는 유보하겠다.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니깐.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동아일보> 기자가 2007년 신춘문예 단편소설 예심을 맡았던 심사위원 세 사람에게 주이란의 <혀>를 읽어보았는지 물어보면 되는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경란은 읽은 기억이 없다하니 다른 누군가가 읽었다면 분명히 기억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설령 누군가 보았다하더라도 그 많고 많은 작품들 중에서 이 작품을 특별히 기억할 만한 이유가 있는가? 있다! 보고서 형식을 띤 소설 구성에서부터, 엽기적이고 변태적인 소설의 재료가 너무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런 작품이 어디 한두 개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더라도 예심에서 읽어보았다면 분명 기억을 하고 있으리란 확신을 갖는다.

주이란의 <혀> 띠지에는 2006년 조경란이 심사한 작품이라고 적혀있다. 조경란은 그런 작품을 읽은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이 게 '진실 게임'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7. 조경란의 <혀>. 읽고 난 뒤의 느낌은 이렇다. 다음 세 가지만 아니라면 딱히 표절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한다면 다음 세 가지 때문에 표절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

첫째, 소설의 제목이 <혀>라는 것. 둘째, 소설의 뒤표지에 적힌 '사랑하는, 맛보는, 거짓말하는 혀!'라는 문구. 셋째, 소설의 결말에 혀를 잘라내어 요리하는 것.

조경란이 말했듯 <혀>는 일반명사이다. 조경란은 <혀>라는 제목이 '지나치게 강렬한 데'가 있어서 처음에 망설였다. '본인의 의지보다는 편집진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혀>는 '지나치게 강렬한 데'가 있는 제목이다. 소설의 내용과는 어울리는가? 나에게 조경란의 '그' 소설에 제목을 붙이라 했다면, <요리학 입문>이나 <미식에의 초대> 혹은 <요리의 탄생>쯤으로 붙였을 것 같다. 300쪽 소설 분량에서 줄기차게 다루고 있는 소재이니까. <혀>라고 제목을 붙일 만한 단서는 소설의 끝부분 40쪽 정도이다.

표절 의혹 논란을 떠나서, 나는 조경란이 이 소설의 앞부분을 과감하게 잘라내고, 마지막 40쪽을 단편으로 묶었다면 훨씬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어디까지나 나만의 평가일 뿐이다. 그 때의 제목은? <어느 잔혹한 요리사 이야기>쯤이 되지 않을까?

다음으로 소설의 뒤표지에 적힌 '사랑하는, 맛보는, 거짓말하는 혀!'라는 광고 문구(?)는 이 소설의 내용과 이렇다 할 상관이 없어 보인다. 우선 조경란의 <혀>에서 '거짓말하는 혀'는 보이지 않는다. 그 점은 강병선이 주이란에게 보낸 답변서에도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혀'는 어떠한가? 소설에 삽입된 몇 개의 컷이 있기는 하지만, 그 걸 두고 '사랑하는 혀'라고 광고 문구에 등장시키기에는 어쩐지 민망하다.

'맛보는 혀'는 어떤가? 조경란의 <혀>는 음식 재료의 특성이나 조리법(레시피)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음식을 맛보는 혀에 주목한 것 같지는 않다. 음식을 맛보는 순간의 혀의 움직임이나 반응, 맛에 대한 세세한 묘사나 혀끝에 감도는 뒷맛, 이런 것들이 없는 탓이다. 이상도 하다! 열심히 만들기만 하고 맛은 보질 않았나보다.

조경란은 "맛보고, 말하고, 사랑하는 인간의 욕망을 '혀'를 통해 그려낸 것이라는 표현은 광고 문안과 평론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는 말로 들린다. 조경란이 소설을 집필하기 전인 2007년 2월경에 이미 그 광고 문안은 완성된 것으로 보인 다. 소설보다 광고 문안이 먼저 완성이 된 셈이다. 시놉시스에 바탕을 둔 광고 문안인 셈이다.

끝으로 소설의 결말에 혀를 잘라내어 요리하는 것은 어떤가? 이 엽기적인 결말이야말로 두 개의 소설 <혀>의 표절 의혹 논란의 최대 쟁점이 아닐까? 두 소설 모두 이 엽기적인 결말이 클라이맥스며 오르가슴이다. 그만큼 강렬하면서도 흡인력이 강한 결말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럴 수도! 그러나 이 기발하고도 엽기적인 발상을 그냥 우연으로 돌려세우기에는 뭔가 꺼림칙스러운 구석이 있다. 적잖은 사람들의 궁금증이기도 하다.
▲ <혀>(조경란 지음, 문학동네 펴냄). ⓒ프레시안

8. 조경란의 <혀>에 대한 작품성 평가는 접고 싶으나, 나 역시 이 한 마디는 하여야겠다. 다른 필자들이 이미 지적한 '참고 도서'에 대한 것이다. 이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 참 많은 책을 읽었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터이지만, 나는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남의 글이나 말을 몰래 따와서 쓰면 '표절'이지만, 출처를 밝히고 공개적으로 따와서 쓰면 '인용'이 된다. 나는 조경란이 소설 <혀>를 집필하는 동안 19권의 참고 도서를 말 그대로 참고하면서, 수많은 따옴표 달기와 출처를 밝히기 위한 주(註)달기가 귀찮아서 책 말미에 참고 도서를 한꺼번에 붙여놓은 것은 아닌지 어림짐작을 했다.

그것이 무에 문제냐고? 어디까지가 인용이고, 어디까지가 작가의 취재나 체험이나 혹은 상상에 의한 것인지 당최 구분이 가지 않아서 하는 소리다. 조경란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어 얘기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조경란의 목소리는 정작 들리지 않고, 주변의 짜증스런 소음만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말이다.

내친 김에 김화영의 해설에 대해서도 짤막하게 한 마디. 이걸 촌평이라고 하던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란한 언어의 유희, 혹은 알쏭달쏭 말들의 성찬'

9. 이 논쟁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논쟁이 아닌 '진실 게임'으로 바뀌면 조경란(문학동네)과 주이란의 문제로 한정된다. 그만큼 제3자가 개입할 여지가 좁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오직 당사자만이 진실을 알고 있고, 그 걸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진실 게임'을 지켜보 는 제3자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들을 바탕으로 다만 예단하고 추정할 뿐이다.

이게 바로 조경란이 나서야 하는 이유이다. 잘해야 본전일 수밖에 없는 게임이건, 아쉬울 게 하나 없는 싸움이건 간에 이제는 조경란이 논란의 중심에 공개적으로 나서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 침묵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침묵은 의혹만을 확대 재생산할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조경란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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