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태국 국경지대의 '버마 난민촌'
이런 와중에 나는 참 특별한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를 가지게 됐다. ABSDF라고 하는 버마 학생운동그룹의 몇몇 회원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들을 만난 곳은 한국도, 버마도 아니고 버마-태국 국경지대의 작은 시골도시, '버마 난민촌'이라고 불려지는 곳에서였다.
ABSDF는 전버마학생민주전선(All Burma Students' Democratic Front)의 약칭이다. 1988년의 8888시위(1988년 8월 8일을 전후하여 전국민적으로 저항하였던 민중시위, 한국의 6.10항쟁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합친 성격의 저항)가 실패한 이후 2만여명에 달하는 학생운동가를 포함한 지식인들이 버마 군부의 대대적인 탄압을 피해 버마를 빠져나왔다.
이들 중 학생운동가 집단은 전버마학생민주전선을 결성하고 대정부투쟁에 투신했다. 그리고 투쟁방식으로 무장투쟁방식을 택했다. 당시 버마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 이들의 투쟁방식을 지나치게 과격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여튼 이들은 책 대신 총을 들었고, 그래서 '맨발의 학생군'으로 불려졌다.
이제 중년이 된 '맨발의 학생군', 스스로 교사와 의사가 돼 아이들을 키운다
그러나 금방 이루어질 것 같았던 조국의 민주화는 쉬 오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이흐르면서 새파랗던 청춘들은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중년이 되었다.
그 사이 일부는 결혼을 했고, 자녀도 가졌다. 그러나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은 버마와 인접국의 국경지대를 따라 형성된 버마난민촌에 집단으로 기거하면서 여전히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여러 모로 투쟁하고 있다.
그러면서 버마를 떠나온 지 오래되고 가족들이 형성되면서 이들 학생운동가들은 버마의 미래세대를 양육해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모든 것이 열악한 난민촌에서 학교를 세우고, 자신들이 교사가 되어 아동들을 공부시키기 시작했다.
더불어 충분한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해 말라리아를 비롯한 각종 질병과 전염병들로부터 버마의 미래를 지켜내기 위해 보건의료활동에 특별히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난민촌의 버마인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버마 군부의 탄압을 피해 깊은 숲속으로 숨어들어서 고립되어 살아가고 있는 정글 속의 버마인들을 위해서 의약품이 든 배낭을 지고 정글 속을 누비고 있다. 자신들이 직접 의료인과 교사가 되어서.
어두운 대나무 교실, 장난감 하나 없는 유아원
이렇게 어느 버마 민주화운동 조직들보다 조직적이고 헌신적으로 버마의 미래를 위해 활동하는 조직이 이들이지만, 그러나 한때 총을 들어 군부독재와 싸웠다는 것 때문에 해외 민간단체의 지원에서 다른 버마의 민주화 운동단체들에 비해 그리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이번 방문에서는 열악한 재정상황에서도 ABSDF가 버마의 미래를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ABSDF가 세운 초중등학교(학생수가 415명이었다)는 비록 전등도 없어 어둡고 칸막이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옆 교실의 수업내용이 다 들려오는, 대나무와 나뭇잎으로 지은 학교였지만 각 교실마다 흘러나오는 아동들의 소리를 낭랑했다. 이 학교는 한국의 어떤 치과의사들의 후원으로 어느 정도 물품들이 조달되면서 유지되고 있었다.
학령기 전의 아동들의 교육여건은 더더욱 형편없었다. 명색이 유아원인데 아이들의 장난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저녁 6시 30분~9시 30분까지만 들어오는 전기사정 때문에 TV나 비디오 시청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학령기 아동들이나 학령기 전 아동들이나 교육교재나 부교재를 찾는 것은 사치에 속하는 것 같았다.
"운동가의 자녀를 돌보기 위해" 세워진 한국 최초의 탁아소
그 유아원에서 ABSDF 회원들의 부인들과 아이들을 만났다. 남편은 정글 속을 헤쳐 가는 배낭의료팀으로 보내고 그 부인과 아이는 열악한 난민촌 생활을 견디고 있었다. 장난감 하나 없던 난민촌 유아원에서 만난 ABSDF 회원들의 여성배우자들과 아이들을 보니 까맣게 잊었던 옛날이 떠올랐다.
지금부터 22년전인 1985년, 한국에 최초의 탁아소가 만들어졌었다. '인간의 대지'라는 독일 재단의 지원을 받아 개원한 이 탁아소는, 그 설립 목적 자체가 '운동가들의 자녀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대학원 2학기째인 내 아이도 생후 18개월이었을 때 두 번째로 이 탁아소에 입소했었다.
이 탁아소 이용자들은 청년운동가-노동운동가-시민운동가-교육운동가들이나 그 배우자들이었다. 운동가 남편을 둔 덕에 돈은 없고,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아이 맡길 데도 없고,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운동가나 운동가 가족들만이 겪는 고충을 털어놓을 수도 위로받을 수도 없었던 우리들은, 그렇게 서로서로를 보면서 힘든 시기를 버텨낼 수 있었다.
여성이 글을 알아야, 버마의 미래가 열린다
그런데 이 난민촌의 ABSDF회원들은 서로를 격려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더욱 적극적으로 버마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문맹에 가까운 여성들에 대한 교육이었다.
ABSDF에는 여성 리더들이 있는데, 이들이 교사가 되어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버마를 빠져나온 여성들을 위하여 기본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프로그램과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말이 도서관이지 책 수십 권이 한쪽 구석에 쌓여있을 뿐이었고, 지구상에서 버마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가르쳐야 하는 정도로 지식수준이 낮은 여성들을 위한 교육교재나 기자재도 없었다.
그래도 참여여성들의 열성은 매우 높다고 한다. 프로그램을 시행한지 5년이 되어 프로그램 자체는 안정적이지만 외부의 지원은 그리 많지 않아 힘겹게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이 초라한 도서관 겸 교육장을 보니, 한국의 깔끔하고 반짝이는 기자재들이 갖춰진 교육장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아무리 서로의 상황이 다르고 한국의 민주화운동권은 이미 거쳐온 과정이라고 해도 가슴 한켠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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