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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장애인 복지 수준은 아직도 한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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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입춘? 장애인 복지 수준은 아직도 한겨울"

[현장] 비리 끊이지 않는 장애인 시설, 책임은?

"미치겠네…."

장애인콜택시를 기다리던 한규선 씨가 초조한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벌써 1시간째. 전화를 건 장애인콜택시 상담원은 "지금까지 기다리신 만큼 더 기다리셔야 해요"라는 말을 전했다.

경기도 김포시에 위치한 장애인 시설 석암베데스다요양원(석암요양원)에서 생활하는 한규선 씨는 지난 4일 서울 혜화동 오세훈 서울시장 공관 앞에서 열리는 기자회견에 참석하고자 외출했다. 꼬박 2년 넘게 풀리지 않고 있는 장애인 시설 비리, 성람재단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열린 기자회견이었다. 석암재단 비리 이사진 교체를 주장하고 있는 그는 비록 재단은 다르지만 같은 문제에 봉착해 있는 성람재단 장애인 시설 문제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뇌성마비 1급 장애를 갖고 있는 한 씨에게 기자회견 참석은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전동휠체어는 예전보다 이동을 훨씬 편하게 해줬지만 환승이 가능한 지하철역, 저상버스 등을 따지다보면 들어가는 시간과 돈은 배를 넘기기 일쑤다. 장애로 인해 발음을 제대로 하기 힘든 그는 장애인콜택시 한 대를 부를 때도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날도 그는 밤 9시에 끊기는 저상버스 막차 시간에 맞추기 위해 기자회견이 끝난 직후 길을 나섰지만 결국 요양원까지 가는 택시를 타야 했다.

그래도 그는 "괜찮다"고 했다. 오히려 일찍 돌아가야 한다며 촛불문화제에 참석하지 못하고 나온 것을 아쉬워 했다. 정보를 미리 입수한 경찰이 막아선 탓에 시장 공관에서는 100m도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이었지만, 외진 골목에 불어오는 삭풍이 말하는 입까지 얼게 만드는 추운 날씨였지만, 그는 마이크를 잡고 "인권변호사 출신이라는 오 시장이 왜 비리 재단의 농간에 속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시설 생활인 최초로 재단 비리를 고발하다
▲ 한규선 씨. ⓒ프레시안

한규선 씨는 장애인시설에서 생활하는 이들 중 최초로 시설을 운영하는 재단의 비리와 인권 침해를 고발한 장애인이었다. 그의 요구는 한마디로 "비리를 저지른 이사진은 전원 퇴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씨가 이 같은 비리를 알게 된 것은 지난해 3월 경. 서울시가 그가 생활하는 석암요양원을 비롯해 석암재단 산하 3개의 복지시설 등에 대해 감사에 들어간 즈음이었다. 감사 결과 석암재단은 국가가 장애인 개인에게 지급하는 장애수당을 시설 내에서 쓰일 공기청정기를 구입하기 위해 사용했던 점이 드러났다. 또 이 과정에서 회계서류를 허위로 작성해 횡령한 사실도 밝혀졌다. 서울시는 석암재단이 모두 1억700만 원의 장애수당을 부적절하게 집행했다고 지적했으며 관할청인 양천구청은 이를 환수조치 했다.

한규선 씨는 "당시 재단 측은 감사를 피하려 거짓말을 하려 했다"며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그는 인터넷을 통해 자문을 받을 만한 시민단체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한 씨가 결정적으로 행동에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던 계기는 지난 10월 경 요양원 이전 소식을 접하면서부터였다. 그가 보기에 이 같은 결정은 생활인들의 이동권을 무시한 처사였다.

이전 부지는 지금 요양원이 있는 곳보다 훨씬 교통도 불편하고 인적도 드문 외지였다. 현재 요양원에서는 1시간에 1대 씩 있는 저상버스나 전동휠체어를 이용해 시내로 나갈 수 있지만, 그곳은 일반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는 데만 휠체어로 30분이 걸렸다. 더군다나 이전 부지는 재단 법인의 땅이 아닌 이사장과 특별한 관계라고 알려진 개인의 땅이었다.

이들이 더 심각하다고 느낀 점은 요양원 측이 생활인을 상대로 이전에 대해 제대로된 설명도 하지 않은채 찬성 서명을 받으려 했다는 것이었다. 한 씨는 120여 명의 생활인 가운데 지적 능력이 있는 20명을 상대로 이전 반대 서명을 받았다. 한 씨는 "그런데 요양원 측에서는 반대 서명서를 빼앗아 폐기처분하고 심지어 이전을 반대하는 생활인의 손을 강제로 끌어 찬성 서명을 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기관들은 서로 책임 떠넘기고…결국 1인 시위에 나서다

한 씨는 장애인단체에게 이같은 사실을 알려나갔다. 요양원 이전을 막아줄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청와대, 국무총리 비서실, 행정자치부, 보건복지부, 국가인권위원회, 서울시 등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만 '조사해보겠다'는 의견을 밝혔을 뿐 다른 기관들은 모두 재단 관할청인 양천구청에 일을 넘겼고 구청은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결국 지난 1월 8일 한 씨는 양천구청 앞에서 1인 시위에 돌입했다. 황인현 씨 등 다른 몇 명의 생활인도 이에 동참했다. 장애인단체들은 '석암재단 비리 척결과 인권 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이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이처럼 생활인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자 재단 측은 1인 시위 하루 만에 이전을 철회하겠다고 밝혔다. 또 재단은 생활인들의 요구사항인 △장애인수당 당사자에게 직접 지급 △외출 완전보장 △직원 대상 인권교육 의무화 △생활인 대상 자립생활 교육 실시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양천구청도 지난 1월 15일 한규선 씨, 공대위 등과 면담을 갖고 노력해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장애인의 정당한 권리 누리자는 것, 그거 하나다"
▲ 장애인단체들은 장애인시설 비리가 끊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관리·감독 책임을 맡은 서울시나 관할구청이 제대로 된 역할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프레시안

그러나 한 씨를 비롯해 석암요양원 생활인들은 1인 시위를 그치지 않고 있다. 이들은 요양원 이전 문제를 떠나 요양원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이 인권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원인은 재단 자체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20년 간 석암요양원에서 살아온 한 씨가 지금처럼 외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약 1년 전부터였다. 요양원 측에서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며 장애인들의 외출을 사실상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또 몇 년전까지만 해도 난방도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전기장판 사용도 제한을 받았다고 했다.

매달 국가에서 지급하는 10만 원 가량의 장애수당을 직접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것 또한 최근이었다. 재단 측이 이를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지원하는 피복비가 있음에도 매번 똑같은 옷만 입는 것 역시 이해되지 않는 점이었다. 한 씨는 "장애인 시설은 국가에서 100% 지원금을 받아 운영되는 복지시설"이라며 "이런 조치들은 재단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장애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한 씨와 공대위 측은 "이미 지난해 서울시 감사 결과 재단의 비리 사실이 드러났다"며 서울시와 양천구청이 즉각 시설관리를 책임지는 법인을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사회복지법에 따르면 회계부정이나 불법행위 기타 부당행위 등이 발견된 때는 그 시설의 개선, 사업의 정지, 시설의 장의 교체를 명하거나, 시설의 폐쇄를 명할 수 있다"며 법적 근거도 이미 나와 있다고 주장했다.

한규선 씨는 이 같은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1인 시위를 계속 하겠다고 밝혔다. 김포 요양원에서 양천구청까지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2시간. 저상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에 내려 또 2번의 환승을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도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를 움직이는 힘은 다름이 아니었다.

"내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이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이제는 시설 생활인들도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남들이 해주질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이 입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이 춥습니다. 이런 날, 난방이 제대로 안 되는 장애인시설은 10배는 더 춥습니다. 그런데 서울시와 비리 재단이 우리의 마음까지도 춥게 만드네요. 우리는 철원시설에 새봄이 오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장애로 인해 한 마디 한 마디 어렵게 말을 이어나가는 한국사회당 장애인위원회 박정혁 위원장의 목소리가 골목에 울려퍼졌다. 그는 "왜 우리가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도 "서울시는 지금이라도 제 동료들을 위해 결단을 내려 주길 바란다"며 당부했다.

4일 오후 서울시장 공관 인근에서 이뤄진 '성람재단 비리척결과 사회복지사업법 전면개정을 위한 공동투쟁단' 기자회견에 참석한 50여 명의 활동가 및 성람재단 노조원들 역시 간절한 표정으로 발언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다. 벌써 3년째 이어지는 '투쟁'에 답답하기는 한결같은 마음이었다.

"운영비 쥐어주며 나가라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

지난 2006년 10월 서울시는 성람재단으로부터 강원도 철원 지역 세 개 시설을 기부채납 받기로 결정했다. 1개 시설에서 27억 원의 횡령 혐의가 밝혀지는 등 비리 행위로 기소된 조태영 전 이사장을 비롯해 성람재단 임원들의 비리가 법원에서 속속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서울시의회는 지난해 7월 이를 승인했다.

그러나 정작 지난해 8월 2심 재판에서 조 이사장이 기부채납을 이유로 감형을 받자 재단 측은 채납을 미루고 있다. 오히려 비리와 연관된 이들을 포함해 100% 고용을 승계할 것을 요구하며 기부채납을 약속한 일부 땅은 채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상황이다.

서울시는 이 같은 요구가 부당하기는 하지만 마땅한 법적인 제재 조치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런 와중에 2007년 한 해 동안 성람재단이 운영하는 복지시설에 지불된 국고지원금은 114억 원에 달했다.
▲ ⓒ프레시안

공동투쟁단 측은 "서울시가 국민들에게 사기를 친 성람재단에게 계속 시설운영비를 쥐어주며 나가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성람재단이 시설운영비를 계속 지원받는 한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따라서 우리는 서울시가 성람재단에게 철원지역 시설에 대한 운영비를 지급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며 "또 성람재단에 대한 법인승인 취소 및 성람재단이 위탁운영하고 있는 복지관 또한 즉각 위탁운영을 정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용기 공동투쟁단 대표는 "대체 국가가 어떻게 하길래 '시설 비리'라는 똑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이런 와중에 국민들의 세금은 계속해서 비리를 저지른 시설장의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정혁 위원장은 "재단은 시설을 주겠다고 해놓고 안 주고, 오세훈 시장은 받겠다고 해놓고 받지도 못하는 있고,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시나 경찰이나, 참 쓸데없는 데다 공권력 씁니다"

한편 면담을 신청한 지 6개월이 지나도 답이 없던 오세훈 시장을 직접 만나 의견을 전달하겠다던 이들은 결국 '시장 공관' 건물은 보지도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보다 훨씬 앞서 도착한 경찰이 공관 전방 100m 앞에서부터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 시장은 지난 1일 유럽 순방을 위해 출국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경찰은 1박 2일로 예정됐던 노숙농성을 금지하며 막무가내로 해산하지 않으면 연행하겠다고 경고했다. 결국 참가자들은 오후 8시경 촛불문화제를 끝으로 농성을 마무리해야 했다. 이들은 방패와 철모로 무장한 채 버티고 있는 전경 부대 앞에서 '그럴 줄 알았다'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시나, 경찰이나, 우리나라 정부는 공권력을 참 쓸데없는 데 씁니다. 비리를 저지른 재단 이사장이 기부하겠다고 밝힌 시설 하나 되찾아오지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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