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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거탑' 속에는 무엇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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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하얀 거탑' 속에는 무엇이 있나?

[교육과정 논란] '문과-이과 구분부터 없애자'<3>

지난주 <프레시안>은 최근 교육과정 개편을 둘러싼 논란을 소개하며 경직된 문과-이과 구분이 갖고 있는 문제에 관한 서울대 김영식 교수의 글을 실었다. (☞관련기사: "경직된 문과-이과 구분이 '황우석 사태' 낳았다"(기사보기), "문과-이과의 차이는 제도가 만든 허상에 불과"(기사보기))

김 교수의 글은 당초 예상한 것보다 훨씬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실제로 학교에서 수업을 하는 교사들의 관심이 컸다. 아래에 소개할 이수종 교사도 그 중 한 명이다.

서울 성사중학교에서 근무하는 이 교사는 '환경과생명을생각하는교사모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환경과 생태에 관한 문제의식을 키워 왔다. 환경 교육에 관심이 컸던 이 교사는 김 교수가 지적한 경직된 문과-이과 구분의 문제점에 대해 깊이 공감한다며 장문의 글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그는 학생의 적성이나 흥미보다 입시에서의 유불리가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진로지도의 현실, 문과-이과로 엄격하게 나뉜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사회에 진출한 제자와 친구들의 사례 등을 비판적으로 소개하며 기존의 통념을 깨는 새로운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게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이수종 교사의 글 전문을 2회에 나눠 싣는다. <편집자>

나는 중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는 교사다. 최근 <프레시안>에 실린 문과-이과 구분의 문제점에 관한 글을 읽고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펜을 들었다. 먼저 내 경험부터 이야기해야겠다.

내 이야기…'적성' 아닌 '점수' 때문에 '이과' 갔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지금과 마찬가지로 적성검사를 받았다. 결과를 보니 문과 이과 적성이 똑같았다. 하지만 나는 고민하지 않았다. 당연히 문과를 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택을 고민하게 만드는 요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고교 1학년 때 나는 교회에서 문집 만드는 일에 푹 빠져서서, 시험 보기 전날까지도 공부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지냈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없어서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했다. 여러 명이 모여서 아이디어 회의도 하고 밤참으로 라면을 끓여 먹으며 일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물론 여학생들과 같이 작업(?)을 한다는 짜릿한 재미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한 권의 책을 낼 때마다 느꼈던 뿌듯함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전교 석차가 120등이 떨어졌다. 그래도 문집 만드는 일을 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은 진지했다. 그래서 나와 상담을 했다. 결론은 진로의 변경. 내가 다니던 학교의 경우, 당시 바로 윗 선배들까지는 이과반 학생들이 문과 학생들보다 공부를 못 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나에게 이과를 권하셨다. 게다가 담임 선생님이 화학을 가르치셨는데, 다른 과목의 성적은 떨어졌지만 화학 성적은 우수했다. 당시 나는 선생님을 좋아했고 화학시험 공부만은 열심히 했으니까.

그래서 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이과를 선택했다. 그러나 막상 2학년에 올라가 보니 시대가 바뀌었는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거의 이과로 왔다. 막막했다. 조금만 공부하면 1등급을 받을 수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잘못된 예상이 돼 버렸다.

그래서 나는 2년 내내 이런 고민을 했다. "내가 이과에 적성이 있는가?" 만약 성적이 현저하게 떨어졌으면 난 미련없이 중간에 문과로 바꾸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적이 원래대로 회복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아마 나의 번뇌가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시험을 볼 때마다 고민했다. "시험이 끝나면 확실하게 결정하자." 그러나 신비한 마법이 작용한 것처럼 시험이 끝나면 고민은 사라졌다.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드디어 3학년이 되어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난 여러 분야의 직업 중에 교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우리 형도 교사였고 좋은 담임선생님들을 만나서 교사에 대한 인식이 좋았다. 대학에 와서 과학을 배우면서 문과와 이과에 관한 나의 갈등은 조금씩 사라졌다. 난 지구과학교육과를 졸업했는데, 자연과학의 다양한 분야를 배울 수 있었고, 교육학 과목을 통해 인문학의 다양한 영역을 섭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공 이외의 책도 폭넓게 읽었다.

그리고 교사가 된 후에도 좋은 분들을 만났다. 특히 환경운동과 환경교육을 하는 분과의 만남이 참 소중했다. 환경 분야에 대해 이해하려면 자연과학적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철학, 경제학, 사회학 등의 지식이 필수적이다. 초학문적인(transdisciplinary) 접근이 필요한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환경 문제다. 환경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자연과학적 현상에 대한 사회과학적 해석이 필요하다. 사회구조의 문제, 그리고 삶의 문제를 떼놓고 환경 문제를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자연과학 지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인문·사회과학 지식만으로도 부족하다. 둘 다 필요하다.

그래서 같이 활동하는 분들과 함께 철학, 사회과학, 환경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다. 이런 공부들을 통해 학생들에게 과학 수업을 하면서 단지 과학적 지식만이 아니라 과학기술이 함부로 쓰일 때 가져올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도 가르칠 수 있게 됐다.

인문학이 자연과학보다 쉽다고?…사지선다형 세대의 한계

본래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이 무렵이었다. 자연과학은 훈련을 받지 않으면 공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 과목을 이수하려면 수많은 시험을 거쳐야 하는 데서도 이런 특징이 잘 드러난다. 자연과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자연 현상을 수학적인 도구로 해석해야 하는데, 그게 혼자서 공부하기가 참 쉽지 않다. 그리고 실험도 해야 한다.

당시에는 인문학은 상대적으로 쉽다고 여겨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인문학 과목은 시험 치는 횟수가 훨씬 적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생각도 바뀌었다. 인문학을 보다 깊이 공부하게되면서부터다. 인문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니 대학 시절 강의계획서에 나열돼 있던 참고문헌을 꼼꼼하게 읽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과학 실험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시험을 얼마나 자주 보는가'의 여부로 학문의 난이도를 평가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하는 것 역시 깨달았다. 사지선다형 객관식 문제를 풀고 대학에 들어간 세대다운 판단 기준이었던 셈이다.

인문학을 깊이 공부한 분들이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들여다 봤다면 얼마나 답답했을까. 얼굴을 달아오르게 하는 기억이다.

물론 인문·사회과학이 자연과학에 비해 혼자 공부하기 쉬운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사회과학의 경우 우리의 삶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또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교양 강좌와 쉬운 입문서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 시절 전공과 달리 혼자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며 지식을 쌓은 분들도 많다.

하지만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자연과학 관련 책 읽기를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과학 책을 읽으면 주변의 삶과 관련지어서 생각하기가 어렵게 씌어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말로 번역된 자연과학 용어는 선뜻 그 개념이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것은 상당부분 자연과학 연구자들의 책임이다.

다행히 요즘에는 대중적인 교양과학서적이 많이 나와서 일반인도 자연과학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래도 나는 평소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이런 책을 쉽게 읽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보다 젊은 시절, 기초적인 소양을 닦아 두는 것, 그리고 관심을 잃지 않도록 꾸준히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공부는 젊을 때 하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맞나보다.

대학 시절 영어교육과에 다니던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교양과목으로 천문학을 배울 때 너무 재미있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시절 도무지 왜 배우는지 몰랐던 개념들이 요긴하게 쓰이는 것을 보니 신기하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로그함수를 왜 배우는지 몰랐는데, 이런 개념을 이용해서 별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는 것을 보면서 수학이 이렇게 사용되는 것이구나, 그리고 수학을 통해 자연 현상을 이렇게 쉽게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한창 머리가 좋은 시기에 자연과학의 개념들을 전문적인 내용보다 조금 쉬운 수준으로 배워둔다면 졸업을 해서 자연과학에 관련된 책과 개념을 배우는데 두려움이 적어지겠구나.'

제자들 이야기…일찍부터 진로 고민하지만 결과는?

서울 지역은 1990년대 중반부터 고입시험이 없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의 아이들은 과거의 아이들보다 즐겁게 학교에 다니지만 진로에 대해서는 예전보다 더 일찍 고민한다. 고교 입시가 있었을 때에는 모든 것이 시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진로지도는 뒷전이었다. 지도가 있다면 다만, 인문계 학교를 갈 것이냐 실업계 학교를 갈 것이냐 하는 정도였다. 그 기준도 뻔했다. 공부를 잘 하냐 못 하냐, 가정 형편이 대학 진학을 감당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 정도였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좀 과장을 섞어 이야기하면 꼴찌도 인문계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는 이유도 인문계 고교에서 하위권에 머무느니 실업계에 가서 '동일계열 진학' 정책을 통해 대학에 가겠다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두드러진다. 실제로 실업계 고교를 나와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이 상당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예전 같으면 고등학교에 가서 할 진로에 대한 고민을 앞당겨 하게 된다. 특히 서울처럼 고입시험이 없어진 지역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수학, 과학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의 여부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한다. 수학을 싫어하면 문과, 그렇지 않으면 이과. 이런 식이다. 그리고 이런 판단이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그리고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이어진다.

이것은 매우 안타까운 현상이다. 물론 자연과학이나 공학에 포함된 학문 중 상당수가 수학을 못 하면 공부하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이유는 뒷전에 놓인 채, 중고등학교에서 수학, 과학을 잘 하거나 좋아했는지의 여부만으로 진로를 결정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다. 그리고 이런 잘못은 교사들이 진로지도를 제대로 못 하고 있는 데서 빚어진 것이다.

물론 이렇게 진로를 택해서 아이들이 결과적으로라도 만족하면 다행이다. 그런데 그런 것 같지 않다.

내 제자 중 한 명은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지금 한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지금 단체의 자금모금 관련 부서에서 '공정무역'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커피 원두를 생산하는 동티모르 농부들이 제대로 된 노동의 대가를 받게 하고, 대신 한국의 소비자들은 유기농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국내에서 이뤄지는 농산물 직거래를 국제 규모로 넓힌 것이다.

그런데 이런 활동을 할 때, 그 커피가 왜 좋은 품종인지, 어떤 조건에서 키웠기 때문에 인체에 해가 적은지 알려면 자연과학 지식이 필수적이다. 물론 해당 분야 전문가의 조언을 받으면 된다. 하지만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개념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고등학교에서 '문과'를 택하기로 마음 먹은 후에는 이런 개념을 습득할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환경단체에서 일하다보면 이런 경우가 많다. 물론 반대 경우도 있다. 자연과학 계열을 전공한 활동가들은 각종 사회과학 개념에 대한 갈증이 크다. 어찌보면 우리 사회에서 경직된 문과-이과 구분에 대해 가장 큰 답답함을 느끼는 이들이 모인 곳이 환경단체다. 그런데 환경단체 활동이 우리 삶의 문제를 가장 최전선에서 고민하는 영역이라는 점은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삶의 문제를 푸는 해법은 어느 한 분야의 지식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지식이 통합돼야 한다. 그리고 현재의 경직된 구분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되겠으니 '글쓰기 공부'는 안 해도 된다?

시민단체가 아니라 회사에서 일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 다른 사례를 들겠다. 남자아이들의 장래 희망을 조사해보면 '컴퓨터 프로그래머'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학창 시절 공부는 못 했지만 컴퓨터를 잘 해서 성공한 사례들이 많이 소개돼서 더욱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아이들이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의 실상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과거처럼 한 천재적인 프로그래머에 의해서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지고 그것으로 경제적인 대박을 터뜨리는 시대는 지나갔다. 게다가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그렇게 천재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도 않다. 지금은 멀티미디어 시대이다. 그리고 다양한 소프트웨어들이 요구된다. 프로그래밍만 잘하면 좋은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컴퓨터 게임의 예를 들자면 디자인, 스토리 구성, 유행 파악 등의 능력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이과' 직업이라는 이유로 균형잡힌 지식 습득을 게을리한다면 어떤 문제에 부딪히게 될지는 뻔하다.

또 기업에서 사용하는 업무용 소프트웨어로 넘어가면 이런 문제는 더욱 중요해진다. 이런 소프트웨어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실무경험이 논리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지려면 소트웨어의 규모에 따라 프로그래머 수가 결정되어질 것이고 이들은 업무분석을 하고 각자 맡은 분야에서 논리적인 구조를 짜야 한다.

이런 대목이 게임 프로그래머와 다른 부분이다. 내가 만난 게임 프로그래머들은 대개 웬만한 예술가 빰치게 독특한 스타일로 다닌다. 때로는 전위적인 때로는 그냥 거리의 걸인 같은 복장으로 다니면서 자신만의 세계 속에 빠져 산다.

하지만 대개의 프로그래머들은 업무용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일을 한다. 이들에게는 사용자들의 불편함을 해결해주는 평범한 작업이 우선이다. 화려한 예술성보다 편리함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업무용 소프트웨어의 각 부분을 맡은 프로그래머들이 사용자들의 불편한 점을 파악하여 소프트웨어에 반영하고 있는지를 파악하여 감독하는 것은 참 어렵다. 현실 속에서 업무를 추진하며 느끼는 불편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아주 흔하다. 결과적으로 엉뚱한 프로그램이 탄생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 이런 불편을 가장 생생하게 체험한 집단이 교사들일 것이다. 교육정보시스템 개발과 관련한 혼란을 워낙 심하게 겪었으니까.

소프트웨어는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일의 처리를 돕는 수단이다. 그래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복잡하다. 그런데 보조수단인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사람이 대화 능력이 부족하다면,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여럿이 함께 모여 일한다면 결과물에 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대화와 소통이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처럼 정확하고, 논리적인 일을 처리하는 분야에서조차 그렇다. 하물며 좀 모호하고 애매한 성격의 일을 할 때는 말할 나위가 없다.

소프트웨어 개발의 경우만이 아니다. 다른 자연과학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거의 모든 연구가 팀 단위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런 협동 연구의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질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진로를 '이과'로 설정했다는 이유로 말하기, 듣기, 글쓰기를 소홀히 하고 있다면? 결과는 뻔하다. 지금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느끼는 답답함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일부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의 경우는 다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평범하다. 문과-이과로 나뉘어 교육받으면 아무래도 편향된 성향을 갖기 쉽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결코 문과-이과 중 어느 하나로 엄격하게 갈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두 가지의 통합을 요구하는 흐름은 점점 더 강화될 것이다. 고등학교 때 문과-이과를 엄격하게 구분해서 교육하는 것은 아이들이 졸업했을 때 현실에서의 대처능력을 떨어뜨리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관습처럼 내려온 문과-이과 구분의 틀 안에 이미 갇혀버린 아이들에게도 이런 사실을 빨리 알려야 한다.

문과-이과로 나뉘지 않는 삶, 왜 17살 아이들에게 구분 강요하나

요즘 한국 사회에서 교사는 '선택받은 직업'이라고 통한다. 월급이 다른 직업에 비해 많지 않지만 정년이 보장돼 있고 나이가 들면서 월급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이다. 젊을 때 조금 고생하면 나이가 들어서 충분한 대가가 온다. 그래서 요즘 교대, 사범대 인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단언컨데, 대부분의 교사들은 이런 이유로 직업을 택하지 않았다. 내가 교직에 들어설 때만해도 교사가 지금처럼 인기가 높지 않았다. 그 당시 결혼상담소에서 여교사의 인기는 지금과 비슷했지만, 남교사의 인기는 높지 않았다. 우리 형이 교사가 될 때에는 더 인기가 없어서 이직률이 상당히 높았다.

그럼에도 왜 교사를 택했는가. 학교에서 교사에게 요구되는 상황이 다른 곳에서보다 '인간적 상황'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에도 삶에서 가장 기쁜 일이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교사로서 학생을 만나는 일은 항상 설레는 일이다. 올해는 어떤 아이들을 맡을까? 때로는 나를 어렵게 하는 아이들 때문에 힘들기도 하고 또는 너무나 예쁜 아이들 때문에 기쁘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면 예쁘게 구는 아이들이 좋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를 성장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은 나에게 반항하고 말을 안 들어서 나를 어렵게 한다. 하지만 대부분 그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알고 보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런 아이들은 대개 이유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사들은 이들 보다 순탄한 성장을 하고 사회적 지위를 얻은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이해하려면 정말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한 사람에 대해서 알아 간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많은 것을 얻게 한다. 그리고 교사는 어떤 상황에서건 그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잘 알아야 이들을 올바르게 지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각기 다른 배경에서 자란 아이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교사들은 많은 공부, 경험, 대화를 해야 한다. '과학' 교사라는 이유로 심리학, 사회학 등에 대해 무관심해서도 안 된다.

특히 담임교사를 맡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결국 교사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이과-문과 지식을 구분해서 배우는 게 위험하다. 다행히 사범대에서는 수학이나 과학을 선택했다고 해도 교육학 과목을 통해 인문학을 접한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현실적인 대안은 많은 경험을 쌓고 선배들의 다양한 조언을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다양한 조언을 구하고 대화를 나누기위해서는 결국 폭넓은 지적 소양이 절실하다.

물론 이것은 내가 교사라서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다른 직업에 종사는 친구들의 경우를 봐도 비슷해 보인다. 대기업 본사에서 일하던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어느날 공장으로 발령이 났다. 업무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노조와 대화를 해야 할 상황이 생겼다. 그런데 '이과' 출신인 그 친구는 노조와의 관계를 풀어가는 게 영 쉽지 않았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인 다양한 측면을 폭넓게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평소 "나는 '이과' 출신이니까"하면서 자신의 지적 관심을 제한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상황은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학문을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철학을 전공하면서 현대 물리학의 중요한 개념을 피해가려 한다면 제대로 학문을 할 수 있을까. 물론 물리학 전공자와 같은 지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런 개념에 대한 '두려움'은 갖지 말아야 한다. 잘 모르는 게 있으면 주위의 관련 전공자와 대화를 나누며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현재의 경직된 구분이 이런 과정을 어렵게 하고 있다.

정치인, 경제인 모두 마찬가지다. 삶은 이렇게 문과-이과로 구분되지 않는데 왜 학교에서는 17살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사고를 협소하게 축소시켜라고 강요하는가?

기자들 주위에 자연과학 전공한 친구가 많이 있었더라면

'황우석 사태'는 이런 문제의 결정판이다. 황 박사의 연구가 낳을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일부 자연과학자들에 의해 지적돼 왔다. <수상한 과학>을 쓴 전방욱 교수나, <내일을 거세하는 생명공학>을 쓴 박병상 박사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황우석 사태가 터지기 전부터 상당히 전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문제점을 지적했으나 대부분의 언론은 이들의 말을 귀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일이 왜 생겼을까. 대부분의 기자들이 고등학교에서부터 문과-이과로 나뉘어 공부한 것이 한 원인이라고 본다. 물론 대학 시절 인문학을 전공했더라도 자연과학에 대한 소양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면 달랐을 수 있다. 게다가 인문·사회과학을 전공한 기자들은 생명공학에 관한 문제에 대해 설령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주위에서 관련 전문가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고등학교 2학년 이후 형성된 인간관계가 대부분 '문과'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과학자들의 발언과 활동은 비판적 언론활동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됐다. 그리고 이처럼 다른 영역으로부터 고립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은 종종 복마전에 가깝다. 그리고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내용도 모르면서 부화뇌동한다. 마치 요즘 인기를 끄는 드라마 '하얀 거탑'에 묘사된 것처럼….

'하얀 거탑' 속에서 벌어지는 복마전의 배후에는 문과-이과로 나뉜 지나치게 경직된 교육과정이 있다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 '문과-이과 구분, 이젠 없애자"
"경직된 문과-이과 구분이 '황우석 사태'낳았다"
"문과-이과의 차이는 제도가 만든 허상에 불과"
'하얀 거탑' 속에는 무엇이 있나?
'핀란드 교육'이 부럽다고요?
과학수업이 FTA를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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