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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대운하

[김규항 칼럼] 386에게 보내는 편지

이명박 씨는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가운데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대통령임에 틀림없다. 아이들은 광우병 소 문제가 불거지기 훨씬 전부터, 대통령 선거 운동이 시작될 무렵부터 이미 그를 '명바기'라 부르며 우스갯소리의 소재로 삼고 희화화했다. 아이들 몇을 붙들고 왜 그리 이명박 씨가 싫은지 물어본 적이 있다. 아이들의 표현은 다양했지만 '논리 이전의 혐오'라는 점에선 일치했다. 나는 아이들이 그들의 앞 세대는 가지지 못한 어떤 직관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지금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은 1993년생인데, 93년은 이른바 문민정부가 출발한 해다. 아이들은 민주화 이후에 나고 자란 첫 세대인 것이다.

그 아이들의 부모가 이른바 386들이다. 그들은 아이들과는 정반대의 환경에서 나고 자랐다. 군사 파시즘 치하에서 나고 자란 그들은 민주주의의 실제에 대해선 지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배우거나 익힐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비민주적인, 전근대적이고 집단주의적인 습속을 익히며 자라야 했다. 그럼에도 군사 파시즘의 폭압이 20대의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들의 비민주적인 습속이 그들이 일사불란한 대열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습속은 군사 파시즘이 물러난 이후 그들을 무력하게 했다. 현실 사회주의 나라들이 인민들에 의해 붕괴하자 그들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그 붕괴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했고 낙심과 자괴감에 빠졌다. 그들은 일제히 역사를 접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1990년대 이후, 30대가 된 그들은 두 가지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정치적 민주화에 대해선 여전히 단호하지만 사회경제적 민주화에 대해선 모호한 태도로 일관했다. 군사 파시즘과 싸워 물리쳤던 추억은 소중하게 간직하면서도 민주화 이후 도래한 거대한 자본화의 흐름엔 타협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속내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여전히 한국 사회의 전 세대를 통틀어 가장 지적이고 정의 지향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낳고 키운 아이들이 바로 촛불을 든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 역시 두 가지 모습을 가진다. 그들은 한국의 다른 모든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주체적인 개인이며, 권리 의식이 높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딱할 만큼 소비문화에 물들어 있고 삶에서 돈과 물질적인 가치를 우선시하는 자본의 감성을 보인다. 영화 <괴물>에서 송강호의 중학생 딸(고아성이 연기한)은 그 전형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 아이는 유행에 처진 휴대전화기를 아빠나 쓰라며 던져버리지만 동시에 부당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놀랍도록 주체적이다.
▲지난 5월 4일 서울 청계광장에 모인 10대들. 이 아이들은 한국 사회의 희망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프레시안

그 아이들이 오늘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싸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들을 보며 한국 사회의 희망을 느낀다고 말한다. 물론 감동적인 광경임에 틀림없지만 현재로선 희망은 딱 절반이다. 나머지 절반은 절망이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휴대전화기, 운동화, MP3 플레이어 따위에서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10대 마케팅'을 벌이는 자들에게 저주를!) 사회는 지구상에 없다.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장래희망이 없거나 이렇게 많은 아이들의 장래희망이 연예인(은 아이들에게 자유롭고 안락한 삶의 전형이다)인 사회도 지구상에 없다.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자정이 넘도록 학원을 돌며 경쟁 기계로 키워지는 사회도 지구상에 없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아이들은 이명박 씨가 없는, 그러나 사회경제적으로는 좀 더 사악해진 사회에서 충직한 자본의 신민으로 살아가게 될 거라는 불길한 예측을 피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이들이 가진 절반의 절망은 전적으로 후천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 아이들의 미래는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하며 환경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한국 사회의 미래는 다시 한 번 386에게 달려 있는 셈이다. 그들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물론 그들 상당수는 이명박을 싫어하고 대운하를 반대하며 광우병 소에 분노하며 촛불을 든 아이들을 폄훼하는 조·중·동을 욕한다. 그러나 이명박을 싫어하고 대운하를 반대하며 광우병 소에 분노하고 조·중·동을 욕하면 정말 이명박을 반대하는 걸까?

아이들이 분노하는 0교시 문제니 고교 서열화니 학교 자율화니 하는 문제들을 보자. 그 문제들은 이명박 씨가 시작한 게 아니다. 민주화 이후 좀 더 직접적으로는 IMF 사태 이후 한국 사회가 급격하게 신자유주의적 체제로 돌입하면서 시작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 문제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이미 기초를 쌓았고 이명박 정권에서 '노골화'했을 뿐이다. 그러니 그 노골화한 부분을 떼어내 반대하는 것으로 이명박 씨의 교육 정책을 반대한다고 말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문제의 핵심은 노골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하는 가치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오늘 좋든 싫든 제 아이를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대열에 참여시키고 있다면 '이명박의 노골성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명박 지지자'일 뿐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반대한다고 해서 이명박 씨와 다르다고 생각할 건 없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는 광우병이 염려되는 쇠고기를 국민에게 먹이려 한다는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방식 그리고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에 대한 입장의 문제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는 돈이 제일의 가치이고 경제적 효율이 어떤 가치보다 우선하는 신자유주의 가치관에서 나온 수많은 문제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다른 농축산물 수입 문제에 자유무역협정(FTA)에 이랜드 노동자 문제에 KTX 여성노동자 문제에 삼성노조운동 문제에 무심한 사람이 미국산 쇠고기를 반대한다고 해서 이명박 씨와 달라지는 건 아니다. 막말로 이명박 씨가 지금 야당 대표였다면 미국산 쇠고기를 찬성했을까?

한반도 대운하를 반대한다고 해서 다르다는 생각도 하지 말자. 오늘 한국의 양식 있는 사람들은 대개 대운하를 반대한다. 그러나 대운하를 반대하는 그들 대부분은 이미 제 안에 대운하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파괴적인 대운하를 건설하고 있다. 밤늦은 시간 한국의 도시마다 길게 늘어선 학원 버스들, 생기를 잃은 낯빛으로 그 버스에 실려 가는 아이들. 그게 대운하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그 대열에 제 아이를 '아이의 발전과 미래를 위해' 실어 보내는 사람이 대운하를 반대한다는 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우리는 지금 가치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돈의 가치관과 사람의 가치관. 돈과 경제적 효율을 우선하는 가치관과 느리더라도 사람과 자연을 우선하는 가치관, 국가의 총경제(는 실은 지배계급의 경제다)를 중요시하는 가치관과 인민들의 경제를 중요시하는 가치관의 전쟁이다. 돈의 가치관의 정점에 이명박 씨가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정점의 추한 외양에 거부감을 갖는다고 해서 우리가 사람의 가치관을 가지는 건 아니다. 아이들을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대열에 불편한 시늉으로라도 결국 동참하면서 이명박의 좀 더 노골적인 교육 정책엔 분노하는 모습, 제 안에 더 큰 대운하를 뚫어놓고선 이명박의 대운하는 반대하는 가련한 모습이 다라면 우리에게 아무런 희망은 없다.

한 호흡 멈추고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자. 올바르기 때문에 정의를 좇기 위해서 고통과 손해를 감수하자는 게 아니다. 진정 더 잘살기 위해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생각을 바꾸자는 것이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 따위 거짓말일랑 하지 말자. 다 내 욕망을 아이를 통해 구현하려는 것 아닌가? 행복이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실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신통한 아이들, 삼성이니 SK니 하는 장사꾼들의 붉은 깃발과 국가주의적 선동에 태극기를 두르고 광장을 채우던 20대와는 전혀 다른, 오히려 사회 현실을 고민하고 스스로 학습하고 연대하며 싸우던 부모 세대의 청년 시절의 모습을 빼다 박은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 씨가 <프레시안>에 오랜만에 시사 칼럼을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은 2주 간격으로 김규항 씨의 칼럼을 만날 수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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