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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거나, 싸우거나…지거나, 이기거나

[위기의 우토로①]외면 받는 '재일동포 해방구'

일본 교토부 우지시 우토로 51번지. 일본 육상자위대 기지 옆 6400여 평의 땅에 65세대 200여 명의 재일동포들이 모여 살고 있다. 1940년대 초반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때 비행장 건설 노동자로 모여 든 조선인들이 만든 마을로 그 역사만 무려 60여 년. 그러나 전후보상은커녕 토지 소유권도 갖지 못해 강제로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다. 토지 소송만 20여 년을 했으나 결국 패소했다.

이 사정이 한국에 알려지자 2005년 우토로 국제대책회의가 결성됐고, 우토로를 돕기 위한 민간 후원금만 5억 원 가량이 모였다. 하지만 땅을 사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으로 이 돈이 은행에서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우토로는 다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토지소유주인 서일본식산이 주민들에게 올해 7월까지 토지매입 여부를 결정해달라고 통보한 것.

다시 강제철거 위기에 내몰린 우토로 마을을 취재했다.<편집자>
▲ 우토로 마을 입구에 세워진 구호 입간판들. ⓒ프레시안

"우리는 못 건드렸지, 똘똘 뭉쳐 싸웠거든"

1948년 2월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 서광수 씨. 그는 한 살 때 외할머니가 살고 있는 우토로로 이사를 왔다. 우토로는 태평양전쟁 당시 비행장이 건설되던 곳으로 '조선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곳이었다.

전후 일본에는 일자리가 없었다. 특히 조선인들에게는 더 그랬다. 그래도 집에 갈 뱃삯이 없어 조선에 돌아가지도 못했다. 서 씨의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을 우토로 처갓집에 맡기고 멀리 일을 다녔다.

서 씨는 '우리학교'(민족학교)에 가고 싶었다. '한국사람'이니까. 그런데 서 씨의 어머니는 민족학교 학비가 비싸서 서 씨를 민족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일본 학교에 보냈다. 민족학교는 1시간 반이나 떨어져 있었고, 정식학교로 인정을 받지 못해 학비 부담은 학부모 몫이었다.

일본학교는 학비는 물론 책까지 공짜로 줬다. 그러나 일본학교에 간 서 씨는 아이들로부터 "마늘 냄새 난다", "조센징은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놀림을 받으며 괴로워했다.
▲ "일본 아이들과의 싸움에서는 절대 지지 않았다"는 서광수 씨. ⓒ프레시안

하지만 서 씨는 놀림과 차별에 굴복하지 않았다. 놀려대는 일본 아이들에 맞서 당당히 싸웠다.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서 씨에게 승리의 비결을 물었다. "우토로 옆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데 그 때 우토로 사는 동급생이 9명이었지. 우리는 누구든 한 명이 싸움이 나면 우루루 몰려가 함께 싸웠으니 질 수가 없었지. 그래서 일본 애들이 '우토로는 무섭다'며 근처에 얼씬도 안 했어."

일본 학교에 다니는 바람에 한국말이 서툴러 일본어로 인터뷰를 진행한 서 씨. 그러나 그의 일본말 속에서 또렷이 들리는 한국말이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서 씨는 정밀기계를 배워 회사에 다니다 20여 년 전 우토로 마을 안에 '동아정기'라는 1인 공장을 차려 개인 사업을 해오고 있다. 쇠를 깎아 플라스틱 금형을 만드는 일이다.

일본사회의 지독한 차별에 맞서 당당히 싸우며 살아온 서 씨. 우토로에 공장을 차린 20여 년 전 부터 또 다른 싸움을 하고 있다. 토지분쟁에 휘말려 마을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

짧았던 '승전국'의 기쁨
▲ 마을 옆 철조망 건너는 일본 육상자위대 기지. 1940년대 우토로 주민들이 일군 땅이다. 자위대원들이 조깅을 하고 있다. ⓒ프레시안

1932년 생 김영태 할아버지.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할 때 그는 일본 고베에 있었다. 강제노동과 억압, 차별에 시달리던 동포들이 드디어 해방을 맞이하게 됐다. '승전국' 국민이 된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 때부터 '조선연맹'(조련)을 만들어 당당하게 행동했다.

"나도 조련을 하고 싶었는데, 내가 어리다고 안 받아주는거야. 그 때 선배님들 대단했지. 제복 입고 제복 깃에 배지를 차고 다녔는데, 전철을 탈 때도 배지를 보여주고 공짜로 탔어. 전쟁 기간에 그 차별을 받았으니 당연했지. 그런데 그게 1년을 못 넘겼지."

김 씨는 승전국 국민이 돼 '행세'하고 다닐 줄 알았는데,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일본이 다시 '행세'를 하게 됐고, 차별은 여전했다. 김 씨는 처갓집이 있는 우토로로 들어왔다. 우토로는 '무서운' 마을이어서 일본인들이 건드리지 않는 곳이었다.

김 씨에게 "도와준다고 했다가 아무 소식이 없는 한국 정부가 원망스럽지 않냐"고 물었다. 팔은 안 쪽으로 굽었다. 김 씨는 "한국 정부에는 감정이 없다. 일본 정부가 먼저 책임을 져야지. 내가 전쟁을 겪은 세대야. 우리 동포들 온갖 차별 받으면서 미쯔비시, 가와사키 그런 곳에서 미군 폭격 받으면서 일했는데. 그걸 나몰라라 하는 일본 정부에게 강하게 책임을 물어야지."

▲ 김군자 할머니. ⓒ프레시안

집이 있어 살 수 있었다


1928년 생 김군자 할머니. 본명은 김남영이다. 세 살 때 일본에 먼저 온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왔다. 일본 소학교에 다닐 때 출석을 부를 때마다 놀려대는 일본 아이들 등살에 스스로 이름을 기미코(君子)로 바꿨다. 그는 해방되던 해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우토로로 시집을 왔다.

그의 시아버지는 '지식인'이었다. 시아버지는 "아들 딸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오라"고 해 아이들에게 조선 옷을 입히고 조선말과 역사를 가르쳤다. 학교로 쓸 변변한 건물도 없어 아이들은 땅 바닥을 공책삼아, 막대기를 연필 삼아 말과 글을 배웠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1949년 김 씨 시아버지의 '우리학교'를 폐쇄해버렸다.

김 씨는 스물아홉에 교통사고로 남편을 여의었다. 그 때 김 씨는 수중의 돈을 다 털어 붓고 친정집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집을 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잘 한 일이었다. 일거리가 없어도 살 집이 없으면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지금 사는 집에서 5명의 자식들은 물론 시동생들까지 키워 출가시켰다.

지은 지 50년이 된 집. 낡아서 조금씩 비가 새는 집을 김 씨는 고치지 못 하고 있다. 우토로 마을 전체가 토지분쟁에 휩싸이며 언제 집이 철거될지 모르기 때문. 김 씨는 "집을 부수려면 나를 먼저 죽여라"고 말했다.

일본과 싸우고 미국과 싸우고 자본과 싸우며

1920년 생 문광자 할머니. 경남 마산이 고향인 문 씨는 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왔다. 문 씨는 열두 살 때부터 '열다섯 살'이라고 속이고 고무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던 중 오사카로 이사를 갔고, 열일곱 살에 거울공장에 다니던 남편과 결혼을 했다.
▲ 문광자 할머니를 취재하고 있는 일본 기자들. ⓒ프레시안

그런데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직후 미일 무역이 중지됐고, 남편의 공장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일본 안에서도 조선인에 대한 징병이 시작됐다. 경찰이 여러 번 남편을 잡으러 왔었다. 문 씨는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잡아뗐다. 그 때 친정아버지로부터 우토로의 비행장 공사의 인부로 지원하면 징병이 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쟁터에 나가 일본을 위해 싸우다 개죽음 당하는 것보다 소처럼 일하는 게 나았다. 그래서 남편과 우토로로 건너갔다.

삼나무를 깎아 만든 커다란 함바집에는 12칸의 방이 있었고, 3평 남짓한 방 하나에 가족 수와 상관없이 한 가족이 들어가 살았다. 3평 안에 아궁이도 있었고, 세간을 다 들여놔야 했다. 삼나무 껍질을 얹은 지붕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비가 샜다. 합판 한 장의 벽 사이로 옆 방 얘기가 다 들려왔다. 벽 사이 틈이 많아 겨울엔 추위가 혹독했다. 여름엔 단열이 안 돼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찜통이었다.

여자들은 새벽 3시부터 일어나 일꾼들의 밥을 했고, 아이들을 키웠다. 남자들은 비행장 공사장에 가서 땅을 깎아 활주로를 닦고 비행기 격납고를 지었다. 고된 노동이었지만,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견딜 만한 일이었다.
▲ 상추씨를 털고 있는 주민 김순애 할머니. 뒤에 보이는 건물이 김 할머니가 홀로 살고 있는 집이다. ⓒ프레시안

비루하게 살아도 차별 받지 않고 사는 것이 낫다

그러다 해방이 왔다. 기쁨에 들떠 우토로 주민들은 눈에 보이는 닭들을 잡아 잔치를 벌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본군 비행장을 접수하러 들어온 미군이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몰아내려 했다. 우토로 주민들은 "내가 일군 땅"이라며 완강히 저항했다. 미군은 저항하는 우토로 조선인들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마을과 미군 기지를 가르는 철조망을 쳤다. 그 곳이 지금의 일본 자위대 기지로 남아 있다.
▲ 마을에 아직도 남아 있는 '함바'의 흔적. ⓒ프레시안

마을에 상수도는 물론 하수도도 없었다. 저지대인 우토로에는 비만 오면 마을보다 높은 자위대에서 물이 흘러내려 오고 하수가 넘쳐 길이 철벅철벅해지는 것은 물론, 우물에도 오수가 흘러들어 도저히 마시기는 커녕 빨래도 못 할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이 우물을 모두 퍼내 닦아 내고 돌을 깔아 물을 정화해야 비로소 우물이 복구됐다.

도저히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지만, 문 씨는 우토로에 남아 자식들을 키웠다. "차별 받는 데 가서는 못 살겠습디다."

비행장 건설의 집안 이력이었을까. 문 씨는 "우리 아이들은 고철 수집과 토목 공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배운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문 씨의 집 뿐만이 아니다. 우토로에는 65세대 중 토목 건설업체만 3개에 이른다. 많이 배워도 차별이 심해 일본 기업에 취직하기 힘들었던 동포들은 토목 건설 현장을 누비고 다녀야 했다.

그렇게 상하수도도 놓아주지 않는 마을에서 비바람이 새는 집에 살아도 우토로 주민들에게 우토로 마을은 가난해도 차별 받지 않아 좋은 일종의 '해방구'였다.

우토로, 싸움의 역사
▲ 우토로의 역사는 차별에 맞선 '싸움'의 역사였고, 우토로는 '싸움'을 통해 지켜낸 동포들의 해방구였다. ⓒ프레시안


'해방구' 우토로는 싸움의 역사였다. 자신들을 몰아내려는 미군에 맞서 땅을 지켰고, 전후 툭하면 '간첩 색출한다', '밀주 단속한다'며 쳐들어오는 일본 경찰에게 "권력의 개는 출입을 금한다"는 간판을 내걸었으며, 아낙들이 경찰에게 고춧가루를 뿌려대며 마을을 지켜왔다. 일본인들 사이에 '무서운 마을'이라는 낙인이 찍혀 기피대상이 됐고, 시에서는 상하수도, 도로 등 행정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던 중 비로소 상수도가 깔린 1988년. 기쁨도 잠시 청천벽력의 소식을 접했다. 갑자기 철거 통지가 마을에 날아들었다. 40년이 넘게 살아온 땅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접근하기도 싫어하는 땅이기 때문에 '내 땅'이라고 생각해오며 살아 온 우토로의 토지 소유권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우토로는 태평양 전쟁 당시 비행장을 건설하던 일본국제항공공업의 소유였다. 이후 미군이 진주하며 전범 재산 해체 작업이 벌어졌지만, 일본국제항공은 한국전쟁의 특수를 입어 미군 트럭을 생산하는 신일국공업으로 부활했다. 신일국공업은 닛산자동차의 계열사로 합병돼 우토로는 닛산의 소유가 됐고, 닛산은 이후 서일본식산이라는 부동산 회사에 우토로를 매각한다. 그리고 서일본식산은 우토로 주민들에게 철거를 통고한 것.

철거 통지를 받을 때까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우토로 주민들은 철거 통지에 맞서 소송을 벌였다. 하지만 소송도 결국 패배. 재판소에 "전후 일본의 조선인에 대한 책임"을 물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년간 방치된 희망, 다시 절망의 입구에
▲ 1988년 상수도가 깔려졌지만, 하수도는 여전히 과거 그대로이다.ⓒ프레시안

어쩔 수 없이 땅을 사지 않으면 내쫓길 위기에 처한 우토로. 그런데 우토로의 사정이 한국에 알려지며 큰 희망이 생겼다. 2005년 우토로 국제대책회의가 결성되고, 5억여 원의 후원금을 모았다. 외교통상부는 반기문 장관 시절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여야 국회의원들이 우토로에 찾아와 주민들을 격려했다.

"한국이 미국처럼 강대했으면 일본놈들이 우리한테 이러겠어"라는 푸념을 하던 주민들은 처음으로 '모국'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다. 우토로 주민들의 80%는 '대한민국' 국적이다.

하지만 100억 원 안팎의 토지 매입비에 비하면 턱 없이 부족한 금액. 그래서 주민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산과 후원금을 모으고, 나머지 금액을 한국정부와 일본정부가 지원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양측 정부 모두 감감 무소식.

그리고 토지 소유권자인 서일본식산은 우토로 주민들에게 "오는 7월까지 땅을 살 것인지 말 것인지 알려달라"고 통고했다. 우토로 주민들이 땅을 사지 않을 경우 제3자에게 토지를 팔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토로 마을의 '또 다른' 운명이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우토로에 계속 살 수 있겠구나'라는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60여 년 동안 '싸우며' 지켜온 마을 우토로. 마을 사람의 대부분은 60세 이상의 재일동포 1,2세들이 대부분. 평생을 차별에 맞서, 가난에 맞서 싸우며 살아 온 이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과거 '투쟁'의 시절 기운은 한 풀 죽었지만 목소리에 묻어나는 비장한 각오는 여전했다.

"내가 앞으로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나. 그냥 여기서 살다가 여기서 죽는게 소원이제. 그때 가서 땅을 어떻게 해도 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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