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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자유주의'의 정체는 무엇인가?"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 ④

얼마 전 <미래를 말하다>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폴 크루그먼 최신 화제작의 원제는 "자유주의자의 양심(The Conscience of a Liberal)"이다. 여기에서 양심이란 말은 근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펼쳐져 온 미국 경제 정책을 비판하는 뜻을 담은 것이다. 상위 1%의 이익을 위한 이 비양심적인 정책이 미국 중산층을 무너뜨려 미국을 불안하고 위험한 사회로 만들어왔다고 크루그먼은 지적한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자유주의'를 내세운다. 뉴라이트 비판자들이 흔히 '신자유주의'로 지목하는 것을 비껴가는 주장이다. 레이건 이래 미국이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정책이 널리 비판의 대상이 되어있는 상황이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사실 신자유주의자로 지목되는 사람 중에 신자유주의라는 간판을 스스로 내세우는 사람은 어느 나라에도 없다. 다들 자유주의를 표방한다. 그런데 이들이 일반 자유주의 진영과 구별되는 특색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기에 '신'자유주의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과연 한국 뉴라이트의 자유주의는 '신'자를 붙일 자격이 있을까, 없을까?

"신자유주의도 자유주의는 자유주의다"

한국 정치계에서 민정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언론계에서 조선-중앙-동아로 대표되어 온 보수 우파는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수구' 세력으로 지탄받는 일이 많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대표되는 진보 세력은 보수 우파의 이 부정적 이미지에서 반사 이익을 많이 얻어 왔다.

뉴라이트 대두의 배경은 수구 이미지를 벗어나려는 "합리적 보수" 표방 분위기에 있다. 보수 우파에게도 양심이 있을 수 있으며, 그 정책 노선도 단순한 이기주의에 그치지 않고 국가 사회를 위한 건전한 기준에 따라 세워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불가결한 요소의 하나가 철학, 즉 세계관이다. 건전하고 양심적 자세라는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사안을 고려함에도 일관된 기준에 따라 태도를 정한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어느 정권 때는 광우병 위험을 극도로 과장하다가 정권이 바뀌었다고 180도 뒤집는 식으로는 이런 믿음을 못 준다.

그래서 'xx주의'란 이름이 필요하다. 'xx'에 뭔가 좋은 말을 넣어야 한다. 안보? 잘 팔릴 것 같지 않다. 평등? 사람들이 너무 웃을 것 같다. 민주? 특색이 없다. 자본? 속 보인다. 민족? 그건 싫다. 결국 택할 말이 '자유'밖에 없다. 어차피 비판자들도 '신자유주의'로 지목하고 있으니 글자 하나만 빼면 될 일 아닌가?

실제로 뉴라이트 핵심 인물들의 주요 주장이 자유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문제는 자유주의가 포괄하는 범위가 너무 넓어서, 그 이름만으로는 현대 세계에서 하나의 정책 방향을 규정하는 의미가 약하다는 데 있다. 신자유주의 자체도 자유주의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자유주의의 성공"

그저 억압보다 자유를 좋아한다는 뜻으로도 '자유주의'라는 말이 쓰이지만, 이것은 하나의 관용어일 뿐이다. 자유주의자(liberal)란 말이 분명한 실체를 가리켜 처음 쓰인 것은 1801년, 영국의 토리당이 휘그당 진보파를 비난하는 말로 쓴 때였다. 이 비난의 말을 진보파가 자랑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실체 있는 자유주의가 나타났다.

자유주의는 19세기 유럽 사상계를 풍미했다. 왕권, 귀족, 교회가 대표하던 구질서에 맞서는 자유주의가 시대의 흐름을 탔다. 미국 독립(1776)과 프랑스 대혁명(1789)의 진보 정신도 자유주의란 이름으로 정리되었다.

19세기 유럽에서 자유주의가 정치적 강세를 띤 데는 경제 자유주의의 공로가 컸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1776)으로 체계화된 경제 자유주의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제한하려는 입장이다.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고, 따라서 그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간섭을 억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자유주의 원리를 경제정책에 적용시킨 것이다.

국가의 역할에 대한 <국부론>의 관점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국가의 적극적 경제 개입을 주창하는 중상주의(mercantilism)가 유행했다. 스미스는 국가의 중상주의 차원 개입을 반대했지, 국가의 기본 역할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근래 신자유주의자들은 스미스가 국가의 역할을 극히 부정적으로 보았다고 주장하며 자기네 자유방임 경제 정책의 근거처럼 내세우는 경향이 있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경제 자유주의의 성공은 산업혁명의 진행과 이에 따른 자본주의 발달에 힘입은 것이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달에 가장 앞선 영국에서 자유주의 흐름이 발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산업 경제 분야의 경쟁에서 터져 나온 자유경쟁시장의 힘이 정치면에까지 영향을 끼친 것이 19세기의 전반적 추세였다.

"경제 자유주의와 사회 자유주의"

19세기 말까지 자유주의는 모든 선진국의 지배 담론이 되었다. 중요한 정책 논의가 모두 자유주의 틀 안에서 이뤄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유주의의 내재적 모순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모순은 자유주의의 경제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 사이에 있었다. 먼저 나타난 경제 자유주의는 국가의 간섭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인권의 소극적 의미만을 주장했다. 19세기 후반에 형성된 사회 자유주의는 이와 달리, 사회의 기본인 개인이 교육, 의료, 취업 등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적극적 의미의 인권을 주장했다. 확장된 인권의 의미를 보장하는 제도로서 국가의 역할을 크게 보는 입장이었다.

초기 자유주의의 도전 상대는 전제국가와 교회 등 구체제였다. 19세기를 통해 구체제가 약화되고 자유주의 원리가 현실을 지배하게 되면서 그 타당성에 대한 의문이 일어났다. 인간이 정말로 자기 득실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인가? 자유방임(laissez-faire)이 구체제 대신 새로운 억압 체제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

19세기 말 유럽에서 산업 경제 부문은 국가와 맞서거나 국가를 이끌 만큼 자라나 있었다. 제국주의가 무한 경쟁의 양상으로 흐른 것도 산업 경제 부문의 압박 때문이었다. 개인의 자유도 정치적 억압보다 경제적 억압에 더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다. 이 변화를 중시하는 사회 자유주의가 당시로서 진보적 대안을 찾는 노력이었다면, 자유방임 원리를 고수하는 경제 자유주의는 현상유지를 꾀하는 보수적 입장이 되었다.
▲ 촛불 집회 중단을 촉구하는 보수단체의 맞불 집회. 하이데거와 포퍼 등 많은 철학자들이 자유의 불가분성을 이야기했다. 사회의 한 부문에 자유가 있고 다른 부문에 자유가 없는 상황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맞불 집회의 자유가 있었더라도 촛불 집회의 자유가 없었다면 집회의 자유는 없었던 것이다. ⓒ뉴시스

"자본주의의 모순을 완화한 착근 자유주의"

진보적 대안을 찾는 노력은 헨리 조지(<진보와 빈곤>), 소스타인 베블런(<유한계급론>) 등의 제도학파(institutionalism)로 하나의 새 흐름을 만들었지만 자유방임의 큰 흐름을 뒤집지 못했다. 20세기 들어 두 차례 세계 대전과 소련 공산 혁명으로 나타난 파국은 그 결과였다. 두 차례 대전 사이에 터진 대공황을 계기로 정부의 역할을 늘리는 변화가 미국의 뉴딜정책 등으로 나타났지만, 누적된 모순을 해소시키지 못한 채 제2차 세계 대전을 맞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사회주의 진영과 체제 경쟁에 돌입한 자본주의 진영은 자유주의 원리를 지키면서도 사회적 모순의 완화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복지국가 이념도 노동조합의 정치 세력화도 이 시기의 유화적 분위기 속에서 큰 발전을 이뤘다. 자본 계급의 독주로는 사회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불리하기 때문이었다. 이 단계 자유주의를 '착근 자유주의(embedded liberalism)'라 부른다.

착근 자유주의가 널리 성공을 거둔 이유는 전 세계 경제의 빠른 성장에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대공황-제2차 세계 대전의 혼란과 파괴를 넘긴 시점에서 그 동안 축적된 기술 발전의 활용이 넓혀짐에 따라 각지의 경제 개발과 재건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파이가 급속하게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분배 문제에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착근 자유주의의 성공은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남아메리카 농업 생산에 큰 타격을 준 1972년 페루 연안의 앤초비 흉어와 1973년 OPEC의 석유 감산조치로 촉발된 스태그플레이션은 자원의 한계가 드러나는 데 따른 것이었다. 자원 공급은 기술 발전에 따라 무제한 확대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것이 착각으로 확인되고 환경 문제도 심각해지면서 그때까지의 방만한 운영이 이제 불가능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효율성과 위험성"

1970년대 경제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나타난 것이 신자유주의 경제 전략이었다. 요컨대 이제 파이를 전처럼 키우지 못하게 되었으니, 더 이상 너그럽게 나눠줄 수 없다는 것이다. 노동의 가치보다 자본의 가치에 중점을 두는 이 전략은 빈부 격차를 늘림으로써 노동 비용을 줄이고 경제 활동 전반에 대한 자본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착근 자유주의에서 계급 간 타협의 통로 노릇을 한 것이 국가였다. 신자유주의 진영에서 주장하는 "작은 정부"는 바로 이 통로 기능을 없애고 줄이는 것이다. 자본 계급에 대한 과세와 함께 국가의 복지 지출을 줄이는 것이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다.

<위키피디아>에는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위세를 떨친 결과 나타난 현상으로 1)국제 무역과 자본 이동의 확대, 2)관세 장벽의 제거, 3)공공 부문 고용의 축소, 4)공기업의 민영화, 5)부의 집중 등을 꼽았다. 착근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모순을 완화하기 위해 기울여 온 노력을 외면하고 19세기의 자유방임적 경제 자유주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에 대한 비판은 1)국가주권의 손상, 2)착취의 심화, 3)환경의 악화, 4)기업 권력의 확대 등에 집중된다고 한다.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것은 뛰어난 효율성 때문이다. 효율성의 원천은 빈부 격차에 있다. 수력발전에서도 댐의 낙차가 커야 발전이 효율적으로 되는 것처럼, 계급 간 격차가 큰 사회가 더 큰 생산력을 일으킨다. 공산권 붕괴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공로가 컸고, 그 여세를 몰아 그 후의 세계화 과정을 주도하고 있다.

크고 높은 댐은 재료가 강인하고 구조가 정밀하지 못하면 붕괴의 위험이 크다. 근대 이전의 불평등 사회는 오랜 기간에 걸쳐 전통과 관습으로 구축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내구력을 가지고 있었다. 신자유주의는 재산에 따른 계급 구조로 세계를 재편성하고 있다. 급속히 만들어지고 있는 이 구조물이 어느 정도의 내구력을 가질지, 낙관하기 힘들다. 신자유주의 비판자들은 이 구조물이 조그만 지진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역사 속의 승자와 현실 속의 강자를 받드는 뉴라이트"

이영훈은 <대한민국 이야기> 98~100쪽에서 일제 협력자 집단의 역할을 중시했다. 실무와 정보에 밝으면서 양반 관료에게 차별을 받던 중인 출신을 중심으로 개항기와 식민지기의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신흥 지주층을 내세운다. "그들의 사회적 성공을 가져다 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협력적"이었던 그들이 "한국의 근대화를 주도한 계층"이었다는 것이다. 이 전형적 친일파의 후손들이 해방 당시 고등교육과 재산을 갖춘 실력자 집단으로 이승만의 대한민국에 포용됨으로써 대한민국 발전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뉴라이트는 개항 이후의 한국사를 '문명화'의 역사라고 규정하는데, 그들이 제시하는 문명의 요건이란 사유재산권과 계약의 자유 등 바로 자본주의의 요건이다. 따라서 한국의 자본주의화에 잘 적응한 자들이 한국의 문명화를 이끈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지금의 '강부자' 집단이 해방 당시 이승만에게 포용받은 '실력자' 집단과 얼마만큼 구체적으로 연결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자본주의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다는 점에서 이영훈의 눈에는 같은 성격의 집단일 것이다. 이 집단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항일투사든 성실한 노동자든 모두 역사의 낙오자로서 대한민국에 가치 있는 공헌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그는 보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의 실력자 집단 역시 자기네에게 성공의 기회를 줄 어느 지배에 대해서도 협력적이 될 것을 기대한다.

뉴라이트는 역사 속에서도 승자의 입장을 떠받들고, 현실 속에서도 강자의 입장을 내세운다.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더 따져보겠지만, 뉴라이트는 '가진 자의 자유'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의 모범생이다. 대한민국을 '가진 자의 낙원'으로 만들려는 그들의 꿈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이 질문에 자본가와 투기꾼의 대답이 다를 것이다. 자본가는 경제 안정과 공정 거래가 이룩된 진짜 '가진 자의 낙원'을 바란다. 그들의 꿈에는 진정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투기꾼은 요동치는 경제와 허점투성이 시장을 원한다.

그들이 낙원의 꿈을 내세우는 것은 그 꿈이 정말 이뤄지기를 바라서도 아니고 이뤄질 것 같아서도 아니다. 투기의 기회가 넘쳐나는 파탄 국면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자본가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자본가라 하더라도 투기꾼의 유혹에 홀려 다녀서는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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