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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하얗게 타 버렸다. 내 안의 인간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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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그때 하얗게 타 버렸다. 내 안의 인간성이…"

[인터뷰] '촛불집회' 진압 '양심선언' 이길준 이경

그는 초조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긴장 때문인지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기자가 질문을 서두를 때조차 그는 차분히 되물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중랑경찰서 방범순찰대 소속 이길준(24) 이경. 그는 촛불 집회 진압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복귀를 거부한 최초의 의경으로 곧 세상에 알려질 터였다. 지난 23일 2박3일간의 '촛불 집회 특별 외박'을 나오면서 그는 '절대 내 발로 다시 들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지난 5월 31일과 6월 1일, 약 4만 명의 촛불 집회 참가자들이 청와대로 행진하고 물대포가 쏟아졌던 그날 밤, 그는 경복궁역을 막아선 전·의경 부대 맨 앞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1일 아침, 광화문까지 촛불 시민을 진압하며 나아갔다. 7월까지 그는 계속 그렇게 시위대를 마주쳤다. 헬멧으로 가린 채 소리없이 울면서.

무엇이 그를 이렇게 힘들게 한 걸까. 6월 1일 아침, 진압이 끝난 뒤 그는 "내 안에 있는 인간성이 하얗게 타 버린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부대 복귀를 거부한 자신의 행위를 놓고 "이제까지 자신을 억압하는 권력에 순응하는 삶을 넘어서 그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25일 오후, 그는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평화·사회단체와 함께 병역 거부를 알리는 기자 회견을 갖는다. 이후 그는 그곳에서 무기한 농성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곳은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며 복귀를 거부했던 강철민 이병이 기자 회견을 열고 농성을 벌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지난 24일 저녁, 기자 회견에 앞서 서울 종로 모처에서 그를 만났다.

"처음에는 그저 경비를 서는 것뿐이라고 여겼다"

▲이길준 이경. 촛불 집회 진압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는 25일 오후 부대 복귀 거부 선언을 하고 무기한 농성에 들어갈 예정이다. ⓒ프레시안

프레시안 :
육군에서 전환되는 전투경찰과 달리 의경은 지원 입대이다. 의경에 지원했던 이유는?

이길준 : 예전부터 군대와 징집제도에 회의적이었고, 타협의 일환으로 의경 입대를 하게 됐다. 시위 진압이 아닌 다른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금 보면 안이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때는 의경이 할 수 있는 일이 굉장히 많고, 내가 갈 수 있는 곳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레시안 : 어떤 일을 맡았나.

이길준 : 방범순찰대 소속으로 처음에는 치안 보조 업무를 했다. 말그대로 순찰을 돌면서 범죄 예방을 하는 것이다. 지구대를 거점으로 계속 도는 일. 그것도 매우 형식적이지만, 촛불 집회 전까지는 그랬다.

프레시안 : 복귀 거부를 결심하게 된 과정을 설명해달라.

이길준 : 처음에 특박을 나간게 5월 중순이었다. 그 전부터 친구 편지를 통해 촛불 집회를 알긴 했지만 뭔지는 잘 몰랐다. 염려도 되고 궁금했다. 특박 다녀온 그 주말부터 우리가 출동을 나간다고 갑자기 얘기하더라. 사실 크게 걱정은 안 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거점 근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날도 거점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그 출동은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주말이 지나고 정기 외박을 나갔다. 저녁마다 촛불 집회 현장을 나가봤다. 그때 뭔가 에너지가 있다고 생각했고, 함께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부대로 복귀할 때만 해도 씁쓸한 기분이었다. 함께 하지 못하고, 반대편에 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러나 20년 동안 그래왔듯 타협하고 자기 합리화를 했다 .나는 그냥 진압이 아니라 경비만 서는 거라며."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었다"

프레시안 : 계속 경비만 섰나?

이길준 : 아니었다. 부대 복귀한 다음날이 31일이었다. 그날 새벽부터 6월 1일까지 대규모 집회가 벌어졌다. 아무 생각없이 기동대 버스에 있다가 갑자기 전원 하차를 하라고 했다. 내려서 간이진압복을 입고, 방패를 들고 어디론가 마구 뛰어가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정신없이 달렸다. 골목과 골목을 지나서. 그러다가 어느순간 내가 시위대 앞에 있었다.

효자동 부근이었다. 대학생 무리가 있었다. 우리 부대는 항상 노원경찰서와 붙어 다녔는데, 그쪽 의경 애들이 있었고, 저도 바로 시위대와 대치하면서 바로 앞줄에 서 있게 됐다.

의경 사회가 굉장히 폭압적이다. 그런 폭압의 근본적인 원동력은 공포라고 생각한다. 후임이 반항해서 위계질서가 무너질 수 있다는 공포, 또 시위대에 맞아서 다칠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것이 사람을 굉장히 악랄하게 만든다. 그날도 그런 분위기가 부대 전체에 만연해 있었다. 다들 긴장하라고 소리를 막 질러댔다.

나는 그 상황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현실감있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러다 물대포가 온다고 했을 때 정신이 들었다. 설마 쏘지는 않겠지 생각했다.

2시간 넘게 시위대의 선제 공격을 기다렸다. 그런 교육을 늘 받는다. 시위대에 꼬투리 잡힐 행동을 전혀 하지 말라고, 카메라가 많으니까 조심하라고. 지휘관, 선임 모두 '때려라. 때리는데 보이지 않게 때려라'라고 교육한다. 예를 들어 방패를 살짝 들고 발로 정강이를 찬다던지 하는 식으로.

그때도 명분 싸움이었다. 우리는 시위대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앞에 섰는데 정신없이 욕이 난무했다. 아비규환, 지옥과 같은 분위기였다. 중간중간 소강상태도 있었고, 그럴 때는 긴장하고 노려보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물대포를 쏘면서 앞으로 나가라고 하더라.

뒤에서 밀어대는데 일단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앞으로 달려나가면서 시위대가 세워놨던 오토바이도 밟혀서 부서지면서 그 사람들을 광화문까지 계속 밀었다. 그날 아침 해가 뜬 뒤에도 한참동안 계속 진압을 했다. 끝나고 길바닥에 앉아 있는데, 뭔가 하얗게 탄 것 같았다. 인간성 같은 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었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에 폭력적인 사람도 있었다. 나는 소주병을 맞았다. 그러나 전혀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비무장이었고, 나는 방패를 들고 진압복으로 무장했고, 소리를 지르면서 갔으니까. 그러면 굉장히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 걸 유도하는 것이고. 진압이 끝나고 선임들에게 폭언을 들으면서 내가 굉장히 안일하게 생각했구나,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도피가 아닌 저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길준 이경은 5월 31일 촛불 집회 진압에 처음 투입된 후 계속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말했다. ⓒ프레시안

프레시안 : 그런 진압 작전에 계속 투입되었나?

이길준 : 6월로 넘어와서 계속 집회에 나갔다. 철야, 철야, 철야…. 1일 이후에는 진압은 하지 않았지만 골목길마다 막고 청와대로 향하는 길을 모두 통제했다. 72시간 집회 때는 계속 안 들어가고 기동대 버스 안에서 잤다. 나중에는 새벽에 숙소에 들어가서 점심 때 나오는 식으로 잠만 자고 다시 출동했다.

6월 한 달간 계속 그랬고, 나는 도피를 시도했다. 일부러 다치려고도 했고, 다른 부서로 가보려고도 했다. 그렇지만 쉽지 않았다. 6월이 굉장히 길고 힘들었다. 육체적으로 잠을 못 자는 것은 상관없는데, 내가 하는 일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나와 똑같은 시민을 향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인데, 행동의 정당성이 없다는 점 때문에 더욱 힘들어졌다. 물론 양심의 가책이 제일 컸다.

7월로 넘어가면서부터 '도피가 아니라 저항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 삶을 확실히 정립해 나갈 필요성, 촛불 집회에 동참하고 싶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내 삶에 있어서 그간 한 번도 나를 억압하는 것에 자신있게 저항하고 내 목소리를 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순응하고, 명령을 거부하지 않고 따른다면 나는 결국 나중에 굉장히 이율배반적인 삶을 사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접촉이 한정돼 있고, 얻을 수 있는 정보도 없었기 때문에 혼자 공고하게 생각을 다질 순 없었다. 그러나 일단 나가면, 공명심이나 영웅심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 좋은 의미에서 이기적인 마음으로 결심한 일이지만 이슈화를 시키고 싶었다. 이게 자극이 되서, 한목소리가 아니라 모두가 각자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힘들게 처음 나오지만, 다른 의경이 더 나왔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이런 생각을 계속 키워나가면서, 나가면 안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 일찍 나오려 했는데 밀려서 늦게 나왔다.

"현장에서 의경이 경각심을 갖기란 힘들다"

프레시안 : 이렇게 되면 '미귀의'가 돼 감옥행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길준 : 많은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내가 겪게 될 어려움은 크게 상관없다. 스스로 선택한 일이고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데, 저 때문에 의도하지 않았는데 부모님이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 굉장히 힘들다. 이해하고, 설득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부분이 굉장히 힘들다.

프레시안 : 다른 부대원들의 분위기는 어떤가.

이길준 : 비슷비슷하다. 사실 전·의경이 그런 현장에 나가서 경각심을 가진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입대 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으면 모를까, 부대 안 분위기가 일단 폐쇄적이고, 폭압적이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당연히 시위대에 대해 강렬한 적개심을 갖고 있다. 시위대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자기가 선택한 길이고, 힘든 길이긴 하지만 저항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들 그런 생각조차 못 하고 있다.

프레시안 : 진압 당시에는 시위대 안에서 명령거부권 주장하는 건 보지 못했는지.

이길준 : 일단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괴로워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시위대와 눈만 마주쳐도 힘들었다. 피켓 들고 지나가는 것만 봐도 힘들었다. 우리를 보고 야유를 굉장히 많이 했는데, 그걸 보면 남들과 다른 의미로 많이 아팠다. 지나가면서 '항명하라'고 얘기하라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다. 나오기 전까지는 굉장히 순응하면서 살았다. 그런 것을 비난받을 수 있지만 감수해야 할 것이다.

시위 현장에서 일단 많이 힘들었다. 헬멧을 쓰고 있을 때가 많았는데, 안 보이게 많이 울기도 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옷 입은 채로 가서 선언을 해버리고 싶기도 했다.

"자발적인 촛불 집회가 좋았고, 나의 저항을 알리고 싶었다"

▲이길준 의경은 "입대 전부터 징병제에 회의를 느껴 일종의 타협으로 의경을 지원했다"며 "이제 촛불 집회 때문에 도피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다. ⓒ프레시안

프레시안 :
이전에도 계속 집회가 있어 왔다. 이번 촛불 집회 진압에 투입된 경험도 있지만, 특별히 촛불 집회를 보고 동참하고 싶다고 느꼈던 이유가 있는지.

이길준 : 한국 사회에서 집단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굉장히 경계한다. 그런데 이번 집회는 오히려 자발적으로 축제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좋았다. 비장함, 엄숙함만으로 시위를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각자의 언어로 각자 할 수 있는 것을 들고 나와서 논다는 것이다. 물론 중앙 무대도 있고, 전면에 나서는 단체가 있긴 하지만 일단 큰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목소리가 모여서 축제를 한다는 것이 굉장히 좋게 보였다.

쇠고기가 상징적으로 제일 큰 문제가 됐긴 했지만, 다들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정부가 얼마든지 자기 목숨을 위협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이 가장 큰 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병역 거부에 대한 공격이 걱정되진 않았는지. 대학을 다니면서 학생회장을 했던 것 등을 두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을 것 같다.

이길준 : 그런 생각 자체가 웃기다. 운동권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운동이라는게 거창하게 볼 필요가 없다. '권'이라는 있을 필요도 없고. 그건 사실 자기 생활 속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에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 자기의 인간다운 삶을 찾아가는 것. 그게 운동이다.

나는 어떤 단체에 소속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내가 전략적으로 어떤 목표를 성취해야 겠다는 생각을 가진 적도 없었다. 이슈화도 전략적 사고가 아니라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일 뿐이었다.

부대 폭압 못 견뎌서 나갔다는 식의 악의적인 공격도 많이 걱정했다. 사실 그것도 큰 문제이지만 첫 번째 이유는 아니었다. 저 스스로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어쩌면 촛불 집회가 아니었다면 계속 적응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늘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프레시안 : 징병제를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길준 : 한 사람의 시간, 노동력, 권력을 국가라는 권력이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군대를 통해 유지되는 건, 군대쪽에서는 전쟁을 억제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건 살상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그런 기술을 배우게 한다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입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선, 굉장히 괴로웠다. 말은 매일 이렇게 해놓고서 타협을 하게 됐으니까. 의경은 하나의 눈가리고 아웅이었다. 들어가서 내가 진압에 안 나오고 사무를 보거나 연구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유지시키는 것은 제가 반대했던 것들이다. 그래서 더 이상 도피로는 해결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프레시안 : 촛불 집회도 당시보다는 잦아들었다. 이번 행동을 통해 사람들에게 가장 알리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이길준 : 촛불 집회는 스물 갓 넘은 또래들이 얼마든지 공권력을 위한 억압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게 보여줬다. 그런데 더 이상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복무를 할 수는 없다. 완전히 촛불 집회가 끝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큰 의미에서의 저항을 얘기하고 싶었다. 나의 저항이 사람들에게 의미가 되길 바랐고. 의경 중에서도 그런 문제에 굉장히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또 의경 문제에 대해 내부에서 고발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리고 싶었다. 공권력을 사용해 젊은 애들을 사지로 내몰고, 시위대가 같은 또래가 만나서 그런 상황을 만들어내는 정부에 따지려는 것이다.
"전·의경이 제일 많이 다친 건 물대포 때문…시위대는 폭력 얼마든지 써도 된다고 교육"

이길준 이경은 자신의 이야기 외에도 촛불 집회 현장과 진압 과정에서 이뤄지는 공권력 남용, 그리고 부대 내의 폭력 문제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그의 증언은 석달 가까이 계속되는 촛불 집회 가운데 온갖 비난 속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경찰의 폭력 진압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듯하다.
▲이길준 의경은 "전·의경이 제일 많이 다친 건 물대포 때문이었다"며 "시민에게 맞아서 다친 전·의경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프레시안

프레시안 : 경찰이 촛불 집회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물대포를 쏘는 것 이외에 소화기를 뿌리거나, 채증을 하는 등의 행위가 논란이 됐다. 실제로 어떤 대처법이 주어졌는지.

이길준 : 소화기는 지시가 내려온 건 없었고, 알아서 쓴 것이다. 저희 부대같은 경우 기동대 버스에 남아있던 운전병들이 많이 뿌렸다. 자기가 당할 수 있으니까. 자의적인 판단이 많다. 물론 지시가 있어야 그런 걸 쓸 순 있긴 하다.

채증은 항상 한 명을 정해서 사복을 입고 카메라를 들고 찍는다. 예를 들어 청와대 근처로 가는 버스 안에는 항상 사복 경찰이 있다. 종로에서 집회가 열리면 몇 백 미터 간격으로 사복 경찰이 있다고 보면 된다.

시위 현장에 나가 있으면 소문이 돈다. 저쪽에서 쇠파이프를 들고 다닌다더라 하는 얘기들. 그러면서 공포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보지 않으니 모르지만, 저쪽에서 그런다고 하니 현장에서는 그렇게 알 수밖에 없다.

촛불 집회에서 비폭력이 외쳐졌다고 하지만, 의경 안에서는 저 사람들이 굉장히 폭력적으로 하고 있다는 말만 듣는다. 또 업무 자체가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고역이다. 몸도 한계가 오고,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니까 더 그러는 것이다.

프레시안 : 경찰은 시위 참가자들이 휘두르는 폭력 때문에 부상자가 많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길준 : 진압복을 입으면 어지간해서는 맞아도 아프지 않다. 소주병이나 시위대의 폭력은 대개 진압이 끝나고 선임들이 모여서 담배 하나 피우면서 무용담처럼 얘기하는 꺼리가 될 뿐이다. '이런 경험도 한 번쯤 필요한 것 아니냐', '나는 돌도 맞았다'라는 식으로 얘기하면서.

전·의경이 제일 많이 다친 건 물대포 때문이었다. 저도 굉장히 많이 맞았다. 시위대한테 맞아서 다쳤다기 보다 주변에서 밀어서 다치는 경우가 많다. 주변 부대원들 중에서는 별로 다친 사람을 못 봤다. 저희 부대 60명 중. 촛불 집회 동안 다친 사람은 없다.

프레시안 : 시위 진압을 나가면서 부대 분위기가 바뀌진 않았나.

이길준 : 지휘관들이 가장 강조하는 건 사실 구타 및 가혹 행위 금지이지만 형식적일 뿐이고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촛불 집회 이후 6~7월 두 달간 분위기가 굉장히 험악해졌다. 애들을 긴장시키고, 군기를 잡는다는 명목이었다.

의경은 전통적으로 가혹 행위가 심하다. 사건이 터지면 1년 간 평온하다가 다시 사건이 터지는 식이다. 시위 현장에 나가서 기동대 버스 안에서도 많이 그랬다. 얼차려를 받기도 하지만 눈에 띌 수 있는 건 많이 안 시킨다. 의자에 몸을 붙이지 않고 앉은 자세로 서 있다거나. 이런 건 지휘관이 지나가면 앉았다가 다시 할 수 있으니까.

군기를 잡는다는 목적이 가장 크다. 조그만한 꼬투리라도 잡아서 벌을 주는 것이다. 나갔을 때 느렸다거나, 나간 후에 목소리가 작았다거나, 살기등등한 모습을 못 보였다거나.

촛불 집회가 계속될 수록 구타 행위는 점점 심해졌다. 7월에는 매일 맞았다. 특박 나오기 며칠 전부터 그만 때리겠다고 하면서 잠깐 분위기가 좋아지긴 했지만.

프레시안 : 촛불 집회나 광우병에 대한 정신 교육도 이뤄지나?

이길준 : 집회가 부정적이라는 건 부대원 사이에 만연돼 있기 때문에 따로 교육을 할 필요가 없다. 시위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비하를 해도 되고 폭력을 써도 된다고 모두가 생각한다. 자기를 고생시키는 존재라고 생각하니까. 정부가 아니라 시위대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휘관들도 점호나 교양에서도 시위대의 안전을 위해서 진압을 해라가 아니라 문제가 생기니까 때리지 마라는 식으로 얘기를 한다. '요새는 누구나 핸드폰 카메라가 있다. 어떻게 해서든 찍히지 않도록 조심해라'는 식으로.

일단 그런 것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볼 시간이 없는 것이다. 시위대는 업무의 요소일 뿐이다. 빨리 집으로 보내야 하는 존재들이고, 귀찮은 일거리일 뿐인 것이다. 그 안에서의 생활 자체가 비인간적이기 때문에 주변을 대하는 것도 인간적이지 않다. 들어가면 기본적으로 예전 고참들의 화려한 무용담, 시위대를 향해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요소가 있다. 비판의식을 가지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거기에 물들어가는 것이다.

한 친구가 편지를 통해 '너도 희생자가 아닐까'라며 위로했다. 물론 다들 희생자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저항할 수 있고, 힘든 길이긴 하지만 어쨌든 자기가 선택한 길이다. 그래서 의경을 옹호해 줄 생각이 강하게 들진 않는다.

프레시안: 어청수 경찰청장이 촛불 집회에서 온갖 비난을 듣고 있다. 부대 내에서 그런 분위기는 없는지.

이길준 : 다들 관심이 없다. 일단 욕을 하긴 한다. 사람 별로 많이 모이지도 않은 것 같은데 왜 우리를 부르냐는 식으로. 광화문에 컨테이너을 쌓았을 때는 다들 잘했다고 했다. '어청수 청장이 오늘 처음 마음에 들어'라는 식의 얘기를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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