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밑줄이 쳐진 신문 스크랩, 메모가 가득한 강연 자료
지난달 중순께 허 씨가 민주노동당을 찾아와 "그동안 모은 FTA 관련 자료"라며 넘겨준 것이다. 물론 당시 이 상자를 받아든 민주노동당 관계자는 그것이 허 씨가 죽음을 결심하고 남긴 유품이라는 것을 알 리 없었다.
허 씨가 남긴 상자 안에서 나온 신문 조각들은 온통 빨간 사인펜으로 밑줄이 쳐져 있다. 신문 조각만 있는 게 아니다. 정태인 전 청와대 비서관 등 한미FTA 반대 논객들의 강연 내용을 정리한 자료도 있다. 역시 빨간색 밑줄, 그리고 강연을 들으며 남긴 메모가 빼곡하다.
허 씨의 유품에 대해 이해삼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은 "허세욱 씨는 언론인들이 작성한 기사를 스크랩하며 한미 FTA 협상에 대해 공부했다"며 "언론인들이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분신 이후, 언론을 접했다면 허 씨는 무엇을 느꼈을까?
지난 15일 허 씨가 사망한 뒤, '제2의 전태일'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왔다. 단지 분신을 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허 씨와 전태일은 닮은 점이 참 많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노동자로 살아간 이력이 닮았다. 또 전태일이 차비를 아껴 비슷한 처지의 동료 노동자들에게 풀빵을 사주곤 했던 것처럼 허 씨도 120만 원에 못 미치는 월급을 헐어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도왔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 고민하다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닮았다.
그런데 허 씨가 남긴 흰 상자는 전태일과 닮은 면모 하나를 더 일깨워준다. 전태일은 죽기 전, "대학생 친구가 있었더라면"하고 말했었다. 혼자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며 느낀 답답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공부한 근로기준법은 전태일을 더욱 절망하게 했다. 전태일의 현실과 법전의 내용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허 씨의 주위에는 대학을 나온 동료가 많았다. 그래서 혼자 신문을 스크랩하며 한미 FTA의 내용에 대해 공부할 때, 물어볼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한미 FTA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신문을 펼칠 때마다 허 씨는 무엇을 느꼈을까. 허 씨가 세상을 떠난 지금, 알 수 없다.
하지만 지난 1일 허 씨가 분신한 뒤, 만약 그가 언론 보도를 접할 수 있었다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는 분명해 보인다.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주류 언론은 한미 FTA가 가져올 미래를 장밋빛으로 칠하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허 씨는 분신 직전 동료에게 남긴 유서에 "4대 선결조건, 투자자-정부 제소건, 비위반 제소 합의해주고, 의제에도 없는 쌀을 연막전술 펴서 쇠고기 수입하지 말라"고 적었다. (☞ 관련 기사 : "미국기업에 한국정부 제소권 보장", '쌀은 지킨다'는 건 한미FTA 전략이 아니다 )
하지만 허 씨가 분신한 뒤에도 주류 언론은 이런 문제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리고 소위 개혁언론을 자처하는 매체들도 대부분 이미 나온 기사들을 서로 짜깁기 하는 수준에 그쳤다. 한미 FTA에 관한 기사라면 모조리 스크랩하던 허 씨가 만약 살아 있었더라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27년 전에는 근로기준법을 불살랐는데…기자라는 게 부끄럽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은 자신의 몸만 불사른 게 아니다. 정말 태워버리려 한 것은 '근로기준법'이었다. 분신 당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했다.
2007년 4월, 역시 자신을 불사른 허세욱 씨는 무엇을 함께 태우고 싶었을까. 정부 발표를 분칠하기에 급급한 언론, 중학교도 못 마친 노동자의 궁금증도 제대로 풀어주지 못한 언론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기자라는 직업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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