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단 민주화' 외치려면 매맞을 각오 해야 했다
이 사무실은 1940년대 일본 정부가 오사카에 거주하는 재일 조선인들을 모아 놓고,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게 하던 장소다. 오사카는 조선인들이 유독 많이 몰려 사는 지역이었고, 그래서 곳곳에 이런 장소가 있었다. (☞관련 기사 : "조선 사람도 맞으면 아파하는구나")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로 시작하는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던 장소는 해방 이후, 오사카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회합 장소가 됐다.
바로 옆에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민단, 현 명칭은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오사카 본부가 들어 선 것도 이곳이 재일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여러 한인 단체가 거쳐 간 이 사무실의 마지막 임자가 된 것은 재일한국청년동맹(한청)이다.
긴장한 표정으로 사무실 유리창에 테이프를 붙였던 것도 한청 회원들이다. 이들은 왜 종종 폭력에 시달려야 했을까.
이들의 주장 때문이다. 이들은 '민단의 민주화', 그리고 민단을 후원하는 '박정희 독재 정권 반대', '한반도의 평화 통일' 등을 주장했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에는 김대중 구명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민단을 비판하는 것은 조국 배신 행위다"
'좌익', '북한 지지' 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주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종종 '빨갱이'라는 오해를 받았다. 더구나 박정희 정권을 반대하는 것은 재일 교포 사회에서 한국인들을 대표하고 있는 민단에게 치명적이었다. 민단이 이런 한청을 '눈의 가시'처럼 여긴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오사카의 민단 본부와 한청 사무실 사이에 있는 담에는 날카로운 철조망이 세워져 있다.
"민단에 대한 비판은 민단을 후원한 박정희 대통령을 모욕하는 것이고, 그것은 조국을 배신하는 행위며, 결국 적성국가인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일이다"라는 논리가 통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논리가 아닌 논리'를 핑계로 폭력이 정당화됐다. "북한을 이롭게 하는 빨갱이는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라는 논리다. 역시 '논리가 아닌 논리'다.
결국 이들은 민단에서 쫒겨났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구성해 자신들의 주장을 더욱 거세게 외쳤다. 한민통은 훗날 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으로 개편됐고, 오사카에서 한통련과 한청은 같은 건물에 있다.
'민단-총련 화해' 무산…1970년대 '민단 민주화' 세력 내쫒지 않았더라면
1970년대 말 한국 정부는 한민통·한통련을 '반국가 단체'로 못박았다. 회원 조직인 한청 역시 이적 단체가 됐다. '민단에 대한 비판은 조국을 배신한 행위'라던 민단 지도부의 논리를 한국 정부가 인정한 셈이 됐다.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는 내부 구성원들을 쫒아낸 민단은 박정희 정권과의 유대를 더욱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민단은 더욱 보수화됐고, 한국의 정권이 바뀌어도 이런 성격은 계속 유지됐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났다. 한국은 민주화됐고, 남북 교류도 활발해졌다. 그래서 민단의 뿌리 깊은 북한 알레르기, 맹목적인 보수 성향은 변화한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이런 목소리가 거듭 쌓여, 지난해 5·17선언이 나왔다. 한국을 지지하는 민단과 북한을 지지하는 재일조선인총연합회(총련)의 화해 시도다. 한반도에서는 조금씩 허물어져가는 남과 북의 장벽이 일본에서는 여전히 견고하게 버티고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던 많은 이들이 반색을 했다. 민단의 지나친 보수 성향을 우려했던 일본 내 진보 세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약 한 달 만에 이런 시도는 무산됐다. 일본 정부의 훼방이 주요한 이유였지만, 민단 보수파의 반발도 컸다. 결국 민단 내부의 개혁 없이는 재일 교포 사회에 드리워진 냉전과 분단의 그늘도 걷어낼 수 없다는 해석이 나왔다. 이런 목소리를 들으며 떠올리게 되는 이름이 한통련이다.
민단의 개혁을 요구했던 이들이 1970년대 축출되지만 않았더라면, 그리고 이들이 '반국가 단체'라는 족쇄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으리라는 설명이다. 맹목적인 보수 성향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있었다면, 총련과의 화해도 보다 원활했으리라는 것이다. 또 보수적인 분위기에 반발해 민단에서 등을 돌리는 젊은이들도 지금보다 적었으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민단이 한통련에 화해를 청할 가능성은 당분간 높지 않아 보인다.
한청 오사카 본부와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는 한통련 오사카 본부 김창오 사무국장은 유리창에 남아 있는 테이프 자국을 가리키며,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민단 보수파는 한통련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차라리 북한을 지지하는 총련과 대화할지언정, 민단 개혁을 요구했던 한통련과는 대화할 수 없다는 게 민단 보수파의 분위기"라는 말도 덧붙였다.
순수한 자치단체였던 민단…이승만도 무관심
지난 4일 오사카에서 만난 김 사무국장은 민단의 개혁을 주장하다 쫒겨난 이들의 역사, 그리고 이들에게 '반국가단체'라는 족쇄가 채워진 배경을 자세히 설명했다. 다음은 그 내용과 다른 이들의 증언을 함께 정리한 것이다. 한통련 활동가들의 사연은 지난 2003년 2월 23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통해서도 소개됐었다.
한통련의 역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떼놓고 설명할 수 없다. 동시에 이들의 역사는 재일 교포 사회의 역사이기도 하다.
해방 후 재일교포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결성된 민단은 원래 한국 정부와 별 관계가 없는 순수한 자치단체였다. 민단이 원해서였다기보다 신생 독립국이었던 한국의 초대 정부는 해외 교포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1948년 10월 일본을 처음 방문한 이승만 전 대통령이 독립운동가 출신인 박열 민단 단장을 만나지 않았던 것, 민단이 주최한 환영 대회에 불참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8·15 해방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지 않은 채 일본에 남아 있는 교포들에 대해 이승만 전 대통령은 썩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4·19 혁명의 열기, 재일 교포 청년들을 깨우다
하지만 민단이 '재외국민 등록', '여권 발급' 등의 수속 일부를 위탁받은 공인단체가 되자 상황은 바뀌었다. 한국 정부의 간섭이 시작됐다. 민단 내부에서 이런 간섭에 대한 입장 차이가 생겼다. 지도부에 비해 청년들의 반발이 더 거셌다.
그리고 간섭에 반발하던 이들에게 4·19 혁명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못마땅한 정권의 간섭이 잠시 사라졌다는 기쁨에 그치지 않았다. 불의에 분노한 시민의 힘으로 부패한 정권을 몰아냈다는 사실, 그것은 책에서나 접하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자신들의 고국에서 현실로 이뤄졌다는 소식은 또 다른 각성으로 이어졌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다.
우익 행동대 역할을 하던 민단 산하 재일대한청년단에 변화의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재일대한청년단은 이승만 하야를 외치며 4·19 혁명을 지지했다. 반면 민단은 폭도들이 일으킨 행위라며 비난 성명을 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내자, 민단은 금세 입장을 바꿨다. 4·19 혁명 희생자를 추도하는 자리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민단으로 하여금 '제3선언'이라는 것을 발표하게 했다. "본국(한국) 정부의 국내 실정에 대해서도 국헌에 위배되는 사항에 대해서는 시시비비를 가리고, 민단의 자주성을 지켜나가겠다"는 내용이었다.
5·16 쿠테타, 무조건 지지한 민단…"反박정희는 反국가다"
그리고 이듬해 한국의 민주주의가 군홧발에 짓밟혔다. 5·16 군사 쿠테타가 터진 것. 그런데 하필 이날은 민단 중앙 단장 선거가 있던 날이었다. 일제시대 만주국 검사를 지냈던 권일 씨가 민주파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그리고 당선과 동시에 5·16 군사 쿠데타 지지 성명을 냈다. 당시에는 쿠테타를 주도한 이들의 면면도 드러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결국 4·19 혁명의 영향으로 나온 민단의 '제3선언'은 유명무실해졌다.
민주파가 주도하던 재일대한청년단은 쿠테타 반대 성명을 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당시 권일 민단 단장은 "반권(反權, 권일 단장에 대한 반대)은 반박(反朴, 박정희에 대한 반대)이다.그리고 반박은 반국가다"라는 논리를 들이대며 억눌렀다.
그리고 민단 산하 재일대한청년단이 재일한국청년동맹(한청)으로 개편됐다. 재일대한청년단 마지막 단장이었던 곽동의 씨가 한청의 첫 단장을 맡았다. 이런 변화를 주도했던 곽 씨는 이후 재일 교포 사회 내에서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이끄는 주요 인물이 됐다.
당시의 변화가 갖는 성격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재일대한청년단에는 남성만 가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청에는 여성이 가입할 수 있다.
원조자금 얻기 위한 한일회담, 재일교포들의 분노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직후, 대일원조자금을 얻기 위해 추진한 한일회담은 한청과 민단의 골을 더욱 깊게 패이게 한 계기였다.
한청 활동가들은 "일본의 사과 없는 원조는 잘못이다. 한국은 원조가 아닌 배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며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주위의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한 원조금을 '독립축하금'이라 부른다"며 심한 모멸감을 호소했지만, 당시 민단 지도부는 한일회담에 대한 찬성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민단 지도부의 이런 태도는 교포들의 반발을 샀다. 한일회담 결과에 따르면 재일교포가 일본에 더 오래 살수록 법적 지위가 낮아지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당시 협정문은 재일 교포 2세까지만 영주권을 주도록 돼 있다. 이미 3세를 키우고 있는 대부분의 교포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하다.
재일 교포 사회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대 기류가 확산되자, 한국 정부는 긴장했다. 1971년 치러진 민단 단장 선거 결과에 관심이 쏠렸다. 당시 후보는 유석준 씨와 이희원 씨.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인 이들은 유석준 씨를 지지했고, 압승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민단 단장 후보가 정부 전복 계획 세웠다"…중정의 민단 선거 개입 의혹
그런데 당시 선거 직전, 김재권 주일공사가 뜻밖의 발언을 한다. "당선이 유력한 후보자가 총련과 접선하여 한국 정부를 전복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런 내용이 담긴 녹음 테이프를 한국 대사관이 보관하고 있다. 그 녹음 테이프는 선거가 끝난 뒤, 공개하겠다"는 내용이다.
"왜 지금 공개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선거 개입' 행위에 해당한다"고 답할 뿐, 그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선거 판세는 순식간에 역전됐다. 반공이데올로기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결국 주일 한국대사관이 지지하는 이희원 씨가 당선됐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녹음 테이프를 공개하겠다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유석준 후보의 총련 접선 의혹을 제기한 김재권 공사는 중앙정보부 7국장 출신이었고, 그래서 중앙정보부의 민단 선거 개입설이 흘러나왔다.
"박정희의 '10월 유신'이 일본에는 한 해 먼저 찾아 왔다"
그리고 선거가 끝난 직후, 새로운 민단 지도부는 민단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민단 도쿄 본부와 가나가와 본부에 대해 '직할 처분'을 내리고, 한청의 산하 단체 자격을 취소했다. 이때부터 한청은 민단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적으로 한국 민주화 운동을 벌이게 된다. 또 유석준 후보를 지지했거나,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던 전·현직 민단 간부들을 대거 제명했다.
그래서 일본의 민주화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박정희의 '10월 유신'이 일본에서는 한 해 먼저 찾아 왔다"는 말이 자주 회자됐다.
이듬해인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은 유신을 선포했다. 당시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김대중 씨가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다. 김대중 씨는 국내 입국을 보류하고 '유신 반대' 활동을 전개했다.
일본에서 김대중 씨는 신민당 국회의원과 민단 단장을 지낸 교포 김재화 씨, 민단 동경 본부 단장인 정재준 씨, 민단 단장 출신인 배동호 씨, 한청 위원장 출신인 곽동의 씨 등을 만났다.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는 민단 지도부는 이들을 가리켜 '베트콩 파'라 불렀다. 유신 반대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용공(容共)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한 표현이다.
김대중, 민단 개혁 세력을 만나다…"독재가 지속하는 한, '민단 민주화'는 없다"
이들과 김대중 씨의 만남은 재일 교포 사회에서 진행되던 민주화 운동의 결정적 분기점이 됐다.
우선 한 해 전 선거에서 접전을 벌였던 정적(政敵)인 김대중 씨를 경계했던 박정희 정권이 재일 교포 사회에 더욱 깊이 관여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이는 다시 한국 민주화를 염원하던 재일 교포들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 선거 패배로 정치적 기반을 잃어버렸던 김대중 씨는 새로운 기반을 얻었다. 아울러 김대중 씨는 적극적인 강연 활동 및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유신 반대 운동의 정당성을 알렸고, 이는 재일 교포 사회에서 진행되던 민주화 운동을 자극하는 촉매가 됐다.
특히 1973년 3월 21일, 일본 하코네 유모토의 한 호텔에서 열린 '민단민주화운동활동자연수회'가 중요한 계기였다. 일본 각지의 재일 교포 활동가 1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서 연사로 나선 김대중 씨는 "민단의 정상화, 민주화는 박정희 독재 정권이 지속하는 한 성사될 수 없다. 한국의 민주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한반도의 자주적 통일을 위해서도 민주 정부의 수립은 필수적이다"라고 말했다.
민단 민주화와 한국 민주화, 그리고 통일이 모두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내용의 이날 연설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김대중 씨가 재일 교포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깊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한민통 의장으로 추대된 김대중…중정의 납치
결국 이런 흐름이 같은 해 한민통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곽동의, 배동호, 정재준 씨 등 민단에서 제명된 인사들이 주축이 됐다. 그리고 한민통의 초대 의장으로 김대중 씨가 추대됐다. 재일 교포 민주화 인사들 사이에서 김대중 씨가 차지하던 위상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씨는 "나는 해외 조직의 리더로서 운동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국의 정치가일 뿐"이라며 사양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런데 같은 해인 1973년 8월 8일, 김대중 씨가 갑자기 사라졌다. 한민통 결성을 일주일 앞둔 때였다. 이날 저녁 김대중 씨는 한민통 결성을 주도했던 재일 교포들과 만날 약속이 있었다. 김대중 씨가 갑자기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연락조차 끊기자 모두 당황했다.
당시 정황을 확인한 교포들은 '중앙정보부의 납치'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런 규정은 사실과 일치했다. 유명한 '김대중 납치 사건'이다. 이용택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국장은 훗날 "당시 중앙정보부는 한민통의 결성을 해외에 있는 반국가 세력을 규합하려는 시도로 봤다"고 술회했다.
'김대중 구명 운동' 점화…돌아온 DJ, 정치 활동 중단 선언
이 사건을 계기로 '김대중 구명 운동'이 일본 곳곳에서 벌어졌다. 곽동의, 배동호, 정재준 등 한민통 결성을 주도한 활동가들이 중심이 됐다. 평소 일본 언론을 통해 한국 민주화에 대한 생각을 자주 이야기했던 김대중 씨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던 일본인들도 상당수 동조했다.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사라진 김대중 씨는 닷새 뒤인 8월 13일 서울 동교동 자택 앞에서 나타났다. 온몸에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씨는 "당분간 건강 회복을 위해 노력하며, 정치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민통 결성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1973년 8월 15일, 일본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한민통 결성식에서 참가자들은 "김대중 한 사람이 사라지면, 열 사람의 김대중이 나타난다"고 외쳤다. 그리고 김대중 씨의 고사에도 불구하고 그를 의장으로 추대했다. 의장석이 비어있는 채 진행된 이날 행사는 김대중 씨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규탄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렇게 출범한 한민통은 이후에도 김대중 씨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적극적인 구명 활동에 나섰다. '김대중 구명 운동'을 통해 한민통은 성장했고, 이런 활동을 통해 민주 인사로의 김대중 씨의 명성도 높아졌다.
전태일 분신 계기로 한국 노동 현실 고발…일본 노동 운동과 연대
물론 한민통이 김대중 개인의 구명만을 위해 움직인 것은 아니다. 1970년 청계 피복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을 계기로 한민통은 한국의 노동 현실을 알리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런 활동의 일환으로 한민통은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어머니'가 그것.
영화 '어머니'는 전태일 열사 8주기인 1978년 11월 13일, 첫 상영회를 가진 후 일본 곳곳에서 700회 이상 상영됐고 40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 영화 '어머니'는 한국과 일본의 진보 세력이 연대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영화 '어머니'를 통해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은 일본 노동운동 진영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일본 노동조합 총평의회는 한국의 노동운동에 대해 지지와 연대를 밝히는 동시에, 한민통의 일본 내 활동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도왔다.
당시 일본 노동조합 총평의회 위원장이었던 마키에다 모도후미 씨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한민통의 적극적인 후원자 역할을 했다.
'한민통 의장' 이유로 김대중 사형 판결…일본 총리를 움직인 구명 운동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면서 재일 교포 사회는 격랑에 휩싸였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주요한 정체성으로 삼았던 민단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이듬해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집권했고, 민단은 다시 이들을 지지했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한민통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같은해 5월 18일, 한민통은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도쿄주재 한국 대사관 앞에서 진행했다.
그리고 6월 10일에는 '광주 대학살 규탄 추모집회'를 연 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현장을 기록한 영화를 상영했다. '한국-1980년'이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실을 해외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 해외에서 먼저 드러난 진실이 한국 내에 알려지면서 군사정권을 무너뜨리는 분노의 도화선이 됐다.
그런데 1980년 5월 17일, 한국의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이른바 5·17조치를 감행했다. 그리고 이날 김대중 씨가 '사회불안 조성 및 학생·노조 소요의 배후조종' 혐의로 수사기관에 연행됐다. 이어 그는 같은 해 7월 31일 내란음모·국가보안법·반공법 등의 위반 혐의로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기소된 뒤, 역시 같은 해 9월 17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 및 반국가 단체 결성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다음해 1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이런 판결은 한민통, 그리고 재일 교포 사회에도 큰 회오리를 몰고 왔다. 한민통은 거의 매일 김대중 석방, 군사정권 반대를 외치는 대규모 집회 및 선전 활동을 진행했다.
이런 활동은 일본 사회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80년 11월 21일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일본 총리가 최경록 주일 대사에게 "김대중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관심"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직후, 진행된 김대중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이유는 김대중 씨가 반국가 단체 수괴라는 점이었다. 흔히 알고 있듯 내란 음모 혐의가 아니었다. 내란 음모 혐의로 적용할 수 있는 최고형은 무기징역이다.
그리고 김대중 씨를 반(反)국가 단체 수괴로 규정한 근거는 그가 한민통 의장이라는 점이었다.
한민통, 과연 반국가단체인가?
그런데 김대중 씨가 한민통 의장으로 추대된 1973년 8월 15일 발표된 한민통의 3대 원칙은 이렇다.
"1. 선 민주회복, 후 통일실현, 2. 대한민국 절대 지지, 3. 조총련 및 북한과는 선을 긋는다."
적어도 공식적으로 내세운 원칙만으로는 '반국가 단체'로 볼 이유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한민통이 반국가 단체로 규정된 근거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70년대 후반, 한민통은 해외에서 전개되는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당시 한국 정부가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수상을 초대했지만, 빌리 브란트가 한국 방문을 거부하고 대신 일본에 있는 한민통을 찾았던 일화는 유명하다. 공식적인 정부보다 망명 단체를 더 존중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위기 의식을 느낀 것은 당연했다. 실제로 한민통은 해외 민주화 인사들을 규합하려는 시도를 했고, 이런 노력은 1977년 8월 14일 민주민족통일해외한국인연합(한민련) 결성으로 이어졌다.
잇따른 간첩 사건…윤효동, 김정사
그런데 이보다 조금 앞선 1977년 5월, 갑자기 윤효동이라는 인물이 나타났다. 스스로를 '자수 간첩'으로 소개하며 기자회견을 자청한 그는 "김일성 북한 주석의 신임을 받은 공작원인 자신이 북한의 지시를 받아 일본에서 한민통을 결성했다. 그리고 한민통 활동가 곽동의 씨를 북한에 데려가 간첩 교육을 시켰다"라고 밝혔다.
경상남도 김해가 고향인 윤 씨는 일본에 건너가 총련계 민족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1959년 총련에 가입했으나 2년 뒤 민단으로 전향한 인물이다.
당시 윤 씨의 진술은 사실 관계가 불분명한 대목이 많았다. 대표적인 게 곽동의 씨를 북한에 데려갔다는 내용인데, 윤 씨가 곽 씨의 입북 시기로 지목한 1970년 4월에 곽 씨가 일본에 있었다는 증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뒤, 소위 '학원침투 재일동포 간첩 사건'이 터졌다. 교포 출신으로 한국에 유학을 와 있던 김정사 씨가 대학가에 침투한 간첩이라는 내용이다. 김 씨를 간첩으로 단정한 근거는 그가 한민통과 관계가 있다는 것.
사실 김 씨는 한민통 회원이 아니었다. 당시 한민통에서 자주 열었던 강연회에 한두 번 참가한 게 전부라고 한다.
보안사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지은 관례를 남겼다"
실제로 보안사가 발간한 <대공 30년사>에도 김정사 씨의 상급 지도원이 한국청년동맹(한청) 소속인데 한청은 단순한 반한단체일 뿐 반국가 단체가 아니라서 "구속영장 신청 시에 고충이 많았다"고 적혀 있다. 당시 한청의 상급단체가 한민통이었다.
결국 김정사 씨가 간첩으로 규정되면서 김 씨의 선배가 속한 한청의 상급단체인 한민통이 반국가단체 취급을 받게 됐다. 한민통이 반국가 단체이므로 김정사 씨가 간첩이라는 게 아니라 김정사 씨가 간첩이니까 한민통이 반국가 단체라는 논리다.
그것도 김정사 씨와 한민통 간의 직접적인 연계 고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김 씨의 '선배가 속한 단체의 상급단체'라는 복잡한 단계를 거친 논리였다.
그런데 당시 공안당국이 '대학가에 침투한 간첩'으로 지목한 김정사 씨는 법정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았음에도, 채 1년이 지나지 않아서 풀려났다. 터무니없는 조작 간첩 사건이 빈발하던 시기였고, 이렇게 갑자기 간첩으로 지목된 이들도 오랜 수형 생활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 씨의 짧은 형기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김정사 사건에 대해 <대공 30년사>는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지은 관례를 남김으로써 앞으로는 한민통에서 공공연하게 침투 활동하는 것을 합법적으로 색출 처단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애당초 공안당국이 겨냥한 표적은 김정사 씨가 아니라 한민통이었던 것.
1978년 대법원 "한민통은 반국가단체"…김대중 사형 판결 근거
1978년 6월 13일, 김정사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당시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한민통을 '반국가 단체'로 못박았다.
이렇게 찍힌 '반국가 단체'라는 낙인은 현재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현재 진실화해위원회에 당시 사건에 대한 조사가 의뢰된 상태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거쳐 내려진 '반국가 단체'라는 규정이 불과 2년 뒤, 김대중 씨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됐다.
물론 한민통 의장직을 고사했고, 한민통 결성 직전에 중앙정보부에 납치된 후 '정치 활동 중단'을 선언하기도 했던 김대중 씨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다.
실제로 김대중 씨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은 한민통과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한민통을 외면한 김대중 대통령…민단은 만나도 '구명 운동'한 한민통은 배제
그리고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며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됐다. 오랜 독재에 시달리던 한국은 민주화에 조금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됐다. 이 과정에서 한민통은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으로 개편됐다.
그리고 1997년 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씨가 당선됐다. 건국 이래 최초의 '민주적 정권 교체'였다. 역사적 사건이었고, 세계 언론은 이를 주목했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25년 전 고국에서 찾아온 정치인 김대중의 연설에 깊은 감화를 받았던, 그래서 '유신 독재 반대'와 함께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젊은 날을 보냈던 재일 교포 민주화 운동가들의 감동은 컸다. 이날 한통련(한민통의 후신) 사무실에는 이들의 활동을 지지했던 일본인들의 축하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대통령이 된 김대중 씨를 만날 기회는 없었다. 취임 행사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 다소 서운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돼 일본을 방문한 김대중 씨 역시 만날 수 없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민단 관계자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는 1980년 김대중 씨에 대한 사형 판결이 내려졌을 당시, '김대중 사형 촉구' 시위를 벌였던 이들도 있었다. 같은 시기, 젊음을 쏟아 넣으며 김대중 구명 운동을 했던 한민통 관계자들이 낄 자리는 없었다.
총련도 오고, 북한도 오는데….
그리고 지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6·15선언이 발표됐다. 서로에게 총을 겨누기만 했던 남과 북의 관계는 새로운 역사에 접어들었다.
김 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2002년, 부산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북한 선수단이 한국 땅을 밟았다. 그들은 한국 선수단과 한 팀을 이뤘고, 한반도기를 들고 경기장에 입장했다.
응원석에는 북한에서 온 응원단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총련 관계자들도 응원단을 꾸려 한국을 찾았다. 일본에서 북한을 공식적으로 지지해 왔던 그들을 한국 정부는 열렬히 환영했다. 서로 반목해왔던 민단과 총련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선수들을 응원했고, 그것만으로도 뜻 깊은 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조선'이라는 국적을 가진 총련 관계자들이 초대된 부산 아시안게임에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한통련 회원들의 자리는 없었다. 한국 땅을 밟고 싶은 마음만큼은 누구 못지않았던 그들의 입국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2003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끝내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다. 반국가 단체라는 낙인 역시 여전했다. 물론 김대중 씨를 만날 수도 없었다.
김대중 임기 끝난 뒤에야 이뤄진 만남…"여러분이 있었기에"
그들이 김대중 씨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2003년 9월이었다. 반국가 단체라는 낙인은 여전했지만, 노무현 정부는 그들에게 자유로운 왕래를 허용했다. 그들은 2003년에는 임시여권을, 이듬해부터는 정식여권 발급받아 한국을 드나들고 있다.
2003년 9월, 한국을 찾은 한통련 회원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 자택을 방문했다. 한국 땅을 밟은 것도, 김 전 대통령을 만난 것도 모두 꼭 30년 만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납치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나, 내가 투옥되거나 사형 언도 받았을 때 여러분들이 정말 성심성의를 다해서 노력해 준 것을 잘 알고 있고 진심으로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듬해에는 곽동의 전 한통련 의장이 연세대 김대중 도서관에서 김 전 대통령을 만났다.
재일대한청년단의 마지막 단장이었으며, 한청의 첫 단장이었던 곽 전 의장은 민단 민주화 운동, 일본 내 한국 민주화 운동의 산 증인이다.
1970년대 일본에 머물던 김 전 대통령과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이후 김대중 구명 운동에 목숨을 걸었다.
이날 곽 전 의장은 한동안 제대로 말을 잇지 못 했다. 이어 그는 "김대중 씨가 납치 사건, 1980년 사형 판결 등 오랜 시련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된 것, 그리고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은 "여러분들이 이렇게 오게 된 것은 민주화를 위해서 오랫동안 꾸준하게 투쟁한 결과다.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 아니냐. 그런 의미에서 정말 반갑다"라고 대답했다.
왜 김 전 대통령 임기 중에 한국 땅을 밟을 수 없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한국을 찾은 한통련 관계자들은 김 전 대통령의 대답으로 만족했다.
서운한 마음은 털었다…남은 것은 법적 명예 회복, 역사 바로 세우기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탄압한 중앙정보부의 수장이었던 김종필 씨와 손잡은 대가로 집권한 대통령이 짊어질 수밖에 없는 부담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대신 김 전 대통령이 2000년 남북 정상 회담으로 남북관계에 질적 변화를 가져온 것에 대해 고마워하기로 했다.
아직 '반국가 단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 했지만 그들은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됐다"는 김 전 대통령의 말로 지난날 민주화를 위해 애썼던 한민통·한통련의 정치적 명예 회복이 이뤄졌다고 봤다.
이제 남은 것은 잘못 기록된 역사를 바로 잡는 것, 그리고 법적 명예 회복이다. 적어도 이번 정권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는 '반국가 단체'라는 멍에를 벗고 싶다는 게 한통련 활동가들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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