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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씨 저서가 민단-총련 화해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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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조갑제 씨 저서가 민단-총련 화해 막았다"

[분단 그늘 속 재일교포 사회③]풀리지 않은 과거사, 현실의 발목 잡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얼마 전 인터넷을 살피다 깜짝 놀랐다. 우연히 들른 한 블로그에서 자신의 사진을 본 것. 북한과 일본의 수교를 촉구하는 유인물을 나눠주는 장면이었다. 사진 밑에는 "북조선으로 꺼져버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댓글은 더욱 살벌했다. 온갖 욕설이 가득했다.

이 블로그는 일본에서 이른바 '넷우익(Net右翼)'이라 불리는 이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었다. 직접 얼굴을 맞댄 자리에서는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문화가 있는 일본에서는 유독 온라인 공간에서 과격한 우익 선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넷우익'은 일본 사회에서 이런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물론 이런 이들이 일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도 많다. 그리고 한국의 대표적인 우익 언론인인 조갑제 씨의 저서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이런 영향력과 조 씨의 저서가 담고 있는 내용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떨어지는 아베의 인기, 위세를 떨치는 일본 우익

오는 29일, 일본 참의원 선거가 있다. 그런데 북한에 대해 강경한 목소리를 내면서 인기를 끌었던 아베 신조 현 총리의 지지율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넷우익'의 활동은 더욱 거세다. 이들이 자주 모이는 사이트에는 북한과 재일조선인총연합회(총련)을 비난하는 글이 계속 쌓이고 있다. 올라오는 글들의 과격한 수위 역시 마치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계속 높아진다.

이런 흐름을 지켜본 재일교포들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아베 총리가 곤경으로 몰릴수록, 그를 지지하는 우익의 활동은 더욱 과격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부(負)의 상관관계에 있는 셈이다. 게다가 최근 북한을 둘러싼 동북아 정세의 기류도 바뀌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넷판은 지난 9일 "미국 정부가 북한과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을 전환하기 위한 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이르면 올해 안에 이 문제를 놓고 북한과 협의를 시작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이 북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경우, 이는 북-미 관계 정상화의 결정적인 계기가 될 전망이다.

그런데 이처럼 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일본 내 우익들의 입지는 좁아진다. 그리고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우익들은 북한과 총련에 대해 더욱 강경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우경화하는 일본, 위축되는 총련

일본 우익의 목소리가 과격해질수록 불안해지는 것은 일본 사회의 소수자들이다. 또 이런 소수자들 가운데 가장 큰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게 총련계 교포들이다.

일본의 부실채권 정리기관인 '정리회수기구'는 지난달 28일 도쿄 도심에 있는 총련 중앙본부 건물과 토지에 대해 처분금지 등기를 마쳤다. 총련의 주요 재산을 사실상 압류한 것. 이제 경매 절차만 남았다. 파산한 총련계 조은신용조합 부실채권을 인수한 정리회수기구가 총련을 상대로 제기한 627억 엔의 공적자금 반환소송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준 지난달 18일 도쿄지방재판소의 판결에 따른 것이다.

총련이 건물과 재산을 잃고, 거리에 나앉게 된 사실이 갖는 의미는 크다. 북한과 일본의 수교가 맺어지지 않았던 탓에 일본 내에서는 총련이 실질적인 북한 대사관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 역시 총련의 이런 위상을 인정해 왔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이면 무라야마, 하시모토, 모리 등 전직 총리가 총련 본부 건물에서 열린 축하 파티에 참석하곤 했다.

또 일본 정부는 총련 본부 건물에 대해 외교 공관과 같은 기준을 적용해 고정 자산세를 면제해 왔다. 그리고 매년 7월 주일프랑스대사관에서 열리는 프랑스 혁명 기념 파티에는 총련 국제국장이 각국 대사와 함께 초대됐다.

"편법으로 건물 지키려고? 사기로 건물 빼앗으려고!"…일본 언론의 왜곡 보도

그런데 도쿄지방재판소의 판결이 나오기 전인 지난달 12일, 일본 언론은 "전직 공안조사청 장관인 오가타 시게다케 씨가 '하베스트 투자고문'이라는 투자자문회사를 만든 뒤, 이 회사 앞으로 총련 본부 건물을 등기이전했다"고 보도했다. "오가타 시게다케 씨가 재정난을 겪고 있는 총련 건물의 차압을 막기 위해 취한 조치"라는 게 당시 일본 언론의 해석이었다.

공안조사청은 한국의 국가정보원과 비슷한 기관이다. 그리고 총련은 공안조사청의 주요 정보기관의 전직 수장이 편법으로 총련 건물을 지키려 했다는 보도의 파장은 컸다.

아베 총리는 "어떻게 (총련을 감시해야할) 전직 공안조사청 장관이 그럴 수 있느냐"며 격한 분노를 드러냈다. 언론도 여기에 동조했다. 일본의 주요 언론은 총련, 그리고 총련과 가깝게 지냈던 일본 사회 저명 인사들에 대해 대대적으로 비난했다. 이런 보도에 힘입은 일본 우익들은 오가타 시게다케 씨의 집 앞에서 연일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총련의 변호인을 맡은 전(前) 일본 변호사협회 회장 쯔치야 코켄 씨의 집 앞에서도 마찬가지의 시위가 벌어졌다.

그런데 최근 일본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오가타 시게다케 씨가 총련을 위해 편법을 동원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은 지난 2일 "도쿄지방검찰청 특수부가 오가타 시게타케 전 공안조사청 장관이 '사기'를 벌인 증거를 찾아냈다"고 보도했다. 총련이 건물을 미리 팔아 차압을 피하려한 것이 아니라, 전직 정보기관 수장이 가공의 투자자를 내세워 총련 측을 속인 뒤, 건물을 넘겨받으려 했다는 것이다.

〈아사히 신문〉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불과 한 달 전에 나온 아베 총리의 격한 발언, 그리고 일본 언론의 호들갑은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일이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 달 전의 보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있다.

민단-총련 화해, 일본 언론의 왜곡 보도가 찬물 끼얹어

언론의 이런 경박한 태도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리고 꼭 일본 언론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북한, 그리고 총련에 대해서는 유독 이런 경향이 심하다. 진보, 보수의 구분 없이 일단 비난부터 쏟아 붓고 보는 것이다.

북한과 총련에 대한 이런 태도가 선명하게 드러난 또 다른 사례로 지난해 5·17선언에 대한 일본 언론의 보도를 들 수 있다. 지난해 5월 17일,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단장이었던 하병옥 씨는 다른 민단 관계자들과 함께 총련 본부를 방문했다. 그리고 서만술 총련 의장을 만나 부둥켜 안았다. 총련 본부 건물은 순식간에 눈물바다를 이뤘다. 지난 60여 년 간, 서로를 갈라 세웠던 이념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날 양 측은 △6·15 민족통일대축전 일본지역위원회 공동 참가 △8·15 기념축제 공동개최 등의 내용이 담긴 5·17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일본 교포 사회는 물론, 한국에서도 환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일본 언론의 반응은 달랐다. 민단과 총련의 화해를 뜻하는 5·17선언이 나오자, 일본 언론은 "하병옥 (당시) 민단 단장이 총련계 학교 교사를 지낸 적이 있다"며 민단 지도부에 대해 색깔몰이를 했다. 물론 하병옥 씨가 젊은 시절 총련계 학교에서 일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30년간 민단에서 간부로 활동해 온 사람이다. 30년 전이면 한국에서 박정희 군사정권이 집권하고 있던 시절이다. 당시 민단은 박정희 정권을 적극 지지했고, 총련 및 북한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다.

그뿐 아니다. 당시 일본 언론은 지도부의 결정에 반발하는 민단 내 움직임은 확대 보도하는가하면, 민단이 일본 사회 내에서 큰 불신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협박까지 일삼았다. 또 "민단이 총련의 산하 단체가 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보도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왜곡 보도가 나왔다. 5·17선언에는 민단이 그동안 주장해 온 △지방참정권, △탈북자 지원제도, △모국 방문 등 세 가지 사항은 담겨 있지 않다. 5·17선언이 6·15와 8·15 행사에 민단과 총련이 함께 참가한다는 수준의 합의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의 일부 언론은 "민단이 이런 세 가지 사항을 '포기'하는 것을 전제로 총련과 화해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한국의 일부 언론 역시 이런 보도내용을 소개했다.

명백한 오보였지만, 교포 사회에 미친 영향은 컸다. 5·17선언을 환영하던 교포들 사이에서도 불안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재일 교포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참정권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이다. 그리고 일본 사회 내에서 극심한 탄압을 받고 있는 총련과 한통속으로 취급당할 수 있다는 불안이다.

이는 단지 막연한 불안이 아니었다. 일본 정부는 교포 사업가들에 대한 세무조사 압박을 가했다. 그리고 교포들이 운영하는 금융기관에서 일본계 자금이 빠져나가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민단 보수파 "조갑제 씨는 '한국의 권위 있는 언론인'이다"

5·17선언을 반대했던 민단 내 보수파는 이런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지난해 6월24일 열린 임시 중앙위원회에서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다. 결국 당시 민단 지도부는 이런 반발에 굴복했다. 5·17선언은 폐기됐고, 하병옥 단장은 사퇴했다. 그리고 5·17선언에 반발했던 정진 씨가 새로운 민단 단장으로 선출됐다.

결국 60년 만에 이뤄진 민단-총련 화해는 불과 한 달여 만에 무산됐다. 그리고 총련은 본부 건물까지 매각되는 등 곤경에 빠졌고, 민단은 종전의 보수적 색채가 더욱 짙어졌다.

'5·17선언의 폐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일본 언론과 정부의 태도다.
▲ 조갑제 씨의 책 〈김대중의 정체(金大中의 正體)〉오른쪽이 일본어 번역본이다. ⓒ프레시안

이들은 거의 한 몸처럼 움직이며, 민단과 총련의 화해를 방해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변수가 있었다. 조갑제 씨의 저서 〈김대중의 정체(金大中의 正體)〉다.

민단 내 보수파는 이 책을 대대적으로 구입하여 지난해 6월 24일 민단 임시 중앙위원회를 앞둔 무렵, 교포들에게 배포했다. 임시 중앙위원회가 열린 장소에도 물론 비치됐다. 조갑제 씨는 이 책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김일성과 내통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2000년 6·15선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약점을 잡고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적화통일 전략의 일환"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조 씨의 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민단과 총련의 화해는 김정일-김대중-노무현의 3자 커넥션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주도하는 것은 김정일이다"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난 6·15선언이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따른 것이듯 민단과 총련의 대표가 만난 5·17선언도 마찬가지다"라는 논리다.

한국 내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 이런 주장이 당시 일본 교포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됐다. 일부 언론인들은 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기사를 쓰기도 했다. 민단 보수파는 조갑제 씨를 '한국의 권위 있는 언론인'으로 소개했다.

사문화된 반국가단체 규정이 현실의 화해를 가로막다

그런데 조갑제 씨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김일성과 내통한 인물'로 규정한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반(反)국가단체인 한민통의 수괴"라는 점이었다.

1981년 1월 내란 음모 등의 혐의로 신군부에 의해 기소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대법원 판결 내용과 같다. 그리고 독재정권을 지지한 민단의 민주화를 요구하다 제명된 이들이 결성한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근거는 1978년 대법원 판결이다. 당시 대법원은 공안당국이 '학원가에 침투한 재일교포 간첩'으로 지목된 김정사 씨에 대한 판결문에서 김 씨와 연계돼 있다는 혐의를 받은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못박았다. (☞관련 기사 : 유리창의 테이프 자국이 뜻하는 것은?…"'한통련의 진실', 이제는 밝히자")

하지만 1977년 '김정사 사건'은 독재 정권이 조작한 간첩 사건이라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나왔다. 공안당국이 '대학가에 침투한 간첩'으로 지목한 김정사 씨는 법정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았음에도, 채 1년이 지나지 않아서 풀려났다. 터무니없는 조작 간첩 사건이 빈발하던 시기였고, 이렇게 갑자기 간첩으로 지목된 이들도 오랜 수형 생활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 씨의 짧은 형기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리고 '반국가단체'라는 한민통의 후신인 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관계자들은 현재 한국을 자유롭게 왕래한다. 이런 상황에서 1970년대 말에 내려진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김대중 전 대통령 및 민단 지도부에 대해 색깔 공세를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에서 형식적으로는 한민통·한통련이 '반국가단체'다. 그리고 이런 사문화된 규정이 민단과 총련 화해 움직임의 발목을 잡았다.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가 현실의 장애물이 된 셈이다.

2007년 하병옥 전 단장 제명, 1970년대 한민통 제명과 닮은꼴

한국에서는 한동안 잊혀졌던 이름인 한민통·한통련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계기는 또 있다. 지난달 15일, 민단은 하병옥 전 민단 단장을 제명했다. 총련과의 화해를 시도했지만, 정작 하 전 단장은 진보, 좌익 등의 단어와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난 30년 간 민단 간부로 일할 수가 없었다.

이념적으로는 북한과 총련을 적대시하는 역대 민단 단장과 다를 바 없던 하 전 단장이 총련과 화해를 시도한 것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변화의 물결 때문이다. 재일 교포 사회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한국에서 민주화가 이뤄지고, 2000년 6·15선언으로 남북관계가 질적으로 변했다. 이렇게 모국의 상황이 크게 변했는데, 재일 교포 사회는 여전이 과거의 그늘에 머물러서야 되겠느냐"는 위기감이 오래 전부터 감돌았다. 하 전 단장은 이런 정서를 수용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모국의 변화에 힘입어 민단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끝내 실패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을 주도한 사람은 민단에서 제명당했다. 한민통 결성을 주도한 이들이 1970년대 초 겪었던 상황과 닮았다.

한민통·한통련 회원들 역시 모국에서 일어난 변화, 즉 4·19혁명을 계기로 민주주의에 눈을 떴다. 그리고 여전히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민단의 변화를 시도하다 민단에서 제명당했다.

"취직도 못 하는 한국인, 부끄러웠던 이름이 자랑스러웠던 순간"

하병옥 전 단장의 제적 문제가 논의되던 무렵, 도쿄에서 한민통의 후신인 한통련 김정부 의장을 만났다. 김 의장의 삶은 재일 교포 2세로서 한국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이들의 전형에 가깝다.

형제가 모두 한통련 활동가인 김 의장의 본적은 제주도다. 그리고 일본 오사카의 이크노구에서 자랐다. 과거 이카이노, 즉 '돼지를 기르는 들판'이라 불렸던 그곳이다. (☞관련 기사 : "조선 사람도 맞으면 아파하는구나")

1930년대 말, 일본에 건너온 그의 부모 역시 여느 재일교포와 마찬가지의 삶을 살았다. 극심한 차별 속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고, 어려운 형편에도 자녀 교육에 대해서만큼은 아무 것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형제들이 모두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김 의장의 동생 김창오 씨(한통련 오사카 본부 사무국장)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종종 "어차피 너희가 대학을 나온다 한들 정상적인 취업은 힘들 것이다. 재일한국인이라는 꼬리표 때문이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의 주류로 살아가는 일본인들과 마찬가지의 교육을 받았다는 점에 대해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카이노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 '한국인'이라는 점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 본 기억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대학에 입학한 뒤, 그는 신체장애가 있는 친구와 가깝게 지냈다. 차별받는 소수자라는 점에서 서로 닮았기 때문이었다.

스스로에 대해 "그저 그런 재일교포 2세에 불과했다"고 평가하는 그는 우연한 계기로 삶이 바뀌었다. 1960년대 말, 대학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우연히 펼친 잡지에서 한국 민주화 운동가들에 대한 기사를 접했다. 당시 일본에서 발행된 진보 매체들은 한국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이런 기사에 등장한 한국 민주화 운동가들의 삶은 아름다웠다.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막연한 열등감을 갖고 있던 그는 그때 처음으로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이런 자부심을 잊지 않았다.

이어 그는 일본 정부의 출입국관리법 개악안 반대 투쟁에 참가했고, 당시에는 민단 산하였던 재일한국청년동맹(이하 한청)에도 가입했다. 한청 활동을 통해 민주주의와 민족 문제에 대해 보다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그는 1973년,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을 계기로 직업적 활동가가 됐다. 여느 한통련 활동가와 마찬가지로 그의 삶 역시 김 전 대통령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셈이다.

이후 그는 민단 민주화 운동, 한민통(한통련의 전신) 결성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한민통·한통련의 주요 간부를 계속 맡았고, 지난 2003년 한통련 관계자들의 한국 방문을 성사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5·17선언 이후, 일본 언론의 '아주 노골적인 방해'

다음은 김 의장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프레시안 : 지난해 5·17선언이 폐기된 후, 약 1년이 지났다. 민단과 총련의 화해를 뜻하는 5·17선언은 재일교포 사회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큰 관심을 모았는데, 민단 내부 반발로 무산돼 아쉽다는 목소리가 높다. 5·17선언의 직접적인 당사자는 아니지만 민단 내부에서 통일운동을 하다 제명된 이들이 결성한 한통련 입장에서는 생각이 복잡할 것 같다.

김정부 : 잠시 1970년대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 당시 민단 내에서 소위 '조직 분규'라는 게 심각했다.

민단 민주화 운동이 전개된 것인데, 많은 활동가들이 "민단 지도부의 배후에는 박정희 독재 정권이 있다. 그리고 일본 정부 역시 배후 세력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배후 세력으로 지목된 이들은 실제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배후 세력'이라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해 5·17선언을 둘러싼 논란에서 나타난 양상은 다르다. 민단과 총련의 화해를 방해한 세력은 아주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누구에게나 쉽게 눈에 띄었다.

민단과 총련의 화해가 추진된 배경은 거대한 시대적 흐름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재일 교포 사회의 인식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 이후 진행된 남북 화해의 흐름 말이다. 그리고 이처럼 거스르기 힘든 흐름 속에서 이뤄진 것인 만큼, 그것을 저지하려는 세력도 예전처럼 조용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정도로는 막기 힘든 흐름이니까.

일단 일본 언론의 보도방식이 아주 노골적이었다. 5·17 선언이 나온 직후, 일본 신문 사회면을 펼치면 "민단 지방 본부가 중앙 본부의 결정(총련과의 화해 시도)을 비난했다"는 기사가 계속 등장했다. <산케이>, <요미우리> 등 보수 매체만이 아니었다. <아사히>, <마이니치>, <니혼게이자이> 등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모든 언론이 한 목소리로 "민단이 총련에게 놀아났다"며 민단을 비난했다. 그리고 5·17 선언에 비판적인 목소리만 인용하여 보도했다.

최근 일본 사회에서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 높아진 것을 감안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보도였다. 상당수의 일본인들은 민단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관심을 갖는 이들도 드물다.

그런데 왜 일본 언론은 독자들이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을까. 친하게 지내는 기자에게도 물어봤지만 "잘 모르겠다"는 대답만 들었다.

미 대사관 일등 서기관이 민단을 찾다

이처럼 민단과 총련의 화해에 찬물을 끼얹는 보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일본 정부와 정치권 역시 분주하게 움직였다.

일본 의회에서 한 의원은 경찰청장을 상대로 "'파괴방지법' 적용대상에 총련이 포함돼 있다. 총련과 손잡은 민단도 적용대상에 포함시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파괴방지법은 옴진리교 지하철 독가스 테러 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법이다.

이런 질문에 대해 경찰청장은 "그렇지 않아도 민단을 예의주시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어 민단 건물과 재산에 대해 적용돼 왔던 각종 세금 혜택을 폐지하겠다는 발표가 쏟아졌다.

경찰은 교포들이 운영하는 파친코 사업장 등에 대한 감시를 노골적으로 강화했다. 여기에 국세청의 세무조사 압박까지 겹쳤다. 더불어 교포들이 운영하는 금융기관의 자금이 총련을 통해 북한으로 흘러들어갈지 모른다며 일본계 자금이 빠져나가는 흐름도 있었다. 교포 사회가 불안감에 휩싸이는 것은 당연하다.

앞서 민단과 총련의 화해를 방해하는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라고 말한 이유는 또 있다. 지난해 민단을 취재한 <민족21> 기자는 "5·17 선언 발표 직후, 주일 미국 대사관 일등 서기관이 민단을 방문했다"고 밝혔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민단 관계자가 미국 대사관 서기관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구나 대사관 일등 서기관이 직접 민단을 찾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다. <민족21>에 따르면 당시 미국 대사관 일등 서기관은 민단 관계자들에게 "라이스 국무부 장관과 크리스토퍼 힐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가 5·17선언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는가. 5·17선언을 둘러싼 미국과 일본 정부 차원의 조직적 움직임이 있었다는 뜻이다.

일어로 번역된 조갑제 저서, 5·17선언 이후 대대적으로 팔려

프레시안 : 5·17선언이 나온 직후, 일본 내 우익단체의 움직임이 만만치 않았다고 들었다.

김정부 : 그렇다. 한통련 사무실에도 총련과 손잡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밥이 담긴 문서가 팩스로 전송됐다. 발신지는 분명치 않다.
▲ 한통련 김정부 의장.ⓒ프레시안

그런데 한국의 우익 언론인이 미친 영향도 컸다. 조갑제 씨다. "한통련은 반(反)국가단체다.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반(反)국가단체의 수괴였으므로 김일성과 내통한 인물이다. 따라서 김일성과 내통한 김대중이 김정일과 만나 발표한 6·15선언은 북한의 대남적화 활동의 일환으로 봐야한다"라는 내용이 담긴 조 씨의 저서가 일본어로 번역돼 나왔다.

그리고 서점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 했던 그 책이 5·17선언이 나온 후, 대대적으로 팔렸다. 재일 교포들은 그 책을 쓴 조갑제 씨에 대해 잘 알지 못 했다. 우리는 조 씨가 한국에서 갖는 영향력은 크지 않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교포들에게는 조 씨가 '권위있는 잡지 편집장 출신 언론인'이라고만 알려졌다.

결국 민단과 총련이 함께 6·15행사에 참석한다는 내용이 담긴 5·17선언에 대한 반발 여론이 교포 사회에서 일었다. 이런 흐름도 5·17선언이 무산된 이유 중 하나다.

프레시안 : 5·17선언은 결국 무산됐다. 이에 따라 총련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탄압, 그리고 민단의 보수화도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북방외교' 추진한 노태우처럼…."

김정부 : 잠시 노태우 정권 시절을 떠올려 보자. 노태우 정권은 군사정권의 연장에서 출범한 것이지만, 1987년 6월 항쟁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런 노태우 정권이 가장 먼저 들고 나온 정책이 '북방외교'였다.

물론 북한을 압박하는 공세 일변도의 정책이었다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국가와도 외교 관계를 맺는다"라는 것은 과거에 비하면 상당한 진전이다. 이런 진전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시대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미국 등 주변 강대국도 이런 흐름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노태우 정권의 '북방외교'를 용인했다.

지난해 하병옥 민단 집행부가 추진한 5·17선언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우리는 하병옥 전 단장에 대해 잘 알고 있다. 5·17선언을 반대한 세력과 이념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변화를 추구했다. 지난 2000년 6·15선언으로 비롯된 변화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요컨대 시대의 흐름이 먼저다. 집행부의 변화는 그 다음이다.

5·17선언을 반대한 민단 보수파는 걸핏하면 '올해말 대선이 끝난 뒤'를 이야기한다. 올해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승리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될 경우, 남북 관계는 과거로 회귀하리라는 전망이다. 또 이렇게 되면 수구 보수 색채를 일관되게 유지해 온 민단의 위상도 높아지고, 과거 군사 정권이 그랬듯 민단에 대한 지원도 강화되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한 번 물꼬가 트인 역사의 물줄기는 갑자기 돌아설 수 없다. 지금 남과 북의 교류가 얼마나 활발한가. 그리고 이런 교류가 남과 북에 조금씩이나마 변화를 낳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단지 대통령이 바뀌는 것만으로 이런 흐름과 변화를 모두 되돌린다?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왜 우리만 위로받아야 하나"…"'일본 우경화'를 걱정하는 이여, 함께 슬퍼하자"

프레시안 : 5·17선언을 반대했던 새로운 민단 집행부 역시 결국은 시대적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에서 어느 후보가 당선되건, 민단과 총련의 화해 움직임은 재개될 것이라는 전망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김정부 : 아주 넓은 역사적 시야로 살피면 그렇다. 하지만 당장의 현실적 조건만 놓고 보면 그렇지 않다. 앞서도 지적했듯 5·17선언을 반대한 것은 민단 내 보수세력만이 아니었다. 일본 정부의 움직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미국, 심지어 한국 내 보수세력까지 한몫했다. 이들이 바뀌지 않고서는 쉽지 않다.

일본 사회 내의 진보 인사들은 1971년 민단 단장 선거를 흔히 이야기한다. 당시 김재권 주일 공사가 터무니 없는 흑색선전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개혁 진영이 당선됐더라면 재일교포 사회의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1971년 민단 단장 선거가 치러진 다음해에 한국에서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이런 조건 하에서 개혁 민단이 제대로 운영될 수 있었을까. 또 한국·미국·일본 사이의 정치적 역관계가 여전한 상태에서 무사히 개혁이 이뤄질 수 있었을까. 나는 이런 질문에 대해 회의적이다. 재일 교포 사회의 민주화는 한국의 민주화 및 자주화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한국 사회의 과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단의 민주화가 온전히 이뤄질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5·17선언이 무산된 직후, 일본인 친구들에게서 자주 연락이 왔다. 주로 위로하는 말을 전한다. 재일교포 사회가 모처럼 화해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안타깝다고 말한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 우리가 위로받아야 하는가"라고.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곤 했다.

"5·17선언의 무산은 재일 한국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5·17선언이 나온 직후, 일본 언론과 정부의 반응에서 알 수 있듯 일본 사회의 총체적인 우경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본 사회의 우경화가 낳을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5·17선언 무산을 보며 함께 슬퍼해야 한다. 그런데 왜 당신은 위로하고, 우리는 위로받는가.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해야 한다. 그렇게 한국과 일본, 재일교포 사회를 함께 바꿔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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