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선진국 핀란드, 경쟁 대신 협력 강조
이런 생각은 과연 옳은가?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더 나은 교육'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많은 이들이 동의할 수 있는 방법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평가 척도를 적용하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국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관하는 '학업성취도 국제비교'(PISA)다. PISA에서 1위를 차지한 나라라면 한국보다 '더 나은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게다.
지금까지 세 차례(2000년, 2003년, 2006년) 치러진 PISA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한 나라가 핀란드다. '더 나은 교육'을 하고 있는 핀란드에서는 과연 '보다 치열한 경쟁'이 이뤄지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지난 18일 방한한 피터 존슨 핀란드 교장협의회 회장(토르킨마키 학교 교장)은 "경쟁은 교육에 해롭다"라고 단언했다.
핀란드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교육선진국이 된 것은 경쟁이 아닌 협력을 강화한 결과라는 것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참교육을 위한 학부모회 등 20여 교육·시민단체들로 구성된 '교육복지실현 국민운동본부'가 18일 마련한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해 핀란드 교육의 특징에 대해 발표한 그를 19일 오후 국회도서관 지하 회의실에서 만났다.
말이 안 통한 이유? "직업, 직장에 따른 차이가 적으니까…."
하지만 피터 존슨 교장과의 대화는 쉽지 않았다.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영어 교사가 통역을 맡았는데, 그는 인터뷰 내내 '한국 실정과 너무 달라서 통역이 쉽지 않다'는 말을 거듭했다. 존슨 교장에게 기자의 질문 내용을 이해시키는 게 어렵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기자가 "한국에서는 똑똑한 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공장의 생산직 노동자가 되겠다고 하면 부모가 기를 쓰고 말린다"라고 이야기하자, 존슨 교장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이런 내용을 통역이 자세히 풀어서 전한 뒤에야 존슨 교장은 "이해할 수 없다. 기술자는 늘 부족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항상 귀한 대접을 받는다. 게다가 월급도 많이 받지 않는가. 그리고 자식의 진로 결정에 대해 부모가 왜 간섭하는가"라고 말했다.
이어 통역이 "한국 고등학생들 사이에서는 의과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면 수입이 많기 때문이다. 부모들도 이를 권한다"라는 말을 덧붙이자, 존슨 교장은 "의사는 스트레스가 심한 직업인데, (한국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라면 차라리 교사가 되는 게 낫지 않나"라고 되물었다.
결국 대화를 지켜보던 안승문 스웨덴 웁살라대학 객원연구원이 끼어들었다. 교사 출신으로 오랫동안 교육운동을 하다 서울시 교육위원을 지내기도 했던 안 연구원은 지난해부터 웁살라 대학에서 스웨덴,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의 교육제도를 비교 연구하고 있다. 안 연구원 역시 18일 심포지엄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
안 연구원은 핀란드에서는 직업 간 소득 격차가 한국보다 현저히 낮다는 점, 그리고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차별을 겪는 일은 거의 없으며, 고교 졸업 후 직장에 다니다 대학 교육의 필요를 느낄 때 대학에 입학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 등을 덧붙였다. 이런 차이를 염두에 둬야만 존슨 교장과의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핀란드에서 이뤄지는 '더 나은 교육'은 제도의 차이만이 아닌 사회적 평등이 낳은 결과라는 뜻이기도 하다.
"소수 엘리트만 분리하여 가르치려는 발상은 잘못"
직업과 직장에 따라, 또 정규직, 비정규직 등 고용조건에 따라 소득과 고용 안정성, 노동조건, 사회적 평판 등에서 큰 차이가 빚어지는 한국과 달리 이런 차이가 적은 사회에서는 수입이나 고용 안정성이 높은 직업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적성에 맞지 않는 학과에 억지로 입학하려는 현상을 이해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
또 비슷한 능력을 갖고 비슷한 일을 하면 대체로 비슷한 보상이 돌아오는 사회에서는 굳이 학벌을 통해 스스로를 구별 지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 따라서 굳이 유명 대학을 고집할 필요도 적다.
그래서 한국의 치열한 입시 경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종종 대화가 겉돌았다. 사회 문화적 조건이 너무 달랐기 때문.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겉돌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차이를 넘어 통할 수 있는 원칙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존슨 교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소수 엘리트만을 분리하여 가르치려는 발상은 잘못이다. 다양한 능력을 가진 학생이 함께 모여 배울 때, 진정한 교육이 가능하다. 학교 안에 다양성이 깃들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통하는 원칙이다"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획일적인 기준으로 걸러진 균질한 학생들로 채워진 학교들을 입학 기준의 높낮이에 따라 줄 세우는 방식을 '학교의 다양화'라 부르며 옹호하는 이들과 달리, 평준화된 학교 안에 다양한 학생들이 모이게끔 해야 한다는 존슨 교장의 신념은 견고해 보였다. 18, 19일 존슨 교장과 나눈 이야기를 간추려 정리했다.
"다양한 학생과 어울리는 법 배우는 곳이 학교다"
- 한국에서는 '고교 평준화' 정책의 지속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따로 모아 가르치는 방식에 대해 어떻게 보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따라서 학교에서 다양한 학생들과 어울려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우수한 학생끼리만 어울리게 한다면, 그것은 교육이 아니다.
또 우수한 학생들이 빠져나가면, 나머지 학생들이 모인 학교는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특정 부류의 학생들을 분리해서는 학교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다."
- 한국에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따로 모아 가르치는 방식'을 학교의 다양화라는 명분으로 옹호하는 이들이 있다.
"다양성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하지만 그것은 '학교의 다양화'가 아닌 '학습의 다양화'로 구현돼야 한다.
핀란드에서는 학생들의 능력과 적성, 흥미에 따라 다양한 학습 경로가 제시된다.
각기 다른 학습 경로를 따르는 학생들이 같은 학교에서 어울리기 때문에 교육 효과는 더욱 커진다."
'학교의 다양화'가 아니라 '학습의 다양화'를 추구한다
- 학교 간 서열화 현상을 낳을 수 있는 '학교의 다양화' 대신 평준화 체제를 유지하면서 '학습의 다양화'를 추구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다양성을 명분으로 평준화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은 한국 상황에 비춰볼 때, 시사점이 많다.
"정부가 교육과정 편성에 대한 권한을 교사들에게 이양하는 게 관건이다. 핀란드에서는 교사들이 자율적으로 교육과정을 편성한다. 그래서 교사들이 직접 학생들의 수준을 파악하여 다양한 교육과정을 제시한다. 같은 과목이라도, 학생의 관심과 능력에 따라 다른 과정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평준화 체제 안에서도 충분히 다양성을 구현할 수 있다.
이처럼 교사가 자율적으로 다양한 교육과정을 편성하게 된 것은 1970년대부터다. 2차 대전 직후부터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토론을 거친 끝에 내려진 결론이라서,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함부로 바꾸기 어렵다.
교사가 자율적으로 교육과정을 편성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교사를 신뢰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다. 여느 유럽 국가들과 비교할 때 핀란드 교사의 수준은 높은 편이다. 그래서 자부심도 매우 강하다. 외국에서는 대학 교수들이 누리는 권리인 교육과정 편성권을 핀란드 교사들이 가지게 된 것은 이런 자부심과 신뢰 때문에 가능했다."
"학교에 '랭킹'을 매기다니…. 매우 비교육적이다."
- 한국 고등학생들이 진학할 대학 및 학과를 결정할 때, 가장 많이 참고하는 것은 입시 배치표다. 전국의 모든 대학 및 학과가 점수에 따라 서열화 돼 있다. 배치표의 위쪽에 있는 대학 및 학과에 진학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이들 대학 및 학과를 졸업하면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다. 핀란드의 경우, 학생들이 지망 대학을 결정할 때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하는 것은 '친구'다.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이 선호하는 대학에 진학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물론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혹은 어떤 전공을 택하여 어떤 직업을 얻었는지에 따른 차이가 작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학교에 '랭킹'(Ranking, 석차)를 부여할 수 있나. 매우 비교육적이다. 핀란드 사회 분위기에서라면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 대학들에 대해 여러 기준에 따른 순위를 매기는 것은 한국만이 아니다. 외국 언론의 보도를 봐도 알 수 있다.
"핀란드에서는 특정 대학만을 유독 선호하거나, 대학 간의 순위를 매기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외국 언론이 핀란드의 몇몇 대학들을 지목하여 순위를 매기는 경우가 있다. 핀란드인들은 이런 보도에 별 관심이 없다. 그리고 저마다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기 마련인 학교 교육을 한 줄로 세워 놓고 '랭킹'을 부여하는 게 애당초 가능한 일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경쟁은 학생을 바보로 만든다"
- 경쟁이 있는 한, 순위를 매기는 것, 즉 서열화 현상을 피할 수 없다. 경쟁이 갖는 교육적 효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경쟁은 교육에 매우 해롭다. 학교는 학생들이 경쟁하는 곳이 아니라 '교육협력체'다. 학생들은 경쟁이 아니라 서로 협동하는 과정에서 더 많이 배운다. 따라서 학교 안에서 지나친 경쟁이 빚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경쟁이 교육에 미치는 해악에 대한 생각을 보다 자세히 듣고 싶다.
"우선 경쟁에 대한 부담은 사고력을 약화시킨다. 깊은 생각을 할 여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협동하는 능력을 기를 기회가 줄어든다. 또 경쟁에서 뒤쳐진 학생은 지나치게 심한 스트레스를 겪는다.
이런 스트레스는 심각한 문제다. 공부는 즐거운 일이다. 그런데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공부를 고통으로 여기게 된다. 물론 이웃 국가들이 경쟁을 강화하는 교육제도를 도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경쟁이 가진 순기능이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핀란드에서는 학생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경쟁은 잘못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또 아직까지는 경쟁을 배제하고 협력을 강조하는 방식이 충분히 성공적이었다고 본다."
'교육은 모든 사람을 위한 권리'
- 핀란드 교육의 성공 사례는 사회 문화적 배경과 떼놓고 설명할 수 없을 듯하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도 구별되는 교육 풍토가 생겨난 배경이 궁금하다.
"1918년 러시아로부터 핀란드가 독립할 당시부터 국민 교육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독립 이전부터 핀란드인들은 '교육은 모든 사람을 위한 권리'라는 구호를 외쳤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무상교육과 통합교육(한국에서 '통합교육'은 주로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을 함께 교육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반면 핀란드에서는 한국에서 통용되는 뜻 이외에 성적이 우수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함께 교육한다는 뜻도 포함된다. 요컨대 장애-비장애 학생의 통합교육과 한국의 평준화 정책이 합쳐진 개념인 셈이다.)이라는 원칙의 뿌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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