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자본가가 그렇게 자비로울까요? 최영기 원장님 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11일 오후 서울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강당에서 열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프레시안 공동 주관 연속기획강연 '민주화 20년, 한국사회 어디로 가나' 두 번째 강연에서 토론자들은 발제자인 최영기 한국노동연구원장이 내놓은 "지속가능한 고용시스템을 위해서는 재계가 변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격론을 벌였다. (☞관련기사 보기 : "'노동자의 마음'을 사는 기업가 정신이 필요하다)
과연 재계가 최 원장의 말대로 "각급 노동단체를 상대로 대대적인 대화공체를 펼치고", "산별노조와 산별교섭의 현실을 인정하고", "사람 중심의 비전과 경영철학을 세워 근로자의 마음을 사는" 일에 나서겠냐는 지적이었다.
"재계가 변해야 한다? 국가는 그대로인데 관념적인 생각이다"
토론자로 나온 정이환 서울산업대 교수는 몇 년 전 TV 토론에서 본 장면을 소개했다.
"당시 그 토론에 노사가 나오고 노동연구원의 한 분이 나왔다. 그 연구원이 '지속가능한 노동체제를 위해 사용자는 숙련에 투자하고 노동조합은 유연한 대응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당시 사용자 대표로 나온 토론자가 '참 아름다운 얘기입니다'라고 했다. 나도 그 토론을 보면서 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이환 교수는 "노사 당사자들이 그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않고 있기 때문에 (최 원장이 얘기한 재계의 변화라는 것은) '아름다운 얘기'였다"고 덧붙였다.
정 교수는 현재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양극화,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일본식 변화보다는 내부 노동시장과 외부 노동시장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보다 크고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며 "그런데 그것은 최 원장이 강조한 노사타협이나 숙련화와 같은 노사 전략의 변화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시스템의 측면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중기 한신대 교수도 재계의 변화가 현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이라는 주장에 대해 "관념적인 사고"라고 비판했다. 노중기 교수는 특히 "지난 20년에 대한 평가에서 국가와 정부에 대한 부분이 빠져있다"며 "노동조합의 쟁의 행위에 대해 여전히 공권력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같은 문제를 풀지 않고 사용자만 생각을 바꾸라는 것은 관념적"이라고 주장했다.
현 정부의 노동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도 노 교수는 강하게 비판했다. 노 교수는 "노무현 정부는 출범 당시 '노동 태스크포스'를 뒀지만 (현 정권의 그런 변화 시도는) 화물파업과 철도파업 두 개를 넘어서지 못하고 여름에 붕괴했다"며 "지금 이랜드 사태와 금속노조의 한미 FTA 저지 파업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1987년 이전의 방식 그대로"라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 원장이 제시한 안들이 얼마나 현실 가능한 안이겠냐"는 지적이었다.
노 교수는 "내가 재계라면 점점 더 그렇게 변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 같다"며 "재계는 지난 10년 간 가장 호시절을 지내 왔으며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전두환 정권 때보다 권력이 훨씬 커졌다"고 주장했다. "대통령도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하는 시대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청중들 가운데도 이 부분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한 청중은 "최 원장의 강연을 듣다보니 굉장히 자비로운 자본가가 한국에 많은 것 같다"며 "그런데 왜 우리 사회에는 이렇게 무자비한 노동자가 많은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고 질의했다.
또 다른 청중도 "현장은 투쟁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들고 있다"며 "그런 면에서 대타협과 새로운 계약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기보다는 현장에서 투쟁으로 바꾸는 것이 더 빠르겠다는 것이 우리 노동자의 심정"이라고 주장했다.
"'국가는 그대로'라는 얘기는 노동운동이 20년 간 실패했다는 말"
이같은 질문과 비판에 대해 최 원장은 "물론 자비로운 자본가는 없다"고 전제한 뒤 "내 주장에 대해 일부 언론에서는 '재계 책임론'이라고 했지만 재계가 잘못했다기보다는 한국적 의미에서의 사회적 책임투자, 지속가능한 경영을 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최 원장은 "노동운동이 재계를 압박해 변화를 이끌어낼 수만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그것은 그 힘 좋았던 87년에도 못했던 일"이라고 답변했다. 최 원장은 "그건 국가의 의지도 있지만 어찌 보면 뒤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던 재계의 비타협적인 자세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국가와 정부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노 교수의 지적에 대해서도 최 원장은 "1997년 이후 경제체제의 변화를 좀 더 세밀하게 봐야 한다"며 "IMF 이후의 경제운용 체제는 시장 주도로서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나서는 것은 여러 차례 해봤지만 지금과 같은 경제 시스템 속에서는 큰 효과를 보기 어렵다"는 설명이었다.
적어도 노동자의 기본권에 대한 탄압에 있어서 국가는 지난 20년 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최 원장은 "그 말은 한 단계 더 나가면 노동운동이 지난 20년 동안 실패했다는 말이 된다"며 "결국 실현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되지만 나는 아니라고 본다"고 주장했다.
"한국노총의 최근 변화, 시장주도의 시대변화에 예민하게 움직이는 것"
이날 토론 과정에서는 최근 한국노총(위원장 이용득)이 정·재계를 오가며 활발히 보이고 있는 행보에 대해서도 논쟁이 벌어졌다. 정관용 사회자의 "한국노총이 최근에 기존의 노선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더욱 적극화해서 변하고 있다"는 말에 대해 최영기 원장은 "한국노총의 변신은 시대의 변화 상황을 예민하게 읽고 활용하고 개척하고 있는 것"이라고 답했다.
최 원장은 "한국노총은 사실 참여정부 초기에 전혀 '줄'이 없었다"며 "그 위기를 극복하고 지금은 여기 저기를 휘젓고 다니는데, 이것을 보면 대중투쟁의 시대가 이제 어느 정도 한계에 부딪히고 노동조합의 정치(유니온 폴리틱스)로 전환돼야 할 시대가 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최 원장은 "개방적인 시장경제 체제 하에서 정치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자기 주장을 관철하는 것도 큰 힘"이라며 "시장규율이 지배하는 시대에 이것에 적응해나가는 속도, 그 속에서 움직이는 능력은 새로운 테크닉이 요구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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