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이날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6월항쟁을 기렸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6.10 항쟁은 국민이 승리한 역사이지만 아직 절반의 승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며 "지역주의와 기회주의 정치를 청산하는 것이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과제"라고 밝혔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안타까운 심정' 못지 않게 6월항쟁 20주년을 씁쓸한 심정으로 맞이한 이들이 있다. 이들이 말하는 '미완의 민주화'의 상처는 훨씬 더 깊고 크다. 양심수가 돼 갇혀있는 사람들, 민주화 운동의 상처에서 회복되지 못한 사람들이 아직도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날 전국 1000여 개 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87년 6월항쟁 20주년 계승 민간조직위원회'가 주최한 '범국민대행진' 행사에서는 아직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 이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들은 "정부의 화석화된 기념행사를 뛰어넘어 현재적 의미와 미래 전망을 제시하고자 했다"며 서울시청광장에서 집회를 가진 뒤 명동성당 앞까지 6월항쟁 재현 행진을 벌였다. 700여 명의 시민들이 이날 행진에 동참했다.
"87년 뒤 20년, 허세욱과 이시우와 김성환이 있다"
시청광장 집회에서 발언에 나선 '다함께'의 한 활동가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허세욱이 있고, 이시우가 있고, 김성환이 있다"고 요약했다.
지난 3월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중단을 외치며 분신한 뒤 끝내 숨을 거운 고 허세욱 씨, 비무장지대를 찍은 작품들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48일간 옥중단식을 감행한 사진작가 이시우 씨, '무노조 경영'을 내세우는 삼성과 싸우다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국제앰네스티에 의해 양심수로 지정된 뒤에도 계속 수감 중인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
이들은 각각 다른 의미에서 6월 항쟁으로 인해 '많은 것이 변했다'는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대변한다는 것이었다.
이어 발언에 나선 한 시민은 "정치인들은 민주화 세력이었기 때문에 정당성을 다 가졌다고 주장하지 말라"며 "20년 전보다 억압받는 민중들은 더 많아졌다"고 강조했다.
이날 민가협 어머니들과 함께 보라색 손수건을 모자에 두르고 행사에 참석한 김성환 위원장의 부인 임경옥 씨는 "아침에 일어나니까 눈물이 나더라"며 "착잡하다"고 말했다. 그는 "1987년 김 위원장은 부평에서 한독금속 노조를 만들었다"며 "386세대들이 그렇게 얘기하는 87항쟁의 주역 중 하나인 그가 20년이 지난 오늘 아직도 징역살이를 하고 있는 현실에 정말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고 밝혔다.
명동성당 앞에서 진행된 기념식에서 한국진보연대(준) 정광훈 공동준비위원장은 "이제 민중을 위협하는 것은 총칼이 아닌, FTA 협정문에 싸인을 하려는 만년필"이라며 "오늘은 기념행사가 아닌 새로운 87년에 대한 도전으로, FTA 박살을 위한 다짐으로 기억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여연대 김민영 사무처장은 "정부는 비정규직과 영세업자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이라크 파병은 또 연장한다고 하며 또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친 농민들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우리는 똑똑히 봤다"며 "스스로를 민주정권이라 외치고 있지만 반민주세력임을 자인하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시청 앞 광장은 상전벽해, 그러나 우리 뜻은 아직도…"
이날 행진에 앞서 선포문을 낭독한 고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씨 역시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이들이 있다"며 "이제 그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법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누구나 다 아는 장준하 선생의 죽음이 민주화를 위한 희생이 아니라고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 4월 민주화운동명예회복심의위원회는 고 장준하 선생에 대해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사망이 아니라고 결정했다. 이 위원회는 이밖에도 고 박태순, 김창수, 정은복, 정연관, 최온순, 장석구 열사에 대해서도 '불인정 결정'을 내렸다. 추모연대, 의문사유가족대책위원회 등은 이에 항의하며 지난 5월 21일부터 민주화운동심의위원회에서 농성을 진행 중이다.
그는 "오늘 우리들은 세종문화회관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며 "20년 전과 지금, 서울시청 앞 광장은 상전벽해로 변했지만 우리의 뜻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추모연대와 의문사대책위 등은 이날 오전 8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민주열사 불인정 결정 철회 및 사과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으며 오전 10시에 열린 공식행사 참석을 거부했다.
"87년 민주화의 요구, 시장권력의 자유와 혼동하는 정부"
이날 행진에 참석한 7080민주화학생운동연대의 한대희 운영위원은 "민주주의와 민주화의 가치에 대한 교육이 그간 부족하지 않았나"라며 안타까워했다.
20년전 '현장운동'을 했고 지금은 청소년을 위한 출판 일을 하고 있다는 그는 "우리 세대 때 4.19 혁명에 대해 느꼈던 감정만큼 지금 세대들에게 6월항쟁이 참 먼 일로 느껴지는 모습을 본다"며 "기본적으로 시장권력에 의한 지배에 익숙해진 오늘날, 87년 민주화가 결국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이어졌는지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고 밝혔다.
그는 "현재의 자유주의는 시장적 자유"라며 "87년 항쟁이 이루고자 했던 민주화와 시장권력의 자유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밝혔다.
이날 행사의 마지막 순서로 시민사회단체 공동선언문이 낭독됐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우리는 87년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지나 온 20년을 자랑스럽게 회고하며 인간의 존엄이 살아 숨쉬는 진보와 개혁을 향한 우리의 노력이 언제까지나 계속돼야 함을 천명한다"며 "그러나 지금 우리는 민주화의 성과가 위협받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며 밝혔다.
이들은 "우리는 이 모든 현상들이 이윤논리와 무한경쟁에만 매몰되는 천민 자본주의, 정글 자본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세계화 정책에 그 연원이 있음을 인식한다"며 "모든 이가 공생공영하는 새로운 사회,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새로운 미래를 위해 연대해 함께 싸울 것을 호소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미 우리 사회는 세대, 인종, 문화적 다양성 등이 공존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며 "우리는 우리 사회가 다문화공생 사회로 발전해 나가고, 이주노동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와 함께 나누며 사는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발전해 나가도록 힘껏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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