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의혹은 정·관계 인사들 로비와 이를 위한 비자금이 조성됐다는 점에서 2005년 일부 공개됐던 X파일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애초 김용철 변호사가 양심선언을 했을 때 많은 이들이 X파일 사건을 떠올린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검찰은 수개월에 걸친 수사에도 불구하고 불법 도청된 자료를 수사의 근거로 삼지 않겠다며 삼성 경영진의 증언에 따라 이들을 무혐의 처리했다. 검찰은 '삼성을 비껴갔다'는 따가운 비판을 받았지만 이후 X파일은 별다른 문제제기가 이어지지 않은 채 가라앉았다.
이번엔 어떨까? 사건을 지켜보는 많은 이들은 "이렇게 가다가는 양심선언이 X파일의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사건의 향방을 좌우하는 삼성, 검찰, 그리고 언론의 행보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삼성 "폭로하는 사람이 문제'
우선 주목할 부분은 의혹을 제기하는 이에 대한 삼성의 반응이다.
지난 5일 삼성은 김용철 변호사에 대한 반박문을 냈다. 삼성은 "김 변호사가 삼성을 공격하는 동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며 김 변호사의 양심선언은 '비정상적 행동'으로 치부했다. 또 "(김 변호사의 처가 보낸) 편지를 보면 그 자체로 김 변호사 부부가 어떤 인물이며, 어떤 심리상태에서 무엇을 주장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며 양심선언이 김 변호사의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X파일 당시 삼성은 MBC가 방송을 결정하자 곧바로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이 신청서에서 삼성은 X파일 보도가 "국민의 '알 권리'와는 무관하다"며 "단지 불법도청된 녹음 테이프를 이용한 선정적 보도를 통해 MBC와 이를 취재한 이상호 기자 개인의 공명심을 충족시키고, 그 대가로 신청인들이 수 십년 쌓아온 사회적 명성과 가장으로서의 개인적 명예를 훼손하는 처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X파일 보도가 취재 기자의 개인적인 동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삼성 "물의를 빚은 건 송구하지만…"
의혹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자 해명보다는 '사회적 논란'에 대한 유감 표명 정도로 넘어가려는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5일 배포한 반박문에서 삼성은 "삼성 임원으로 재직했던 김용철 변호사의 문제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국민 여러분과 국가 기관에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물의'를 일으킨 것은 유감이라고 밝혔지만 같은 자료에서 삼성은 김 변호사가 폭로한 의혹에 대해 전면 부인했다.
2005년 X파일 당시에도 삼성은 MBC와 KBS 등을 통해 X파일의 내용이 알려지고 참여연대의 고발, 검찰 수사 착수가 잇따르자 '사과문'을 발표한다.
그러나 삼성은 "국가기관의 불법적인 도청테이프와 시중에 유포되고 있는 녹취록 문건을 근거로 한 최근의 언론보도 사태에 대해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사회적 물의를 빚은 데 대해 사과한다"고 밝혔을 뿐 X파일에서 드러난 로비 의혹에 대해서는 일체 해명하지 않았다.
변호사들도…"삼성 잘못 얘기한 죄가 더 커"
'삼성 의혹'에 유독 예민하고 신속하게 반응하는 변호사들의 행보에도 닮은 점이 많다.
지난 7일 대한변호사협회(변협) 이사회가 김용철 변호사에 대해 의뢰인의 비밀 준수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검토한 사실이 알려졌다.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구조본 법무팀장을 맡았을 때 변호사 신분을 유지했던 점 등을 들어 삼성과 김 변호사의 관계는 고용주와 피고용인 관계가 아닌 의뢰인과 변호사의 관계로 봐야 하며, 김 변호사의 폭로는 '변호사의 비밀 준수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X파일 당시 변협의 지방회 중 하나인 '서울지방변호사회'는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던 가운데 이상호 기자 등이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했다며 검찰에 수사촉구 진정서를 제출했다. 또 당시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X파일 보도에 대해 법률자문이 들어오면 '도청의 불법성'을 강조하라"는 압력이 로펌의 대표변호사 등을 통해 들어왔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소 '쌍방 대리' 등 본인들의 고질적인 문제에 침묵하는 변호사들이 유독 삼성에 대해서는 발빠른 대응에 나서는 까닭에 대해 일각에서는 "대상이 다름아닌 '삼성'이기 때문 아니냐"는 비판이 거세다. 특히 최근 변협의 징계 논의는 이번 사건이 사내변호사 시장의 위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 아니냐는 관측이 잇따르고 있다.
삼성만 만나면…거북이가 되는 검찰
'삼성'을 대할 때는 유독 느려지는 검찰의 반응 역시 '닮은 꼴 행보'다.
지난 8일 검찰은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이 발표된 뒤 열흘이 지나서야 수사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그것도 검찰 스스로 "고소고발이 있어야만 수사에 착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힘에 따라 참여연대와 민변이 고발장을 접수했기 때문에 이뤄진 조처였다. 현재도 검찰은 "뇌물을 받은 이들의 명단이 있어야만 수사에 착수할 수 있다"며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2005년에도 검찰은 MBC, KBS를 비롯해 각종 언론을 통해 X파일이 본격적으로 공개된 뒤에도 "자료 자체가 도청된 자료로 불법이기 때문에 수사가 곤란하다"는 입장을 표명했었다. 당시 검찰은 이후 참여연대의 고발이 뒤따르자 그제서야 수사에 착수했다.
이 같은 검찰의 대응은 고소고발 없이도 수사가 이뤄졌던 지난해 현대자동차 로비 사건와 비교해 봤을 때 명백한 대조를 이룬다.
"소심한 경마식 보도만 일삼는 언론…여론화 안 되는 가장 큰 이유"
언론 역시 삼성 의혹에 관해선 '소극적인 보도 양상'을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에 대한 삼성의 해명이 발표되자 대부분의 언론은 이 둘을 나란히 보도하면서 사안을 당사자들 간의 '진실게임' 양상으로 몰아갔다. 김 변호사가 '뇌물 리스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보도의 주요초점은 '리스트 공개 여부'에 맞춰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김용철 변호사는 지난 6일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왜 나에게만 전부 말하기를 요구하나"라며 언론을 질책했다. 한국 최대 재벌인 삼성의 비리 의혹에 대해 적극적으로 탐사 보도를 하는 것이 언론의 의무가 아니냐는 것이다.
MBC 이상호 기자 역시 X파일이 사회적 여론화를 이루지 못한 채 지나갔던 것에는 언론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지적했다. 이 기자는 지난 8일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언론은 삼성에 관한 기사를 경마식 보도로만 일삼고 있다"며 "그러니까 말이 멈추면 기사도 나오지 않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그는 "신정아 씨 사건 같은 경우 집 주소를 추적하고 심지어 누드 사진까지 입수하는 '취재력'을 보였던 언론이 삼성에 대해서만은 당사자들의 입장만 중계식으로 보도하는 이해할 수 없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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