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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들도 술 먹고 찜질방서 잠자다 그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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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들도 술 먹고 찜질방서 잠자다 그랬다고?"

파산한 집안 돕겠다던 아들이 수천만원 빚진 사연

"하도 답답해서요. 도대체 방법이 없는지 궁금해서 이렇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나른한 봄기운이 몸 가득 밀려들던 25일 오후. 낯선 번호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속 남자는 밑도 끝도 없이 하소연을 시작했다.

그는 스물 여덟의 아들 얘기를 하려 한다고 했다. 결혼도 안 하고 잘 놀 줄도 모르는 '야문' 아들이 직장 생활 5년 만에 1억 원 가까이 빚을 지게 됐다는 것.

"이 녀석이 그런 일이 있으면 진작 나한테 상의를 했어야지. 회사에서 돈 갚으라고 보증인한테 독촉하고 채권단에서까지 독촉장이 날라오니까 얼마 전에야 저한테 털어놓은 거예요. 그동안 월급도 다 회사에 고스란히 갖다주고, 빚 내서 막은 돈만 3000만 원 정도래요. 그런데 아직도 3170만 원이 남았다니 이 일을 어째야 할까요."

그 아들은 해태음료의 영업직 직원이라고 했다. 그제서야 짐작이 갔다. 불과 10여 일 전 만났던 다른 음료회사 영업직 노동자들의 절망 가득한 눈빛이 떠올랐다. (☞ 관련기사 보기 : "일할수록 개인 빚만 쌓이는 회사, 믿기세요?")

"많이 팔면 팔수록 판매차익은 늘어난다"
▲ 사진은 지난 11일 롯데백화점 앞에서 음료회사들의 부당영업행위 강요를 비판하고 있는 음료회사 영업직 노동자들의 모습. ⓒ프레시안

"그 얘기를 듣고 미친 놈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하면서 회사를 계속 다녔냔 말이죠. 입사할 때 보증인으로 형을 세웠는데…."

아버지는 말 끝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해 왔는지를 한참을 설명했다. 아버지가 친구 보증을 섰다가 외환위기 때 집안이 파산하자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군입대를 한 아들이었다.

"제대한 후에도 집안살림에 도움이 되겠다며 음료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러다가 정식 영업직원이 된 게 지난 2003년입니다. 회사에서 매출신장 우수사원이라며 해외연수를 보내주기도 했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어요."

어떤 아버지인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아들을 탓할 수 있겠나. 사연을 전해들은 기자도 '이미 해태음료 외에도 롯데칠성, 동아오츠카의 판매구조를 익히 들어 알고 있어 5년 간 음료수를 지고 다니며 팔았다는 이 아들이 겪고 있는 "억울하고 황당한" 일이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아버지는 "하도 황당해서 회사에 전화로 알아봤더니 그동안 못 낸 미수금이 많아 4월 30일부로 강제퇴직을 시킬 거라고 했다"며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회사의 무리한 영업실적 강요에 따른 직원들의 가상판매와 덤핑판매,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한 판매차익이 고스란히 개인 부담으로 돌아오는 구조. 그 아버지의 아들 역시 그런 구조 속에서 1억 원 가까이 빚을 지게 된 것이었다.

"저도 잘 몰랐는데 음료회사들끼리 경쟁이 엄청나게 치열하더라구요. 일선 소장 입장에서는 실적이 중요할 수밖에 없고 소장이 실적을 막무가내로 종용하면 이에 못 이겨 판매원들은 대량판매가 가능한 대·중·소·마트 할인점 도매상을 찾게 되고 단가를 10~20% 정도 할인해서 판매하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랍니다.

할인판매나 가상판매를 하다보니 많이 팔면 팔수록, 실적을 많이 올리면 올릴수록 더 많은 판매차익이 생기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거죠. 그런데 회사 전산에는 다 제대로 판 것으로 입력하니 그 판매차익이 나중에 우리 아들이 판매금을 유용한 것으로 되더라구요."

"영업시간에 술 먹고 찜질방에서 잠이나 자던 사람들이나 그러는 거라구요?"

"소장과 전임자들이 판매는 원래 이런 방식으로 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대요. (가판이나 덤핑판매를) 주주나 임원들이 알면 안 되니까 형식적으로 전산에 올리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는군요. 우리 아들이 잘못한 거라면 그 말을 믿고 회사를 위해 매출실적을 올린 죄밖에는 없는데, 이제와서 전산에 입력돼 누적된 판매차액을 전액 공금유용으로 몰고 변제하라니요."

그 아버지는 "혹시 기자는 방법을 알고 있나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면서 "국민고충처리위원회를 찾아가볼까 한다"고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 앞으로 이메일도 보낼 거라고 했다.

통화를 마무리할 무렵 지난 12일 음료회사 영업직 노동자들에 대한 기사가 나간 후 걸려 왔던 롯데칠성 관계자와의 전화 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이 회사 관계자는 기자에게 "개인 빚을 내서 회사의 미수금을 갚는 사람은 성실하게 일하지 않은 사람들일 뿐"이라고 항의했다. 결코 구조의 문제가 아닌데 기사를 잘못 썼다는 것이었다. 그 관계자는 "회사에서는 엄격하게 가판과 덤핑을 금지하고 있다"며 "영업 시간에 술 먹고 찜질방에 가서 잠이나 자던 사람들이나 판매액을 못 채워 그런 짓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개인의 불성실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항변이었다. 그에게 문제는 참 단순했다. 이 관계자에게는 "회사에서 금지는 하고 있다 하더라도 일선 판매소에서는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확인했다"는 말도, 판매과정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설명도 소용이 없었다.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온 아버지의 아들도 "영업시간에 술 먹고 찜질방에 가서 잠이나 잤기 때문에" 이런 일을 겪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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