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는 잉크로 쓴 게 아니라 에너지로 썼다는 말도 있는데, 1차 세계대전도 사실 독일이 공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 시작한 거고요. 강대국들은 최근에도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큰 무기가 에너지라는 걸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는 듯 보여집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중국이 현재 1인당 석유소비량이 2ℓ가 채 안 되지만, 향후 10년 동안 2배로 늘어날 거라는 거죠. 어느 나라나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석유소비량도 늘어나기 마련이지만, 중국은 인구가 13억 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중국이 마치 전 세계의 자석이 되는 셈이에요. 산업화가 진전될수록 자원을 급속도로 빨아들이게 되는 거죠."
지난 2004년 5월 21일 발행된 주간지 <이코노미21> 기사 중 일부다. 얼핏 보면, 학자나 평화운동가의 발언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실물경제 동향에 해박한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전망이다. 당시 이 잡지가 마련한 좌담에서 전병서 대우증권 리서치본부장 (현 한화증권 리서치본부장)이 한 이야기다.
읽다 보니 그럴싸했다. 그래서 잡지를 덮으며, '이민 가야 하나'라고 생각했다. 물론,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자원 쟁탈전'에 열 올리는 한·중·일, 1차 대전 직전 유럽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4년이 지났다. 증권사 애널리스트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비유한 동북아시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중국경제가 성장하는 '스피드'는 떨어지지 않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이전, 신흥공업국이었던 독일이 자원을 얻을 수 있는 식민지를 구하기 위해 발버둥 쳤듯, 중국 역시 자원 기지에 목말라한다. 아직 충분히 개발되지 않은 자원과 석유가 매장돼 있는 아프리카 대륙에 중국이 극진한 외교적 노력을 쏟고 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은 최근 콩고, 잠비아 등에 경제특구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자원외교'다. 이미 '자원외교'는 동북아 3국이 함께 매달리고 있는 과제가 됐다. 일본 역시 꽤 오래전부터 해외 자원 기지 확보를 위해 애쓰고 있다.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 직후, '자원외교'를 외쳤다. 일본정부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의 '자원외교'는 요란하게 진행되고 있다. 성과를 낼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대신, 관련 부처들 사이에서 나오는 불협화음은 꽤 시끄럽다.
하지만 지구가 품고 있는 자원의 총량은 한정돼 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소비했다. 상당수 학자들이 2050년께가 되면 물, 석유, 유가금속 등 주요 자원의 부족 현상을 피할 수 없다고 전망한다. 제한된 자원을 놓고, 패권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게 되리라는 점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자원외교'라는 이름으로 '자원 확보를 위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한국, 중국, 일본 역시 이런 긴장에서 자유로울 리 없다.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전망대로, 우리는 과연 전쟁을 피할 수 없을까?
"사하라 사막의 탱크전, 한·중·일 버전으로 재연될 수도"
이런 질문에 대해 답하는 책이 나왔다.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를 저술하고 있는 경제학자 우석훈의 책 <촌놈들의 제국주의>다. <88만원 세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에 이어 나온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 3권'이다.
급한 질문부터 확인하자. 과연 전쟁 날까? 저자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는 고향에서 익숙하게 보던 한중일의 갈등을 그 먼 아프리카 땅에서도 보게 될는지 모른다. 유럽을 떠나 먼 사하라에서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가 정면으로 맞서고, 실제 영국까지 끼어들어서 거대한 탱크전을 벌였던 얘기가 한중일 버전으로 재연될 수도 있단 것인가? 불행히도, 그런 개연성은 대단히 높다."
저자는 '영토 밖 전쟁'의 가능성을 꽤 높게 보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도 한국은 '영토 밖 전쟁'에 군대를 보낸 적이 있다. 지난 2004년,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이라크 파병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한국이 제국주의로 가는 첫 번째 문턱을 넘었다"라고 설명했다. 이념이나 대의명분이 아니라 '국익'을 이유로 군대를 전쟁터에 보냈다는 것. 이는 제국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상이라는 설명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익 있으면 파병하겠다'는 한국, 제국주의 문턱 넘었다"
"'국익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논의 자체가 파병과 전쟁이라는 특수한 관계로까지 연결되는 것은 다분히 제국주의적인 현상이다. 이익이 있어도 대부분의 국가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은 이렇다.
"이 파병의 의미를 조금 냉철하게 규정한다면, 미국을 등에 업은 일종의 전쟁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앞으로 경제적 이해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파병을 통해 세계전쟁에 가담하겠다는, 일종의 한국 자본주의의 질적 전환에 대한 '암묵적 선언'인 셈이다. 실제로 이라크에서 한국은 미국과 일본에 이어 파병 규모가 세 번째인 국가이며, 언제라도 이란이나 요르단과 같이 또 다른 전선으로 파병이 확대될 가능성 또한 다분한 상황이다."
더 무서운 일은 이런 변화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 일어났다는 점이다. 저자의 설명이다.
"더 명확히 표현하자면,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은 미국의 강요에 마지못해 따른 게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가 해외에서의 군사활동을 강력히 원했고, 무엇보다 절반 가까운 국민이 한국 군대가 해외에서 활동하는 것을 원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파병 결정이 민주적 절차 측면에서 심각하게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니다. 논의가 다소 일방적으로 흐르기는 했지만, 법적 절차에서 정부는 한국 자본주의가 원하는 전쟁을 결정했고, 국회는 국민들이 원하는 대로 이 파병에 동의한 것이다."
민주정부가 국회의 동의를 얻어 치르는 전쟁을 막을 방법은 묘연하다. 전쟁을 막기 위해 '평화', '인권', '정의' 등 보편적인 가치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계산기를 두드리며 "전쟁을 치르면 경제적으로 손해다"라는 명제를 입증해야 하는 사회. 한국은 어느새 이런 곳이 됐다.
삼족오 깃발 아래 숨은 제국주의적 열망
이런 변화는 언제 일어났을까? 저자는 '노무현 정부의 어느 한 시점'이라고 설명한다. 변화를 알리는 징후는 다양했다.
이 중 하나로, 저자는 반기문 UN사무총장이 취임 직후 인장에 '삼족오(三足烏)'를 새긴 사건을 꼽는다. 국내 공중파 방송사 전부가 시청률 황금시간대에 '주몽', '연개소문', '태왕사신기', '대조영' 등 고구려 관련 사극을 배치했을 무렵이다. 이런 드라마에서 삼족오, 즉 다리가 셋 달린 까마귀는 고구려의 국가 상징으로 묘사됐다.
실제로 고구려 군대가 드라마에서처럼 삼족오 깃발을 들고 전쟁을 치렀는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시청자들은 선진화된 무력을 갖춘 중원의 군대를 물리치는 고구려 장수와 병사들에게 열광했다. 모든 채널에서 비슷비슷한 소재를 다룬 드라마를 보면서도 시청자들은 식상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드라마에 '고구려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훼손하는 듯한 내용이 담기면, 드라마 홈페이지는 비난 의견으로 도배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방송사들은 '고구려의 영광'을 경쟁적으로 장엄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세계 평화'를 과제로 삼고 있는 UN 사무총장의 인장에 '삼족오'가 새겨진 것은 명백히 이상한 일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삼족오'는 군사력에 바탕을 둔 패권국가에 대한 동경을 자극하는 드라마 속 소재일 따름이었다. '만주를 호령하는 고구려의 영광'과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하는 UN 사무총장'은 아무리 좋게 봐도 한데 어울리기 어색하다.
그런데 '이렇게 이상한 일이 왜 벌어질까'라고 묻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웅장한 북소리와 함께 고취되는 '고구려의 영광'에 기댄 광고만 늘어갔다. 민족주의 마케팅이 합리적 질문을 압도했던 셈이다.
'촌놈들의 제국주의'…'우물 안 개구리'의 로망
저자는 여러 사례를 들어 한국 사회 안에 제국주의에 대한 동경이 급격히 팽창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궁금해진다. '아무리 그래도, 한국이 제국주의 국가가 될 힘은 없지 않나. 힘이 있어야 제국주의 흉내라도 내지.'
저자도 동의한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한국은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가려는 열정으로 잔뜩 들떠있지만, 그에 어울리는 실력은 없다. 그래서 저자는 '촌놈들의 제국주의'라는 표현을 끌어냈다.
여기서 "촌놈"은 지방 사람을 비하하는 뜻이라기보다, '우물 안 개구리'를 가리키는 쪽에 가깝다. 바깥세상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바깥세상에서 통할 수 있는 실력도 없으면서 패권에 대한 동경은 강한 사회. 그게 한국의 자화상이라는 이야기다.
영어만 알고, 역사와 인류학에 무지한 한국…"제국주의는 아무나 하나"
이런 상황을 뒷받침하는 사례는 많다. 대표적인 게 '국사(國史)'에 대한 홀대다. 고구려 사극에는 그토록 열광하는 사회에서, 한국사 연구자들은 끼니를 걱정한다. "국사학자가 명예롭지 못한 대우를 받는 제국주의 국가는 없다"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우리는 국사만 모르나. 그렇지 않다. 남의 나라 이야기에는 더 관심 없다. 저자는 한미FTA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던 당시를 예로 들었다. 앞서 저자는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를 통해 한미FTA가 낳을 부정적 영향에 대해 경고했다. 또 <프레시안> 지면을 통해서도 여러 차례 한미FTA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발표했다. 그래서 저자는 한미FTA 관련 토론회에 참석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미국에서는…"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입만 열면 "미국에서는…"이라고 말했던 숱한 경제학자 가운데 실제로 미국 경제를 전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 대부분 미국에서 유학했지만, 정작 미국경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과 미국에 대해서만 무지한가. 그것도 아니다. 한국 대학은 '지역학'의 불모지대다. 그리고, 다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학문적 기초인 인류학이 홀대받는 곳이다. 고등학교 졸업자의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나라에서, 인류학과가 설치된 대학의 수는 손으로 꼽아야 할 정도다. 제국주의 국가였던 나라 가운데 인류학을 소홀히 하는 곳은 없다.
그뿐 아니다. 한국의 엘리트 집단은 외국어에 대한 관심도 적다. '영어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라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이나 미국을 식민지로 삼을 게 아닌 이상, 영어 공부 열심히 하는 것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열망을 해소할 수는 없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런 한국 지식인들과 고급 관료들의 의식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은 파견지 언어에 대한 한국 외교관과 일본 외교관의 접근 방식이다.
일본 외교관은 세계 어느 나라에 가든지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려고 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외교부 안에서 제대로 대접받기 어렵다.
그러나 한국 외교관들이 가장 선호하는 언어는 '영어'이며, 아주 특별히 노력하는 일부를 제외하면 파견국의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하는 경우를 보기 어렵다."
하긴, 이런 면모는 언론 보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른바 선진국 매체에서는 국제 기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또 국제 기사의 질도 매우 높다. 프랑스 언론에 실리는 아프리카 관련 기사는 수준이 높기로 유명하다. 아프리카에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있었다.
반면, 한국 언론은 국내 정치 기사의 비중이 높다. 국제 기사는 해당 언론사 논조에 맞춰 외신을 짜깁기한 경우가 많다.
여기까지 이르면, 한국의 식민지가 될 만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어떤 어수룩한 나라가 영어 밖에 못하는 나라의 식민지가 되겠는가. 사실 당연한 일이다. 애당초 한국은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과 달리 식민지를 경영해본 경험 자체가 없다.
그런데도, 많은 한국인들은 제국주의 흉내를 내고 싶어 한다. 그저 흉내에 그치면 다행이다.
너도 나도 대형차, 석유 낭비하는 한국…외부 자원에 목마른 경제
문제는 한국 경제의 구조가 식민지를 간절히 원하도록 짜여 있다는 점이다. '삼족오' 깃발에 대한 열광이 가볍게 스쳐가는 문화 현상이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 경제는 수출의 비중이 극단적으로 높다.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라며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대외경제의존도가 80%에 가까운 국민 경제는 흔한 사례가 아니다. 자전거 페달을 밟듯, 자원과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는 곳과 공장에서 쏟아내는 상품을 팔아넘길 곳을 계속 찾아 내지 않으면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경제 구조다.
게다가 한국인들을 기를 쓰고 중대형 승용차를 타려 한다. 소형차를 타면 무시당한다는 생각까지 갖고 있다. 안정적인 석유 공급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사회다. 저자의 설명은 이렇다.
"지난 50년 간 한국에서 석유 소비가 줄어들었던 해는 딱 한 해, 바로 1998년 IMF 경제위기 때이다. 그리고 3년 후, 경제가 다시 회복되면서 2001년에 최초의 경차였던 티코가 단종 되었고, 2002년에 아토스가 단종 되었다.
일본은 국민소득 2만 달러를 지나면서 800cc 경차가 국민차가 되었고, 4만 달러를 바라보는 유럽 국가들은 최근 600cc 도시용 승용차 개발에 국민경제의 승부를 걸려고 하는 중이다.
반면 한국은 2만 달러를 막 넘은 시점에서 십대들의 승용차 구매 90%가 2000cc급 이상이다. 미국을 제외하면 승용차 크기가 두 번째로 큰 나라가 한국이다."
큰 차를 타고 다니려니, 석유를 많이 쓸 수밖에 없다. 한국은 석유 화학 산업의 비중도 높다. 박정희 정권이 중화학 공업에 투자를 몰아줬던 결과다.
'중후장대형' 산업이 전쟁을 부른다…석유 수송로 지키려는 동북아 군사 질서 재편
그런데, 석유 화학 산업을 포함한 이른바 '중후장대형 산업'은 대체로 전쟁과 가까운 산업으로 분류된다. 안정적인 석유 수송로 확보에 사활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중국 해군이 대만 해협 근처에서 석유 수송로를 막는다면.' 이런 상상만으로도 '중후장대형 산업'의 비중이 높은 한국 경제는 타격을 입는다. 그래서 '대양해군'이 필요해진다. 또 석유 수송로를 보호하고, 중국을 견제하기에 요긴한 장소인 제주, 광주 등이 군사적 요충지로 부상한다. 실제로 '평화의 섬' 제주에는 군사기지가 들어설 전망이고, 광주에는 미사일이 배치됐다.
한국의 이런 움직임은 다시 중국과 일본을 자극한다. 결국, 서로에 대한 증오가 서린 역사를 지닌 동북아 3국은 군사력 경쟁에 돌입한다.
"북한을 내부 식민지로"…'DJ독트린'의 이면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긴장 속에서 한국이 출구로 찾은 게 북한이다. 제국주의 비슷한 짓을 꼭 하고 싶은데, 영어 밖에 할 줄 몰라서 식민지를 찾지 못하는 나라인 한국으로선 유일한 선택지라는 것.
여기서부터 민감한 내용이 나온다. 저자는 개혁 진영 지식인들 사이에서 '비판의 성역'으로 통했던 햇볕정책에 칼을 들이댄다. 저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관되게 추진한 햇볕정책이 단순한 대북정책 이상이라고 평가한다. "한국 외교사는 물론이고 한국 자본주의의 장기적 흐름에도 큰 영향을 준 사건"이라는 것.
그래서 저자는 햇볕정책을 'DJ독트린'이라고 격상해서 부른다. 저자에 따르면, 'DJ독트린'은 두 개의 명제로 구성돼 있다. '제1명제'는 "한국은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지 않겠다"라는 것. '제2명제'는 "한국은 북한에 경제적 지원을 하겠다"라는 것. 저자의 설명은 이렇다.
"결국 지난 10년 동안의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DJ독트린은 이렇게 두 개의 명제를 통해서 명확한 국가적 경제행위 하나를 형성하게 된다. 즉, '남한 자본의 북한 진출'이다.
…지금의 한국 자본주의를 형성시켰던 바탕에 해당하는 섬유산업 등 제조업들을 어떻게 유지하고 또 어떻게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갈 것인가에 대해, 한국은 실제로 마땅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제조업이 하나 둘 중국이나 동남아 등지로 이전되는 데 대해 공포스러울 정도의 위기감이 왔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970년대 이후의 영국에서 제조업의 해외 이전으로 벌어진 일종의 '산업 공동화(空洞化)' 혹은 '역(逆)산업화' 현상을 목격한 바 있기 때문에, 이런 공포는 단순한 위기감이 아니라 일정한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DJ독트린이 탄생할 수 있었다. 현대그룹의 금강산 관광에서 최근의 개성공단까지, 이른바 역사적인 6·15선언 위에 일련의 대북 경협사업이 서 있다는 건 부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국 자본주의에서 이제 북한이라는 존재는 지난 10년을 거치면서 경제적인 의미로 '식민지'에 더 가까워졌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다른 먼 나라에 외부 식민지를 갖기 어려운 한국 자본주의 입장에서 북한만큼 만만한 식민지가 또 있을까? 중국보다 가깝고, 동남아보다 임금이 싸고, 아프리카보다 훨씬 양질의 노동력을 가지고 있는 북한을 식민지로 전환시키지 않는다는 건 상식적인(?) 눈으로 볼 때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DJ독트린'의 패권적 속성…제국주의적 열망의 탈출구
북한 정권의 급격한 붕괴를 막아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유지한다는 면에서 'DJ독트린'은 큰 효용을 발휘했다. 하지만 저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DJ독트린'에 담겨 있는 패권적 속성이 점점 강화됐다"고 설명한다. 김대중 정부에 비해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노무현 정부가 이런 속성을 강화하는 쪽에 힘을 실었다. 이명박 정부 역시 이런 속성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DJ독트린 등장 후 10년, 이제 정권도 바뀌었으므로 DJ독트린도 폐기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언젠가 새로운 평화 독트린에 의해 대체되기 전까지 DJ독트린은 그 패권적 속성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한국이 북한을 붕괴시키는 매우 적대적인 방식으로 대북정책의 기본 방향을 바꾸는 경우를 제외하면, DJ독트린의 근본적인 내용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과거 어느 때보다 한국 자본주의가 DJ독트린의 실질적인 내용을 더 갈망하고 있으므로 이런 경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질 것이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한국의 자본은 가장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땅으로 지금 북한을 지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 돈을 그 어느 때보다 애타게 갈구하는 중이다.
…DJ독트린은 한편에선 통일 근본주의를 거쳐 쇼비니즘에 가까운 민족 패권주의와 만나고, 다른 한편에선 이윤 법칙을 통해 자본의 민족 패권주의와 만나게 되었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도 하고, 경제성장도 도모하고, 더불어 민족의 숙원이던 만주로의 진출도 꾀하고, 유라시아 대륙을 따라 철도망과 도로망도 건설하며 영원한 경제번영을 이루자는 이야기는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얘기이기는 하다.
지금 한국에서 통일 근본주의와 이윤 중심주의가 결합하는 이런 과정은 형태상으로는 19세기 말 전형적인 제국주의의 탄생을 이뤄냈던 힘과 동일한 것이며, 지금 한국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민족패권주의는 현실세계에서는 한국형 경제패권주의를 탄생시킨 힘과 동일한 것이다.
우리가 하면 다르다? 다를 까닭이 없다. 자본의 법칙은 대체로 동일하게 관철되는 법이다.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1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자본의 법칙은 크게 바뀌지 않았고, 19세기에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조율하던 영국의 힘이 세계대전을 막아주지 못했던 것처럼, 영원할 것 같은 미국 중심의 조율하는 힘도 영원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비좁은 탈출구, 열쇠는 10대가 쥐고 있다
앞서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많은 한국인들은 '고구려의 영광'이 재현되기를 꿈꾸지만, 동북아시아의 현 상황은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럽과 비슷하다는 것. 그리고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유럽 국가들을 당시의 패권국가였던 영국이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듯, 다시 중화제국을 꿈꾸는 중국, 군사적 패권에 욕심을 내기 시작한 일본, 북한을 내부 식민지로 활용하여 '고구려의 영광'을 부활시키려는 한국 사이의 갈등을 풀 방법은 없다는 이야기다.
정말 해법이 없을까? 저자는 아주 좁은 출구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출구의 문을 여는 열쇠는 한·중·일의 10대 청소년들이 쥐고 있다. 동북아 3국의 갈등이 전면화 될 시기에 성인이 돼 사회를 주도할 이들이기 때문이다.
한·중·일의 10대 청소년들이 전쟁이 아닌 평화를 바라는 열정을 내면화한다면, 동북아시아는 세계대전으로 치달았던 20세기 초 유럽의 선례를 따르지 않을 수 있다.
'암기 위주 교육'과 '전쟁 선동'은 동전의 양면
하지만 가능성은 낮다. '교육 파시즘' 때문이다. 극단적인 암기 위주의 교육은 청소년들에게서 생각하는 힘과 감수성을 빼앗아 갔다. 그래서 전쟁을 부추기는 극우파의 선동에 쉽게 속아 넘어갈 위험이 있다. 암기 위주 교육과 전쟁 선동은 동전의 양면이다. 실제로 군대 내무실에서는 종종 '암기 강요 행위'가 이뤄진다.
수학이나 과학마저도 문제 유형과 풀이과정을 외우도록 부추기는 나라는 이들 3국외에는 없다. 게다가 한국정부는 한술 더 떠서 '영어 몰입교육'과 같은 선동적인 정책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턱대고 외우는 일만 반복하는 청소년들을 영어 훈련에 몰입시키면 결과는 뻔하다. 모두 바보가 된다.
이런 경쟁에서 승리한 청소년은 한국에선 엘리트 취급을 받겠지만, '영어 잘하는 바보'를 벗어날 수 없다. 한국인 엘리트가 미국인 바보의 수준이 되는 셈.
정부는 왜 아이들을 바보로 만들려 할까?
저자는 "대부분의 지배자들은 자식들을 이미 미국으로 빼돌린 상태라서, 한국에서 이뤄지는 감시와 억압은 그 자식들이 나중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충분히 경쟁력을 갖출 조건이 되고 있다. 이 바보 나라에서 교육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쟁력이 된다"라고 지적한다.
청소년들을 이렇게 바보로 만드는 시도는 원래 우파의 신념과 어긋난다. 미래 한국을 이끌어갈 청소년들이 더 건강하고 현명해지기를 바라는 게 우파의 자세다. 민주적 토론을 중시하는 전통을 갖고 있는 좌파 역시 청소년들이 더 똑똑해지기를 바란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길까? 하나는 '내 자식만 잘 되면'하는 극단적인 자식 이기주의에 빠진 부모들 때문이다.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청소년들이 '88만원 세대'로 전락할 위험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자식이 '88만원 세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위 5%에 속하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염원 역시 간절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단 내 자식 만이라도 상위 5%의 안전지대로 피신시키자"라는 생각을 낳았다.
그리고 모든 부모가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협동은 사라지고 무한 경쟁만 남는다. 하지만 지나친 경쟁은 아이들을 바보로 만든다. 많은 부모들 역시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랑곳 하지 않는다.
"남의 집 자식도 똑같이 바보 되면, 공평한 게임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경제학자다운' 설명을 내놓는다.
"남의 집 자식도 똑같이 바보가 되면, 이 게임은 문제없는 것으로 안전하게 돌아간다. 아주 공평한 게임이다."
정부가 바보 만드는 교육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통념과 달리, 저자는 현재 한국을 이끌어 나가는 세력이 원하는 인재상은 '경제전쟁을 수행하는 전사'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OECD 상층부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인재를 원한다면, 아이들을 바보로 만드는 교육을 용인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아이들을 어떤 어른으로 키우려 할까?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상징적인 경제 전쟁이 아니라 총칼을 드는 진짜 전쟁이고. 애국심이 충만해져 언제든지 전선으로 뛰쳐나갈 신체 건장한 바보들이다."
경제 살리기를 내세워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은 청소년들을 끊임없이 경쟁 속으로 몰아댄다. 그런데, 과연 이 대통령은 한국 청소년들이 '애국심에 충만한 바보'가 되기를 바랄까? 정말 전쟁으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문마저 닫으려 하는 걸까? 물론, 대통령이 이런 의도에 따라 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은 없다.
전쟁산업은 무기산업만이 아니다…"평화로 돈 버는 인구 늘어야 전쟁 막는다"
하지만,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어떤 의도에서건 전쟁으로 향하는 길을 넓히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가 건설 사업에 대한 집착이다. 통념과 달리, 건설업은 '평화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은 노무현 정부 시절, "경제적 이익이 있으면 전쟁터에 군대를 보낼 수 있다"라는 선례를 남겼다. 그리고 이런 결정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이뤄졌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막으려면, "전쟁하면, 경제적으로 손해다"라고 설득해야 한다. 슬픈 일이지만, 그렇게 됐다.
이는 한국의 경제 활동 인구의 과반수가 "전쟁나면 손해 입을 게 뻔한" 산업에 종사해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저자는 이런 산업을 '평화산업'이라고 부른다. 이와 대칭을 이루는 개념이 '전쟁산업'이다.
흔히 탱크나 총을 만드는 산업만 '전쟁산업'으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저자는 통조림 산업의 예를 든다. 식품 산업은 흔히 '평화산업'으로 여겨지지만, 통조림 업자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돈벼락을 맞았던 경험이 있다. 이런 선례가 있는 한, 불경기를 맞은 통조림 업자들이 다시 전쟁이 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전쟁산업의 모사꾼'은 건설업…"부숴야 새 집 짓지"
이렇게 보면, 의외로 '전쟁산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다. 게다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국면에서 일자리를 잃어버린 인구 가운데 일부 역시 '차라리 전쟁이라도 났으면'하는 바람을 품을 수 있다. 전쟁은 대개 완전 고용 상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전쟁산업'의 '간판 타자'이며, '실질적인 모사꾼' 역할을 하는 산업으로, 저자는 '건설업'을 꼽는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선진국이라고 하기에는 가공할 정도로 높은 건설업 비중을 보여준 일본 경제를 개번 매코맥은 1998년에 '토건국가'라고 지칭한 바 있다.
이러한 건설업이 사실상 군산복합체와 에너지 산업의 지지를 받으며 일본을 점차 '평화국가'에서 '보통국가', 그리고 장기적으로 '전쟁국가'로 복귀시킬 것이라는 시나리오는, 유럽 쪽의 전문가들에게는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설명은 한국에 대해서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오히려 한국은 일본보다 더 심각한 '토건국가'다.
문득 의문이 든다. "'건설'은 파괴, 전쟁 등과 반대 개념 아닌가. 그런데 건설업이 전쟁산업이라니."
저자는 말한다. "집을 부숴야 새 집을 지을 게 아닌가." 실제로 한국 정부가 이라크에 보낸 군대 역시 '건설'을 위한 부대였다. 이어진 저자의 설명이다.
건설 권력, 국내 공사 다 끝나면 '전사'가 된 아이들 데리고 어디로 갈까?
"사실 건설자본은 전쟁에서 가장 막대한 이익을 얻지만, 전쟁 이후의 참혹한 현장에서 재건을 맡기 때문에 스스로를 평화세력으로 위장하기에 아주 좋은 위치에 있다.
그래서 건설자본들은 전쟁터에서 '평화재건'이라는 깃발을 내거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이유로 전쟁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세력은 실제로는 군산복합체라기보다는 건설자본이라는 껍질을 쓴 채 전쟁하자고 나서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건설업자 출신이 정치권력까지 갖고 있다. 단지 대통령만이 아니다. 건설자본은 광고로 보수언론을 먹여살리고, 지방 토호와 결탁한다. 그래서 견고한 권력을 휘두르는 '건설족'을 이룬다. 그리고 이 권력은 아이들을 무한경쟁으로 내몰아 생각할 틈을 빼앗는 한편, 끊임없이 새로운 공사를 벌이려 한다.
이런 권력이 나라 안에서 공사 현장을 찾지 못하면, '애국심 충만한 바보'가 된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로 향할까. 소름끼치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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