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교수는 22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민주화 20년, 한국사회 어디로 가나' 연속강연, 세 번째 강연자로 나서 한국 경제와 사회의 위기에 대한 원인을 진단 및 해법을 제시했다. 강연의 제목은 '민주화 20년, 경제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대타협'이다.
시장 자유화가 민주화라는 착각
장하준 교수가 생각하는 한국 경제의 현실은 이렇다. 과거 권위주의 독재정권 시절 국가의 강력한 정책적 개입에 의해 산업화가 이뤄지다보니, 정치의 민주화 과정에서 '시장 자유화'가 경제 민주화인 것으로 해석이 되면서 민주 정부들이 시장 자유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시장의 자유화 과정에서 1997년 외환위기가 일어났고,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구조가 완전히 바뀌었다. 문제는 외환위기로 인해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남기고 부채비율을 낮추는 등 대기업 경영이 건전화 됐지만, 적대적 인수합병의 위협에 노출되며 재벌들은 경영권 수호에만 급급하게 됐다.
그 결과 대기업들의 투자가 줄어들었고, 그러다보니 일자리가 생기지 않으며, 그나마 생기는 일자리는 비정규직인데다, 정규직도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상황이 됐다. 한국 경제의 위기를 넘어서 사회구조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다.
장 교수는 또 '소액주주 운동' 방식의 재벌 개혁 운동에 대해서도 "'1원(주) 1표' 방식의 소액주주 강화 운동은 결국 자유 시장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라며 "'1인 1표'의 민주주의 원리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벌들 시장주의에 대한 태도 이율배반적
장 교수는 이어 대립과 갈등의 구조가 경제를 어렵게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장 교수는 "자본가들은 시장논리를 수정해 경영권을 보장해달라고 하면서 개방을 반대하는 농민들이나 노조에게는 시장원리를 해친다면서 비난하고, 한편에서는 재벌에 대한 규제를 요구하면서도 시장 원리인 주주권 강화로 재벌에 대항하기를 원하고 있다"며 "이런 대립과 반목은 서로 힘을 약화시키며 공멸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장 교수는 "금융자본은 재벌을 더 압박하는 것을 좋아한다"며 "'1원 1표'의 시장 원리가 극단적으로 관철되면, 가장 돈이 많은 국제 금융자본의 뜻대로 우리나라 경제가 개조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장 교수가 내놓은 해법은 대립과 갈등하는 집단들의 '사회적 대타협'이다. 그 구체적 방법으로 장 교수는 재벌들의 경영권을 보호해주고 대신 사회경제 체제 자체를 북유럽식 복지국가체제로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장 교수가 보기에 '경영권 보호'은 우리나라 재벌들이 가장 원하는 아이템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재벌들에게 경영권 보호를 양보하고 더 많은 투자와 고용창출, 복지국가를 얻어내자는 것이다.
장 교수는 "기업들도 인식을 전환해야 할 것이, 스웨덴의 경우 실직을 해도 받던 임금의 80%가 실직수당으로 보장되고 재교육의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해고에 대한 저항감이 미국 등에 비해 훨씬 적다"며 "고용의 유연성이 더 높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복지'에 대한 저항감도 유럽식을 선택하면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장 교수는 "극빈층만 보호하는 미국식 복지는 중상위층의 반감을 불러온다"며 "그러나 유럽은 많은 세금을 내지만, 그 혜택을 중상위층도 받기 때문에 저항감이 덜 하다"고 설명했다. 이를테면, 높은 교육세를 내지만 모든 국민이 대학교육을 무상으로 받을 수 있으면, 중상위층도 충분히 높은 세금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금융/산업자본, 이분법적으로 보면 안 돼"
그러나 장 교수의 주장에는 많은 비판이 따른다. '재벌 옹호'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현재 한국 경제 위기의 원인이라고 지목되는 신자유주의의 양상도 잘못 짚었다는 지적이다.
이날 강연에 토론자로 참석한 정성진 경상대 교수는 "장 교수는 신자유주의를 국가와 시장, 민족적 산업자본과 국제적 금융자본의 대립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며 "이를 국가냐 시장이냐, 산업자본이냐 금융자본이냐, 민족자본이냐 외국자본이냐의 이분법적으로 봐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고는 80년대부터 나온 것"이라며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과 국내 재벌의 관계는 모순 관계가 아니라 공생 관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비판했다.
정 교수는 또 "이번 서브프라임모기지 위기 사태를 보면 신자유주의의 종주국이라는 미국도 FRB를 통해 개입하고 있다"며 "자본주의는 시장과 국가의 결합체로서 분리해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97년 이후 산업자본에 대한 금융자본의 지배가 강화됐는가 보면 그렇다고 볼 수도 없다"며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것은 산업자본으로 위기에 몰린 자본이 노동 대탄압을 통해 양극화와 비정규직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재벌의 경영권이 안정되지 않아 저투자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YS 시절 과투자 됐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투자가 적게 보이는 것일 뿐 결코 적지 않다"며 "문제는 자본 사이의 투자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특히 장 교수의 '재벌 경영권 보호' 주장에 대해 "경영권을 보장한다고 해서 경제의 효율을 향상시킬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며 "장 교수는 일단 경영권의 세습을 보장해주고, 2‧3세가 경영을 제대로 하는지 10년간 유예기간을 주자고 하는데, 한국경제가 재벌 2‧3세들의 연습장이냐. 과도하게 친재벌적인 논리이고, 장 교수가 주장하는 국민기업 관점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외국 자본에 비해 국내 재벌과 싸우는 게 더 어려워"
장 교수는 "정체를 파악하기도 힘든 국제적 금융자본보다 국민들에게 진 빚이 많은 국내 산업자본과 싸워 이길(통제) 확률이 높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우리 국민이 과거 품질이 떨어지는 국산제품을 '애용'해 온 빚을 갚을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 교수는 "외국 자본에 비해 국내 재벌과 싸우는게 더 어렵다"며 "삼성은 인맥, 학맥을 이용해 주요 인사들을 관리하고 있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장 교수는 "삼성 같은 기업이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할 일이 많다"며 "삼성의 무노조 주의 등은 굉장히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하루라도 빨리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이어 "외환위기 때 삼성 중공업의 중장비건설기계 부문이 볼보에 매각됐는데, 볼보에서 직원들에게 노조 좀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며 "스웨덴에서는 모든 일을 노조를 통해서 하는데, 개방화 시대에 삼성도 전근대적 행태를 버리고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냐"고 지적했다.
☞장하준 교수 발제문 기사 : "'사회적 대타협' 안 하면 보통사람들 미래는 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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