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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20년 전기공 故 정해진 씨가 분신하기까지…

법에 보장된 '단체협약 체결'을 못해 목숨 끊은 노동자

고압전류가 흐르는 전봇대와 철탑을 20년 간 오르내리며 감전과 추락의 위험 속에 하루 하루를 살았던 전기원 노동자 정해진(48). 그가 27일 몸에 신나를 끼얹고 불을 붙여 분신했고 분신 7시간 여 만에 끝내 사망했다.

전국건설노조 인천건설지부 전기분과 조합원이었던 정해진 씨가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인 것은 파업 중인 노조의 집회 현장에서였다. 유서도 남기지 않았지만 분신 당시 그가 외친 구호 "인천 전기원 파업은 정당하다", "유해성((주)대진건설 대표, 인천지역 협력업체 모임의 대표)을 구속하라"를 통해 그가 분신한 배경을 어렴풋이 짐작해볼수 있다.

파업 132일, 그의 오랜 일터였던 인천의 전기공사업체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오랜 파업, 목표는 '너무나 당연한' 단체협약 체결
▲ 고압전류가 흐르는 전봇대와 철탑을 20년 간 오르내리며 감전과 추락의 위험 속에 하루 하루를 살았던 전기원 노동자 정해진(48). 그가 27일 몸에 신나를 끼얹고 불을 붙여 분신했고 분신 7시간 여 만에 끝내 사망했다.ⓒ프레시안

정 씨가 속한 건설노조 전기분과는 지난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전기분과는 한국전력공사(한전) 인천사업본부로부터 수주 받아 배전 업무를 하는 협력업체 소속 노동자들로 구성돼 있다.

지난 6월 19일 시작해 어느덧 130일을 넘긴 파업의 목표는 정말 단순했다. 단체협약 체결이었다. 단체협약의 내용으로 노조는 △주 44시간 노동 △토요 격주 휴무 보장 등의 근로조건 개선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그를 위해 노조는 협력업체 대표들과 함께 지난 2월 28일 1차 교섭을 시작점으로 2월부터 5월까지 총 10차례에 걸쳐 교섭을 진행했다. 하지만 노사는 합의점을 찾지 못해 노조는 지난 6월 7일 지방노동위원회에 조정 신청을 냈지만 협력업체 13개 업체 가운데 2개 업체가 지노위의 조정안을 거부해 조정은 중지됐다.

결국 노조는 88%의 찬성률로 총파업을 결정하고 오랜 싸움을 시작하게 된 것. 총파업 중에도 노조는 사측 대표인 유해성 대표와 몇 차례 면담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팽팽한 대립 뿐이었다.

노조 관계자는 "사측 대표인 유해성 사장이 기본적으로 노조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제일 큰 문제"라고 말했다. 노조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지난해에도 단협을 체결하기 위해 싸웠지만 "협력업체들로부터 단협 체결권을 위임받은 유해성 사장이 끝내 거부해 실패했다"는 것.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사측은 불성실한 태도로 교섭에 임했다고 노조는 주장했다. 노조 관계자는 "파업 이후에도 교섭에 대한 의지를 보이기는 커녕 파업 참가 조합원들에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 및 가압류를 내세워 협박만 일삼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이 관계자는 "유해성 사장은 인천지역 전기공사업체 사용자 모임인 인우회의 대표로 다른 회사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며 "노조의 합법적인 단체교섭 요구에 성실히 임하고 다른 업체들의 참여도 독려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교섭을 회피하고 노조를 적대시함으로써 노조가 장기파업으로 갈 수밖에 없도록 몰고간 장본인"이라고 비난했다.

숨진 정 씨가 분신 당시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가운데서도 끝없이 "유해성을 구속하라"고 외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 28일 오전 정 씨의 유해가 안치된 서울 영등포구 한강성심병원에서 열린 추모 집회에서 분향하고 있는 한 건설 노동자. ⓒ프레시안

외롭고 길었던 싸움, 쓸쓸이 지켰던 농성장

정 씨가 분신한 날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에서 '투쟁사업장 대표발언자'로 무대 위에 오른 최영호 뉴코아노조 조합원은 이렇게 말했다.

"무대로 나오긴 했지만 왜 우리만 대표사업장인지 모르겠다. 850만 이 땅의 비정규직 모두가 대표 아닌가. 오늘 분신하신 분(정해진 씨)도 우리 뉴코아노조와 비슷한 시기에 파업을 시작했더라. 그런데 사람들은 뉴코아·이랜드는 알아도 인천건설지부 전기분과의 파업 얘기는 아무도 몰랐다."

정말이었다. 6월 19일 시작한 총파업은 어느덧 한 계절을 지났고 또 다른 계절이 다가오고 있지만 언론과 사회의 철저한 외면 속에 이들의 파업은 외로이 이어지고 있었다.

언론 뿐 아니라 발주처인 한전 역시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는 입장만 반복했다. 전력사업의 기본인 배전현장의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는 전기원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문제를 한전은 법적 책임이 없다는 이유로 철저히 외면한 것이다.

이들의 외로운 싸움에 노동부 역시 무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공사가 중단된 현장이 늘어나자 한전 측이 직접 현장을 지휘·감독하면서 공사를 강행했지만 노동부는 이 같은 부당노동행위의 관리감독에 소흘 했다.

노동조합으로서 당연한 권리인 단체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이토록 긴 싸움을 하는 동안 정 씨는 "이 땅을 정말 떠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고 동료들이 전했다. 동료들이 모두 오랜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추석 연휴에도 인천지부장과 단 둘이 천막 농성장을 지켰던 정 씨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소박한 요구조차 이뤄지지 않는" 답답한 현실과 지독한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기필코 단체협약 체결하자"남은 이들의 바람

정 씨가 세상을 떠난 이튿날인 28일 오전 10시 정 씨의 유해가 안치된 서울 영등포구 한강성심병원 앞에서는 작은 추모제가 열렸다. 이석행 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노총 임원들 몇 명과 민주노동당 관계자 소수, 그리고 정 씨와 같은 건설 노동자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 추모제에서 남은 이들은 "열사의 뜻을 반드시 이어받아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조병규 건설노조 인천지부장은 "이렇게 한 생명을 버려가면서까지 해야하는 투쟁이라면 아예 시작조차 하지 말았어야 했나하는 생각마저 든다"며 "가슴이 무너지지만 끝까지 싸워서 반드시 열사의 염원을 이뤄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도 "위원장으로 취임한 뒤 지난 8개 월 동안 세 분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호소하고 이 땅을 떠나갔다"며 "한 분 한 분 돌아가실 때마다 심장이 떨리고 가슴이 저려 와서 어떻게 돌파해야 하나 생각하지만 답은 하나 뿐이다. 개별적으로 싸우지 말고 민주노총으로 힘을 모아서 세상을 한 번 뒤집어 보자"고 호소했다.

향후 장례절차 등과 관련해서는 민주노총을 비롯한 건설노조 관계자들과 유족들이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동료들이 모두 오랜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추석 연휴에도 인천지부장과 단 둘이 천막 농성장을 지켰던 정 씨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소박한 요구조차 이뤄지지 않는" 답답한 현실과 지독한 외로움이 아니었을까.ⓒ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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