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회관에서 열린 '대학생의 의식변화와 노동운동에 대한 토론회'에서 박준식 한림대 교수(사회학)는 "과거 대학생이라면 당연히 갖고 있었을 '친노동, 반자본' 의식은 많이 약화됐다"며 "이번 조사 결과는 대학이 '진보의 아성'이었던 통념에 비춰 상당한 변화를 시사한다"고 밝혔다.
박준식 교수는 한국노총 중앙연구원의 의뢰를 받아 지난해 9월부터 12월까지 경기대, 국민대, 단국대, 동국대, 서울시립대, 숭실대, 연세대, 한성대, 한양대, 홍익대 등 수도권 10개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 615명을 대상으로 대학생 인식조사를 실시했다.
대학생들 "노동운동, 투쟁위주라 외면 받는다"
이 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55.9%가 노동조합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또 임시직으로 취직하게 될 경우를 가정했을 때에도 응답자의 62.2%가 노조 참여 의사를 밝히는 등 전체의 절반 이상이 노조에 참여 의사가 있다고 밝혔지만 현재의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다.
전체 응답자의 67.6%가 '노동운동은 현재 외면 받고 있다'고 대답했으며 그 이유로 '투쟁 위주의 운동노선(50.5%)'을 꼽는 등 현재 노동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념의 좌파적 편향성(16.7%)'도 '비정규직 등 소외계층에 대한 이익대변이 미흡하다(18.6%)'는 응답과 함께 노동운동이 외면받는 이유로 꼽혔다.
바람직한 노동운동의 노선과 관련해서는 전체 응답자의 57.7%가 '근로조건 개선 위주의 실리적 노동운동'이라고 대답했고, 노동조합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한 질문에서도 37.4%가 '임금인상 및 근로조건 개선'을 꼽았다. '비정규직 등 소외계층의 권익을 노조가 나서서 보호해야 한다'는 응답은 21%였고 '사회민주화를 위한 정치참여'는 3.1%에 불과했다.
또 자본주의에 대해 '너무나 문제가 많은 경제체제'라고 답한 비율은 7.2%로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다(22.7%)'고 대답한 비율까지 포함한다 하더라도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는 대학생은 전체 응답자의 29.9%에 그쳤다. 조사대상자 가운데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다'는 응답이 43.6%로 가장 많았고, 26.5%의 대학생은 '약간의 문제는 있지만 전폭적으로 지지할 만한 경제체제'라고 답했다.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위한 정규직의 임금 동결에 대해 '찬성한다'(46.4%)와 '반대한다'(46.6%)는 응답이 비슷하게 나왔다. 박준식 교수는 "대학생이 주로 정규직 취업 전망이 높은 집단이라는 점이 반영된 수치"라면서 "이같은 결과는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을 위한 정규직의 양보가 향후에도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보수적 경향' 강화
이번 조사결과는 특히 학년이 높아질수록 각종 질문에 대한 소위 '보수적 응답'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자본주의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학년이 높아질수록 긍정적 답변의 비율이 높아진 반면, 노조의 필요성과 관련해서는 고학년에 비해 오히려 1학년이 더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박준식 교수는 "1학년이 노조의 필요성에 대해 가장 긍정적이라는 조사 결과는 대학이 진보의 아성이라는 통념과 배치되는 것으로 대학의 변화를 시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 사회과학 세미나 등을 거치면서 고등학교까지의 사고와 다른 체계를 정립해 왔던 과거와 달리 오히려 학년이 높아질수록 노동조합 및 노동운동에 대해 소위 '보수적'인 사고를 갖고 있음이 확인됐기 때문. 이같은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박 교수는 "대학은 더이상 반자본주의 정서와 가치관을 학습, 내면화하는 장소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학생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와 관련해 '교내 복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견이 절반을 넘는 58.5%를 차지했으며 '구직난, 청년 실업 등 대학생의 당면 문제에 대한 활동이 중요하다'는 응답이 26.5%로 뒤를 이었다. 반면 상대적으로 '사회개혁을 위한 활동'(3.9%), '학원 민주화'(9.6%)에 학생회가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대답은 적었다.
"직업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금전적 보상"
그밖에도 이번 조사에서는 대학생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비중을 두는 점은 '금전적 보상'(90.6%)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인간적인 처우'(89.7%), '적당한 근로시간'(82.9%)도 중요하게 꼽혔다.
또 학생들은 안정적이고 물질적 보상이 상당히 높은 '4급 이상 고급공무원'(13%)을 가장 선호하는 직업으로 꼽았다. '대기업/은행간부'(11.8%), '대학교수'(9.0%) 등이 뒤를 이었다.
그밖에도 부모의 직업과 희망하는 직업 사이의 연관 관계에 대한 조사에서는 대체로 아버지의 직업이 본인의 희망직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증명됐으며, 아버지가 사무직인 경우 자녀의 희망직업이 명령 계통에서 이보다 한 단계 위인 관리직에 몰려 있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노동조합 필요하다" 75.6%…집단행동에 대해서는 "불가피한 것"
대학생들은 현재의 노동운동이 '외면받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노동조합의 '투쟁'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피력했지만 노동조합 자체에 대해서는 전체의 75.6%가 필요성을 긍정하고 있었다.
또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에 대해서도 절반 이상이 집단행동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회불안요인으로 제거되야 한다'는 응답은 3.3%에 불과하고 '노동문제 해결을 위한 최선의 방법(11.2%)', '최선은 아니지만 불가피(58.4%)'하다는 응답이 대체로 많았다.
흥미로운 것은 여성보다는 남성이,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보다는 군대를 경험해 본 사람이 더 집단행동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많이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박 교수는 "남성 가운데도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경우에는 근로자의 집단행동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비율이 훨씬 높다"며 "군대의 경험이 부정적 인식을 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파업 등 집단행동에 정부의 개입 여부에 대해서는 찬반이 비슷하게 나왔다.
대학생들이 '노동자'를 바라보는 인식은 어떨까? 응답자들은 대체로 경영자보다는 노동자들에 대해 더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회에 기여하는 정도에 대해서도 노동자의 기여도를 72%가 인정해 상대적으로 경영자(56%)보다 높았고, 응답자의 73%가 '노동자는 보수에 비해 일을 많이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학생의 사고 변화, 노동조합도 깊이 관심 가져야"
박 교수는 이날 발제문에서 "2000년대의 대학생들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대해 훨씬 높은 지지도를 보여주며 경쟁과 책임, 자유 등과 같은 요소를 더 강하게 지지하고 있지만 이것이 자본주의로부터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부작용에 대한 무관심과 곧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고 평가했다.
그는 "대학생들은 체제로서의 자본주의가 지닌 장점을 수용하면서 다른 한 편에서는 이러한 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교정하기 위한 사회적 개입과 양극화 해소 등 사회 통합을 위한 적극적인 투자에 대해 그 필요성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노조 역시 변화하는 대학생들의 사회의식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절실하다"며 "대학생의 노동운동에 대한 사고가 매우 협소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지만 경제주의에 매몰돼 있는 대학생의 노동조합에 대한 사고를 어떻게 전환할 것인지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했다.
박 교수는 또 "대학생들은 기존의 노조운동이 그들의 기대를 충족하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노조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다"며 "이 연구 결과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조직 노동의 사회적 지원과 지지 활동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과 더불어 기득권을 지닌 사회적 세력으로서 노조의 책임 있는 행동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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