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비유를 연장해서 본다면 조선의 국권 상실을 어린아이가 부모를 잃는 것과 같은 상황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주의는 근대화의 핵심적 요소였다. 어느 곳에서나 국가는 전통시대와 비할 수 없는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사회의 구석구석에 개입하면서 근대화 추진의 주체가 되었다. 독립국은 물론이고, 식민지에서도 식민국가가 그 역할을 맡았다.
식민지 사회에 대한 식민국가의 역할은 고아원 같은 것이라 할까. 고아원 운영자가 원생을 대하는 태도는 여러 가지다. 제대로 먹이지 않으면서 강제노역을 시키고 외부 원조를 착복하는 운영자도 있다. 독실한 신앙심을 가지고 양심적으로 운영하며 원생들에게 같은 신앙심을 심어주고자 하는 운영자도 있다. 교육의 의미를 넓고 깊게 이해하면서 원생들의 사회 적응 준비를 최대한 도와주려 애쓰는 운영자도 있다.
일본 지배는 어떤 성격의 고아원이었던가? 세 세대 이상이 지난 지금 따지고 들기에 너무 새삼스러운 질문이다. 중년에 접어든 사람이 자기 유소년기 성장 환경의 성격을 따지고 있다면, 성장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가 아니면 정신과 치료를 받는 환자일 것이다.
그럴까? 우리 사회에 정신과 치료를 필요로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일까? 유소년기의 트라우마에서 유래하는, 청소년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방치해 둔 문제가 있어서, 성년이 되어 사회에서 한 몫을 맡고 있는 지금까지도 내면의 불안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뛰어넘어야 할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가해자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자"
정신과 의사의 입장에서 이 환자를 관찰해 보자. 정상적 가정 아닌 고아원에서 자라나고, 준비도 없이 사회에 나서자마자 깡패조직에 휩쓸린 사람. 패싸움에 앞장서다가 죽을 고비도 넘겼지만, 그 후에 뒤늦은 독학을 열심히 해서 칼잡이 대신 점포 경영으로 역할을 바꾼 결과 이제 합법적 사업을 꾸려나가는 자영업자가 되어 있는 사람.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 범죄나 마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데 비하면 큰 성공이다. 환경에 비해 품성도 좋고 노력도 많이 한 덕분이다. 그런데 사업도 생활도 꽤 안정된 지금까지 그의 마음속에는 불안한 그 무엇이 남아있다. 세상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극단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 경향은 고아원 원장과 깡패 두목이 자기 인생에 어떤 작용을 했는가 하는 인식의 혼란에서 번져 나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둘 다 밉다. 그런 자들에게 얽매여 지내던 시절이 치욕스럽기만 하고, 그들에게 매달리지 않고 살아가게 된 것이 다행스럽기만 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들이 하던 짓은 모두 거꾸로만 하고 싶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힘이 부럽다. "내가 이만한 성공이라도 거둔 것은 그들의 성공을 보며 분발하고 그들의 강한 면을 배운 덕분 아니겠는가.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괴롭히고 이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약자의 입장에서 강자를 질시하는 나약한 자세로는 나 자신 강자가 될 길이 없다. 이만큼 강해진 이제 나도 강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나 자신을 봐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들이 고마운 스승이고, 그들이 하던 짓을 그대로 따라 하고 싶다.
강자의 눈도 아니고 약자의 눈도 아닌 대범한 눈으로 볼 때 원장도 두목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의 곡절을 통해 그 위치에 서게 된 그들, 약자에게 군림하면서도 각자 내면의 고민을 가지고 있던 그들을 천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닌 인간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내 눈길도 안정을 얻을 것이다.
독자들이 눈치를 채셨을까? 그렇다. 나는 양비론을 펴려는 것이다. 정의감에 의지하는 수탈론-반미론에도, 실용을 내세우는 근대화론-친미론에도 새의 두 날개를 갖추지 못한 편향성이 있다. 양쪽 다 '상황'을 내세워 그 편향성을 정당화하려 하지만, 판단을 갈라놓는 어지러운 상황일랑 좀 접어놓고 우리의 존재를 직시해 보자.
"우리의 정의는 활인의 칼인가, 살인의 칼인가?"
앞서의 글에서("뉴라이트의 '식민지 근대화'란 무엇인가?") 이런 말을 했다. "수탈론은 매우 넓은 범위에서 표출되어 왔고, 또 피해망상적인 정서의 뒷받침도 받아왔기 때문에 그 담론 중에는 더러 불합리하고 편향적인 내용도 섞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수탈론을 지지해 온 연구와 논설 중에는 지적 나태를 보여주는 것이 많다. 민족의 피해를 따지는 데 다소 과장하는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의로운 오류'이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있다는, 무비판적 분위기가 언론계만이 아니라 학계에까지 만연해 있었다.
인간이란 것이 원래 오류를 저지르는 존재라고 한다. 따라서 오류는 도움을 줄 대상이지, 처단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정의로운 오류'는 용서해서 안 된다. 정의란 주관적 가치관에 근거를 둔 것인데, 이것으로 객관적 사실을 재단한다는 것은 대단히 질 나쁜 폭력이다. 파시즘의 길을 여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의로운 오류'는 정의 자체를 망가뜨린다. 오류를 품은 정의는 활인의 칼이 아닌 살인의 칼이다. 살인의 칼이 당장은 불의한 자들을 두려움에 몰아넣을지 몰라도, 정의의 의미에 조그만 흠이라도 드러나는 순간 진정한 날카로움을 잃고 자신을 공격할 새로운 정의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해방 전후산의 재인식> 머리말에서 박지향의 이런 말은 너무나 지당한 것이다.
"민족 지상주의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 횡행하고 있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논의와 관련된 여러 양태에서 잘 드러난다. 민족 지상주의는 민족이 다른 모든 가치들을 압도하고 지고의 가치로 부상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 민족끼리'라는 기상천외한 이념을 국민 앞에 내세우면서 그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짓누르고 있다. 민족에 앞서 인권과 자유가 먼저라는 외침은 민족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될 뿐이다."
<재인식> 끝에 붙은 편집위원 대담에도 새로운 담론 방향을 모색하는 진취적 학자들이 민족 지상주의의 칼날 앞에 좌절을 느낀 사례들이 줄지어 나온다. 이것이 <재인식> 편찬의 일차적 명분이며, 논문 게재를 응낙한 국내외의 진지한 연구자들 중에는 이 좌절감에 공감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민족 지상주의'가 불러온 반발이다.
"이념에 구애받지 않을 때 시각은 명쾌해진다"
<재인식>에 실린 카터 에커트의 논문 '식민지 말기 조선의 총력전-공업화-사회 변화'에도 같은 문제의식이 보인다. "시대의 복합성을 단순히 민족의 희생과 민족주의적 투쟁이라는 역사 서술상의 패러다임으로 재단하려는 것은 조선인들 자신의 역량과 독창성뿐만 아니라 역사라는 학문 자체를 폄하하는 부당한 일"(<재인식 1>, 621쪽)이라는 그의 지적은 한국 사회의 민족주의 편향성이 학계까지 뒤덮고 있음을 가리킨 것이다.
에커트의 연구는 한국의 근대화를 위한 물적-인적 조건이 식민지시대를 통해 어떻게 확충되었는지를 밝힌 것이다. 관련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이 시대를 직접 연구하지 않는 사람에게 식민지시대 한국의 실제 모습을 썩 명쾌하게 보여주는 좋은 논문이다. 민족주의 이념에 구애받지 않고 현실조건을 있는 그대로 보는 관점 덕분에 이만큼 명쾌한 시각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박지향이 머리말에서 "제4부는 식민지기와 해방 후 역사를 직접 연결시키는 인간군, 이를테면 박정희와 같은 인물들이 성장한 사실에서 식민지 유산을 찾아낸다."(같은 책, 17쪽)고 한 것은 에커트 논문에 대한 언급으로 보인다. 가치 판단이 억제되어 있는 이 언급은 이 논문에 대한 적절한 논평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이야기>에서 이영훈의 논평은 좀 다르다.
"전쟁은 한반도를 제국의 공업화된 기지로 변형시키면서 조선의 경제구조를 극적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그 과정에서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사회경제적 변화, 곧 근대화가 유발되었다. 그에 따라 조선인으로서 노동자와 기술자와 기업가와 관료의 수가 늘어나고 그 질이 향상되었다. 1960년대 이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린 한국의 급속한 근대화혁명을 주도한 박정희를 위시한 장교 그룹도 바로 그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이상이 에커트 교수의 논문입니다." (<대한민국 이야기>, 180쪽)
이 설명은 한국의 근대화가 식민지시대의 기반 확보로부터 연속된 측면을 강조하며 '박정희를 위시한 장교 그룹'이 그 연속성의 축 역할을 했다는 인상을 준다. 이영훈은 <재인식> 편집위원 대담에서도 이 논문을 언급하며 식민지시대와 대한민국기 근대화의 연속성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인다.(<재인식 2>, 648~649쪽) 이것은 에커트 논문의 취지와 거리가 있는 관점이다. 에커트는 두 시기 사이의 관련성을 제기했지, 연속성을 말한 것이 아니다.
"소외계층의 능동적 참여를 요구하는 전쟁 상황"
에커트의 논문은 일제 통치 하의 한국에서 근대화의 기반 조건이 형성되는 과정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근대화와 관련된 일본의 정책이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따라 일본의 이익을 위해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식민지시대의 근대화는 그 의미가 제한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초기 식민 정부는 이미 발전 도상에 있는 본국의 공업을 복제하거나 심지어 그것과 경쟁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한반도에 고도의 공업 구조를 설립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재인식 1>, 604~605쪽)든가, "이 글은 의도적으로 전시 조선에서 확인되는 조선인의 출세 기회들, 그러니까 조선에서의 식민지 지배를 이해하는 데 역사적으로 중요한데도 기존 논의에서 무시되어온 양상들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이끌어왔다. 그럼에도 이것이 복합적인 식민지 지배 역사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같은 책 652쪽)이라고 하는 대목 등이다.
논문 도입부에서 에커트는 '전쟁'이라는 상황 변수를 부각시킨다. 총력 동원을 필요로 하는 전쟁 상황은 종래 차별과 억압을 받아온 소외계층의 능동적 참여를 요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전쟁 협력을 조건으로 여러 피지배 민족에게 독립을 약속했다. 유럽의 여성 참정권도 이 전쟁을 계기로 실현되었다. 식민지 한국에 대해 일본이 '내선일체'를 목표로 한 차별 철폐에 나선 것도 대동아전쟁의 확전 과정 속에서였다. 한국의 발전을 바라지 않는 일본이 부득이하게 조선 개발에 나선 것을 에커트는 전쟁 상황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에커트가 보기에 일본이 조선 식민지 개발에 처음으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1914년 이후 제1차 세계대전에 따른 공산품 시장 확대와 1918년 일본의 '쌀 소동'으로 절실해진 안정된 쌀 공급의 필요 때문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경제 침체로 조선 개발 노력이 쇠퇴했다가 1930년대 만주 진출에 따라 조선 개발정책이 활기를 띠고, 1937년 대동아전쟁 발발로 개발의 물결이 최고조에 오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논문 말미에서 에커트는 "1930년대와 1940년대 일본 정책의 주목적은 조선인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리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국의 역량을 강화하고 전쟁 수행에 봉사하는 데 있었다.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이 시기에 자신들의 운명을 개선시킬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의 급박함이 가져온 아이러니이며, 일본의 관대함이 아니라 거꾸로 조선인의 능력과 결단력을 보여주는 증거"(같은 책, 652쪽)라고 했다. 일본이 식민 통치를 통해 한국에 만들어준 근대화의 기반 조건에는 구조적 문제가 없을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에커트는 식민지시대에 형성된 한국 근대화의 인적 자원, 특히 군인 집단을 설명하면서 대한민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제 통치의 권위주의 스타일이 재현된 사실과의 관련성을 제기했다.(같은 책, 653쪽) 중요한 의미를 담은 지적이다. 그런데 이것을 그 그룹 덕분에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다는 듯이 갖다 대는 것은 이영훈의 이야기지, 에커트의 이야기가 아니다.
"공정택의 책동으로 드러나고 있는 뉴라이트 야욕"
<재인식>에는 에커트의 논문 외에도 참고 가치 있는 진지한 연구 결과가 많이 실려 있다. 특히 지나친 민족주의 편향성을 뛰어넘어 더 넓은 지평을 바라보는 연구들에 접하게 된 것이 독자로서 반가운 일이다.
새로운 관점을 모색해 온 연구자들에게도 <재인식> 게재 요청은 반가웠을 것이다. 편집진이 공식적으로 제안한 편집 취지는 그야말로 '학문적 발전'을 위한 바람직한 시도로 보였을 것이다. 편집진의 (적어도) 일부가 이 책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을 가지고 수준 미달의 정치 선전물을 끼워 넣거나 심지어 게재 논문 내용을 왜곡해서 전파할 것을 논문 필자들이 미리 상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뉴라이트 측에서는 근현대사와 관련해 학계 주류를 '좌파'라 몰아붙이지만 내가 보기에 학계 주류는 '수구보수'다. 기존 민족주의 패러다임의 정상상태(normal state)를 유지하려는 성향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패러다임 전환을 심각하게 모색할 때가 되었다. 하루아침에 패러다임을 내다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기존 패러다임의 한계에 대한 진보적 학자들의 지적을 적어도 귀담아 들을 필요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뉴라이트가 '좌파'로 지목하는 이념성 강한 학자들을 '진보파'라 부르기도 하지만, 그들이 현실정치에서 어느 노선을 추구하건 학문적인 의미에서는 '보수파'다. 내가 여기서 '진보적' 학자라 함은 이념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을 모색하는 노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탈이념'이 진보성의 주된 지표이며, 따라서 민족주의도 뉴라이트도 모두 학문적으로는 보수로 보는 것이다.)
<재인식>은 주류 학계와 다른 이념으로 주도권을 넘겨받으려는 뉴라이트 논객(학자라기보다는)들의 쿠데타 시도다. 이 시도가 상당 범위 진보적 학자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주류 학계의 과도한 보수성에 대한 반작용에서 반사이익을 얻은 덕분이다. 이명박 정부 등장으로 그 의도가 일찍 분명히 드러나게 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뉴라이트 역사관으로 역사 교육을 대치하려는 야욕이 공정택의 책동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노가다 스타일로 볼 때, 빠른 시간 내에 역사 교육에 심각한 훼손이 빚어질 위험이 있다. 그뿐 아니라 뉴라이트 역사관에 의탁하는 극우적 대외정책과 경제정책이 국익을 해치는 일은 벌써 진행되고 있다.
<재인식> 출간 9개월 후 일군의 진보적 소장 학자들이 힘을 합쳐 <근대를 다시 읽는다> 2책을 엮어 낸 것은 장한 일이다. 포괄하는 연구 방향이 <재인식>과 많이 겹치지만, 학문의 발전만을 위해 만든 이 책은 한국학의 장래를 보여주는 책이다. 뉴라이트를 비판적으로 보는 주류 학자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일이 이 책을 사 보라는 것이다.
뉴라이트 역사관이 수준 미달이라고 콧방귀만 뀌면 무엇하나? 나쁜 놈들이라고 욕만 하면 무엇하나? 서학을 '사학'으로 몰아 탄압을 청하는 상소를 놓고 '정학'이 융성하면 사학이 발붙일 자리가 있겠느냐, 분란 일으킬 시간 아껴 학문에나 힘쓰라고 호통 치던 정조 임금의 기개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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