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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이과의 차이는 제도가 만든 허상에 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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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문과-이과의 차이는 제도가 만든 허상에 불과"

[교육과정 논란] '문과-이과 구분부터 없애자' <2>

앞의 글에서 모든 분야를 문과나 이과 한쪽으로 구분하고 그 둘 사이에 엄격한 장벽을 두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을 살펴봤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은 대부분 장래에 인문학을 전공하기를 원하는 학생에게 수학과 자연과학에 대한 소양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억지로 차단하지 않고, 공학이나 자연과학 분야로 진출하길 원하는 학생도 꾸준히 인문사회과학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 자연스레 해결되는 문제다.

임의적인 문과-이과 구분, 학문적 정당성 없다

이제 현재의 문과-이과의 구분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를 차분히 따져볼 때가 됐다. 이런 구분은 우리에게 워낙 익숙한 것이었던 까닭에 이런 구분에 대해 의문을 던지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구분은 실체가 있는 본질적인 구분이 아니라 지극히 임의적인 구분이다. 문과와 이과 사이의 장벽은 각각에 속하는 분야들 사이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머릿속에 관념상으로 존재하거나 사회 속에 제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과와 이과 사이에서 우리가 느끼는 뚜렷한 차이라는 것은 양쪽 분야들의 내용과 성격에 실재하는 것이기보다는 이런 관념적, 제도적 장벽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문사회는 근본적으로 인위적인 문과-이과 간의 경계를 뚜렷한 실체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만약 이 경계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이고 임의적임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모든 분야를 두고 문과와 이과로의 구분을 하려 할 리도 없겠지만 굳이 해야 한다고 해도 그렇게 경직된 배타적 태도가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철학이 수학보다 경영학에 더 가깝다?

이 구분에 따라 구체적 분야들을 문과와 이과로 나누는 실제 관행을 살펴보면 이런 임의성은 곧 드러난다. 이 관행에 따르면 사람들은 우선 이과에 자연과학 분야들을 비롯해서 수학, 공학, 의학, 약학 등을 포함시키고 나머지 대부분의 분야들은 자동적으로 문과에 소속시킨다.

이에 따라 문과는 역사학, 철학, 문학, 어학 등의 인문학 분야에서부터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들, 그리고 신학, 경영학, 법학, 행정학, 교육학, 언론학 등 전문분야들과 음악, 미술 등의 예술 분야까지를 모두 망라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둘로 나누어진 분야들 사이에 절대적인 뚜렷한 경계가 있을 수 없음은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철학이 문과라는 이유로 경영학이나 행정학과는 같은 쪽에 분류되면서 이과인 수학으로부터는 철저히 격리되고, 경제학(그것도 수리경제학)이 역사학이나 문학과는 가깝게 취급되면서 물리학과는 거리를 지녀야 하며, 경영학이 문과라는 이유에서 공학과 서로 관련이 없는 분야로 분리되는 뚜렷한 이유는 이 분야들의 학문적 성격 자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이를테면 철학과 수학의 거리가 철학과 경영학의 거리보다 멀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천문을 공부한 퇴계 이황, 철학을 공부한 뉴튼

또한 이런 문과-이과의 구분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기에, 그 구분이 과거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과거의 많은 위대한 학자, 사상가들이 철학, 역사, 신학, 자연과학 등 모든 분야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깊은 조예를 지닌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자 뉴튼(Isaac Newton, 1642-1727)이 신학과 철학에, 그리고 사회사상가 로크(John Locke, 1632-1704)나 볼테르(Voltaire, 1694-1778)가 과학에 깊이 관심을 가졌으며 동양에서도 주희(朱熹)나 이황(李滉, 퇴계)같은 유학자가 천문역법과 같은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다.

사실 이는 인간과 세계의 여러 문제에 폭넓은 관심을 가진 진지한 학자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문과-이과의 경직된 구분에 깊이 젖은 사람들에게는 그같은 상황이 이상한 일로 생각되는 것이다.

학문 분야들이 다루는 대상이 '자연', '사회', '정신' 등으로 뚜렷이 나누어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 이런 구분의 밑에 깔린 전제이고 그것이 어느 정도 들어맞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오늘날의 사회와 학문을 두고서는 엄청난 착각이다.

물론 19세기 후반 현대의 학문분야들과 그 체계가 형성되던 과정에서 그 같은 편리한 구분이 가능할 것으로 믿어지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학문분야들 사이의 경계는 다시금 매우 흐려졌고 위와 같은 구분이 전혀 가능하지 않도록 학문의 대상이 지극히 복잡해졌다.

게다가 이제는 각각의 분야들이 서로 다른 접근법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어서 대부분의 분야가 한꺼번에 성격이 다른 여러가지 접근법을 모두 사용해야만 하게 되었다. 사회과학의 연구 대상에 대해 자연과학에서 사용해 온 접근법을 취하는 경우가 늘어난 것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외면하고 그저 맹목적으로 모든 분야를 문과, 이과로 나누는 일은 시대착오적인 무리에 불과하다.

해양학을 왜 굳이 '이과'라는 틀에 가둬야 하나?

모든 학문 분야를 문과와 이과로 임의적으로 경직되게 구분하는 관행은 또한 우리 학문사회가 현대의 다양한 학문의 발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우리 학문의 균형있는 발전에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와 문화가 복잡한 성격을 띠게 되면서 점점 많이 나타나는 복합학문 분야들의 경우이다. 예컨대 환경학, 정보학 등의 새로운 분야들 뿐만 아니라 농학(農學), 건축학, 도시계획학, 체육학 등 어느 정도 오래된 분야들도 그같은 문제를 드러내는 분야들로서, 이 분야들 각각을 문과와 이과 어느 한 쪽에 소속시킨다는 것은 많은 문제를 일으키며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 억지로 구분을 해서 어느 한 쪽에 소속시키게 되면 이들 분야 자체의 성격에 큰 제약이 가해지게 된다.

문과-이과의 구분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에선가 이미 한 쪽에 소속시키는 관행이 자리잡은 분야들이 그러한 구분이 초래하는 제약을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우리 학문사회가 심리학과 지리학을 관습적으로 문과에 속하게 함으로써 이들 분야들의 성격이 크게 좁아져 버렸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반면 해양학은 이과에 속함으로써 역시 큰 제약을 받고 있다. 물론 일단 이런 식으로 어떤 한 분야를 문과와 이과의 어느 한 쪽에 소속시킨 채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대중에게 그런 소속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현상이 벌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이런 임의적인 구분이 그 분야의 범위, 방법, 구성원 등에 제약을 가함으로써 그 분야의 성격 자체를 문과나 이과 한 쪽으로 좁혀버렸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해양학(海洋學)이 바로 그런 분야의 좋은 예다. 70년대부터 별도의 학문분야로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해양학은 이과에 소속시킴에 따라 그 이후 분야 자체의 성격에 이미 큰 제약이 가해져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이 이과에 속한다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가 된 것이고, 심리학이나 지리학의 경우와는 달리 학자들조차 해양학에 대해서는 그것이 이과, 문과의 어느 한 쪽에만 소속시키기 힘든 분야라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는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처음부터 해양학을 이과가 아니라 문과에 소속시켰다면 그 분야가 해양물리학, 해양화학, 해양생물학만으로 이루어지는 현재의 상황이 가능했을 것인가? 이런 내용들만의 추구를 통해 바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자연과학적 지식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바다에 대해 정치적, 역사적, 문화적, 경제적, 법리적으로 이해하는 게 필수적이다. 하지만 해양학이 이과로 분류되면서 이런 내용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기회가 차단돼 버렸다. 물론 이것이 해양학을 문과로 분류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어느 쪽으로 분류해도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어찌 해양학만의 상황이겠는가?

세상과 삶 전체를 다뤄야 할 인문학, 왜 과학기술에는 관심없나

역시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별로 의심을 품지 않는 분야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마찬가지의 제약이 가해졌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산학(電算學)이 왜 이과이어야만 하며 방송학(放送學)은 왜 굳이 문과이어야만 하는가. 물론 전산학을 문과, 방송학을 이과로 분류해도 마찬가지의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이들 학문을 각각 이과와 문과라는 고정된 틀에 가둠으로서 이들 분야들이 당연히 다루어야 할 얼마나 많은 내용들을 이들 분야들로부터 차단시켰으며 그 접근방법에도 얼마나 큰 제약을 가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학문적 제도나 관습은 이들 분야들도 억지 구분을 해서라도 한 쪽에 집어넣을 것을 강요하고 있으며 실제로 아무리 부적절하더라도 그와 같은 구분을 거부하는 것은 지극히 힘들다.

결국 위의 분야들은 그때마다 이런 저런 이유에 의해 이과나 문과 중 한 쪽으로 구분지어지고 있고 그에 따라 이들 중 여러 분야들이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도대체 농학(農學)이나 환경학이나 정보학을 문과나 이과로 굳이 구별하는 것이 어째서 필요한 일일까? 어느 쪽을 택하든 그 같은 구분이 이루어 내는 결과는 이들 분야들의 내용과 접근방식을 한 쪽으로 제약할 따름이지 않은가?

경영학 역시 좋은 사례가 된다. 경영학을 문과로 분류하면서 경영학도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공학에 대한 관심과 공학도에게 요구되는 경영학 지식이 모두 차단됐다.

현대의 기업에서 신기술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공학적 소양이 없는 경영학 전공자, 시장의 변화를 이해하는 경영학적 안목이 부족한 공학 전공자의 자리가 점점 위축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위에서 예로 든 분야들 이외에도 수많은 분야들이 오늘날 점점 더 복합적인 성격을 띠어 가고 있다.

예를 들어 문학, 역사, 철학 등 전통적인 인문학의 핵심 분야들을 두고 보아도, 진정한 인문학이 되기 위해 이들 분야들은 당연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문화의 모든 영역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와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과학기술이 그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文'과 '理'는 상호보완적 개념

우리 사회에서의 문과-이과 구분의 경직성이 빚은 이런 상황은 워낙 유난스러워서 그 자체로서 흥미 있는 역사학적, 사회학적, 또는 사회심리학적 연구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글에서 이런 면들에 대해 다룰 수는 없고 동서양의 역사로부터 문과-이과 구분 및 그 유래와 관련된 몇 가지 관측을 해보기로 한다.

먼저 '문'(文)과 '리'(理)라는 두 개념이 동양 전통문화에서 지녔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두 개념은 양쪽 다 오랜 역사를 통한 진화의 과정을 거쳤고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는 개념들이다. 그러나 대체로 보아 '文'은 '문화', '전통' 같은 것들을 가리키는 데 반해 '理'는 '근본 원리'나 '원칙' 같은 것을 지칭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理'는 '文'보다는 더 분석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으로 생각되고, '文'이 대체로 정신, 가치, 사회, 문화 등 인간세계의 것들을 주된 대상으로 한 데 반해 '理'는 '天', '地', '萬物'을 포함한 자연세계까지도 망라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렇다면 이 두 개념의 차이가 오늘날의 문과-이과 구분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이 구분과 얼마간은 통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동양 전통 속에서 '文'과 '理'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은 아니었고 근본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포함할 수 있는 개념들이었다. 물론 중국 송대(宋代)에 '理'라는 개념이 신유학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그 과정을 주도한 사람들은 '文'과 '理'의 대립 같은 것을 생각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소식(蘇軾)과 같은 사람이 '文'에 치중함으로써 제대로 '理'를 추구하지 못했다 하여 비판한 주희(朱熹)의 머릿속에는 그 같은 대립관계가 들어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주희의 비판은 전통, 멋, 아름다움 등 '文'의 가치에 지나치게 경도됨으로써 도덕적 삶의 궁극적 원리인 '理'를 게을리 한 데 대한 것이었을 뿐, 인간세계와 자연세계의 구분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사실 '文'과 '理'는 인간세계와 자연세계를 각각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모두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었고, 특히 '理'에 대한 추구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세계보다는 인간과 사회의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결국 동양의 전통에서 '文'과 '理'라는 개념들은 서로 대립되는 것도 아니었고 그것들을 굳이 구분한다고 해도 그 구분은 자연세계에 대해 다루는 분야들을 한 쪽에 놓고 그 외의 모든 분야들을 다른 쪽에 놓아 서로 구분하는 오늘날의 문과-이과의 구분과는 전혀 성질이 다른 것이었다.

실제로 고대 경전이나 正史에 자연현상이나 과학기술 전문 지식과 관련된 내용이 나올 때 동양의 전통 학자들은 이를 피하지 않고 다루었다.

서양 전통 속의 '두 문화'…한국의 문과-이과 구분과는 달라

물론 서양의 전통 속에서도 문과-이과의 구분 비슷한 것이 있었고 영국의 과학자이자 소설가인 C.P 스노우가 이를 가리켜 '두 문화의 문제' (two-culture problem)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만큼 그 정도가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서양에서 '문과'와 '이과'에 해당되는 말들이 있다면 아마도 '인문학' (humanism) 혹은 '인문주의' (humanities)와 '과학'(science) 또는 '과학기술'(science and technology)일 것이다.

이것들이 서로 대비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당시 새로 부상하는 과학기술이 지적인 우위와 실용적 가치를 내세우는 데 맞서 인문학 또는 인문주의가 고전과 교양 위주 교육의 도덕적 우위를 선언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양쪽으로의 구분과 대립, 그리고 한 쪽이 상대 쪽에 대해 느끼는 자부심 같은 것들은 이때쯤부터는 서양의 전통에서도 있었고 이것이 어떤 면에서 문과·이과 구분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구분 역시 한국의 교육 제도 속의 문과-이과 구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게 과학기술과 대비된 것이 우리의 '문과'가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좁은 범주의 '인문학'이었다는 것이다.

인문학이 대항했던 것은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실용성, 전문성을 중요시하는 당시 문화와 교육의 새로운 조류 전체였고, 굳이 양 쪽으로 나누자고 들면 우리가 지금 문과에 소속시키는 대부분의 사회과학 분야들이나 경영학 등의 직업학문 분야들도 당시로서는 인문학과 반대 쪽에 속했을 것이다.

실제로 고전 언어 위주의 인문학 교양 교육에 대항해서 이 시기에 주창된 새로운 교육은 실용적 과학기술과 아울러 현대 언어들의 교육을 강조하기도 했다.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차이 및 대립 역시 교육의 목적과 그 강조점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었을 뿐 학문 전체를 양쪽으로 나누는 문과·이과의 구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이었던 것이다.

결국 동서양 양쪽의 전통 모두에서 문과-이과 구분과 비슷해 보이는 구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쪽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보는 것 같은 경직된 성격의 구분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우리 학문사회가 지극히 인위적이고 임의적인 문과-이과의 구분에 이렇게 철저하게 얽매여 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실체도 없고, 역사적으로도 근거가 없는 임의적 구분이 순전히 관습에 의해 지속되면서 심각한 문제를 빚고 있는 이 같은 상황을 타파하고 제대로 된 균형 잡힌 고교 교육을 시행해야 할 당위성이 너무나 명백하다고 하겠다.

학문을 분류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이 글에서 내가 경직된 문과-이과 구분의 폐단을 지적하는 것은 물론 문과-이과의 구분이 없는 고교 교육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런 나의 주장은 그것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몇 가지 다른 주장들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따라서 내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것들을 주장하는 것은 아님을 밝혀 둘 필요가 있다.

나는 학문분야들을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 틀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문과와 이과의 분류와 같은 유형의 구분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구분 틀이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어서 그 틀에 맞지 않는 분야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따라서 그 구분을 경직되게 적용하면 문제와 폐단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설사 그런 양 쪽으로의 구분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한쪽에 속한 분야나 사람을 완전히 그 한쪽에만 국한시키는 테두리를 치고 다른 쪽과는 격리시키는 경직성이 큰 문제를 빚고 있다는 점이다.

획일적 구분 넘어 학생의 '다양한 선택' 보장해야

또한 나는 모든 고등학생들에게 모든 교과목을 똑같이 교육시키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즉 수학이나 자연과학에 전혀 흥미와 적성이 없는 학생에게 이들 과목을 억지로 강요하자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답답해하는 것, 그래서 반드시 고쳐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학생이 선택한 분야를 문과나 이과 어느 한쪽으로 구분하고 학생을 그 한쪽 테두리 안에 집어넣어서 관심과 공부의 폭을 좁혀 버리는 현행 제도다.

일단 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학생을 그 분야가 속한 문과나 이과 어느 한 쪽에 속하는 분야들에만 관심을 갖도록 제약을 가하지 않고 학생의 관심과 적성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철학에 관심을 가진 학생이 수학을 함께 공부하고, 물리학에 관심을 가진 학생이 경제학을 함께 공부하고, 경영학에 관심을 가진 학생이 공학을 함께 깊이 공부하도록 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문제이고 이 글의 도입부에서도 이야기한 내용이지만, 내가 모든 학생들의 전공 선택 시기를 늦추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나는 현재처럼 대학에 진학하기에 앞서 고등학생의 시기에 전공을 선택하는 것이 여러 가지 폐단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장래 자신이 어느 한 분야를 전공하겠다고 정할 수 있고 그것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으며 그런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최근 교육과정 개편을 놓고 다양한 논의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논의가 보다 생산적인 것이 되려면 일단 획일적인 문과-이과 구분을 허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 '문과-이과 구분, 이젠 없애자"
"경직된 문과-이과 구분이 '황우석 사태'낳았다"
"문과-이과의 차이는 제도가 만든 허상에 불과"
'하얀 거탑' 속에는 무엇이 있나?
'핀란드 교육'이 부럽다고요?
과학수업이 FTA를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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