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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에게 '권력' 아닌 '권위' 가르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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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에게 '권력' 아닌 '권위' 가르쳐야

[기자의 눈]'병영생활 선진화'의 조건

국방부가 병사들 사이의 구타, 가혹행위, 언어폭력 등의 사적제재는 물론 어떠한 명령이나 지시, 간섭도 가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군인복무기본법안'을 입법예고한 사실이 신년 벽두에 알려지면서 이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하지만 이번 법안의 내용 상당수는 이미 대통령령으로 시행 중인 '군인복무규율'에 담겨져 있는 내용이고, 수차례 병영 내에서 시도됐던 것임을 감안할 때 그리 '새롭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병 상호간의 관계'를 명시하고 있고, 대통령령이 아닌 법률로써 이를 다스리려 한다는 점에서 병영생활 개선을 위한 국방부의 '의지'가 얼마나 일선 부대에 반영될지 주목된다.

사실 일선 부대에서는 병영생활 개선을 위한 끊임없는 개혁들이 진행돼 왔고, 일부 부대는 이미 성과를 내고 있기도 하다. 지난 2000년 이번 국방부의 입법예고 내용과 비슷한 시도를 했던 강원도 철원의 모 부대의 사례를 바탕으로 병영생활 개선과제의 와 본질에 대해 살펴본다.

이 부대는 '병영생활 선진화 6대 추진과제'를 세워 수년에 걸쳐 실시했다. 6대 과제는 △병 상호간 상하관계 재정립 △분대 건제 유지 활동 활성화 △상호신뢰 풍토 조성 △건전한 여가 활동 보장 △활기찬 병영 분위기 조성 △불합리한 악·폐습 개선 등이다.
▲ 병영생활을 소재로 한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서로 경어 쓰게 하니 적어도 욕은 안 하더라 : 이 부대가 병영생활 선진화 시범 실시를 하면서 내려진 가장 '쇼킹한' 조치는 병 상호간에 '경어'를 사용토록 한 것이었다. 병장과 이병은 상급자와 하급자일 뿐 서로 명령과 복종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같은 이유로 병사들 간에 부를 때는 "이병 ○○○"와 같은 관등성명을 대지 대지 않고 "예. 부르셨습니까"와 같이 대답하도록 했다.

현재 시행 중인 '군인복무규율'에도 '명령'은 "상관이 부하에게 발하는 직무상의 지시"라고 명시돼 있고, "지휘계통에 따라야 한다"고 돼 있다. 따라서 이 부대는 중간 지휘관에 해당하는 '분대장'에게만 '반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나머지 병사들 간에는 모두 경어를 쓰도록 했다. 하지만 반말은 물론 욕설에 익숙해져 있던 병사들이 이 지시를 제대로 따를 리 만무했다.

선임병들은 '이게 군대냐'며 반발했고, 후임병들도 자신에게 경어를 쓰는 선임병이 편치 않았다. 시행 초기 간부들 앞에서는 아예 후임병과 말을 하지 않는 선임병들도 있었고, 간부들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눈감아줬다. 결국 '경어 쓰기'는 실패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변화가 생겼다. '말조심'을 하다보니 욕설 사용이 현격히 줄어든 것이다. 실수로 후임병에게 반말을 하다 '재수 없게' 걸리면 군기교육대에 갈 판이다 보니 욕설을 하다 걸리면 아예 영창에라도 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선·후임병 간의 관계에서 "선임병은 당연히 후임병에게 지시·명령을 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일부 깨진 것도 큰 성과였다. 여전히 선임병이 후임병에게 명령이나 지시를 하긴 하지만 후임병을 대하는 태도가 과거와는 달라진 것이다.

■'상병 말호봉'을 제거하라 : 이 부대는 여느 부대와 마찬가지로 소위 '짬밥'이라고 불리는 선후임병 간 위계에 따른 임무분담의 전통이 있었다. 이병은 침상, 일병은 식기세척장과 쓰레기 처리장, 상병 1~4호봉은 식당·화장실 등의 청소구역이 나뉘어져 있었는데, 모든 감독과 지시는 '상병 말호봉'(병장 진급 직전의 상병)이 맡았다. '말호봉'은 부대에서 거의 '신'(神)에 가까웠고, 각종 악역을 도맡았다. '말호봉'의 말 한마디가 병사들 사이에서는 법이었다.

그러다가 병장이 되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소일하다 전역을 한다. 병장 때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조용히 '말호봉'을 불러 "애들 이래서 되겠냐"라고 한 마디 하면 그만이지 절대 나서지 않는다.

이 부대는 '불합리한 악·폐습 개선'의 첫 번째 과제로 '말호봉'과 같은 병사들의 선·후임 구분에 따른 임무분담을 타파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간부들의 인식전환이 필요했다. 사실 병영생활에 대한 지휘·감독 의무가 있는 간부들이 수십년간 병사들의 이러한 위계질서를 인정하며 자신들의 의무를 선임 병사들에게 떠넘겼기 때문에 이런 부조리가 발생한 측면이 크다.

이병들이 상급자들의 전투화를 대신 닦게 하는 풍습도 없애는 것은 물론, 간부들 전투화도 사병이 대신 못 닦게 했다. 병사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나타내는 모든 관습을 금지시키고 수시로 감독해 고쳐나갔다.

그 결과 분명한 변화가 생겼다. "짬밥 없을 때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이제 쉴만하니 이게 뭐냐"며 병장들이 반발했지만 최소한 자기 전투화는 자기가 닦고 관물 정리도 자신이 스스로 했다.

▲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쪼개라, 분위기 좋아진다 :
이와 함께 이 부대는 '짬밥 순'으로 이뤄지던 부대 내 공동생활 역할 분담을 철저하게 분대단위로 나눠서 하게 했다. 분대 내에서의 지시권자는 계급 개념이 아닌 직책 개념인 '분대장'이다. 분대장도 다른 분대의 분대원에게는 지시 및 명령을 할 수 없게 하고, 내무반 공동생활은 철저히 분대 당번제로 실시했다.

화장실 청소에 5명이 필요하다면 과거 상병 1호봉 5명이 하던 일을 이제는 한 분대가 해야 했고, 분대 내 후임병이 모자라면 병장이 화장실 청소를 하는 일도 생겼다. '병장이 걸레 잡는 게 군대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점차 정착되어 갔다.

이렇게 분대 중심으로 생활하다 보니 많은 장점들이 생겼다. 분대와 상관없는 선임병이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분대의 분대장이 통제하다 보니 분대장은 각 병사들의 개인적 특성과 복무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게 됐고, 선후임병간 대화도 훨씬 편해졌다.

분대장에게는 상벌점 부여 및 외출·외박 건의권, 점호권까지 많은 권한을 부여했고, 분대장의 책임과 의무를 강화시키다 보니 분대원들 사이에서 신뢰와 존중이 늘어났으며, 평소 생활부터 내무 생활 중심의 위계 사회가 아닌 임무 중심의 분대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분대장의 지휘력이 높아졌고 훈련 시 전투력이 향상되는 성과를 얻었던 것.

일반적으로 초급 부사관이나 장교에 비해 병장 분대장은 임무 수행 능력이나 분대원 사이에서의 신뢰도가 훨씬 높다. 이 부대는 병영생활 선진화 추진 6개월 뒤 대대전술훈련 평가에서 군단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분대장이 되지 못한 병장급 선임병들이 소외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 부대는 '병영생활 선진화'를 시행하기 전에 철저한 평가를 통해 분대장을 선발했다.

보통 분대장으로 최고 선임병을 뽑는 관행에서 벗어나 계급과 주특기 수행능력, 분대원 사이에서의 신망, 남은 복무기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분대장을 선발하다보니 분대장보다 선임병인 병사들이 분대장에서 제외됐다. 부대가 분대장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이들은 부대 생활에서 소외됐고, 간혹 분대장과의 갈등을 낳기도 했다.

■'적'은 줄이고 '친구'를 늘려라 : 이 부대가 취한 또 한 가지의 획기적인 개선책은 '동기 개념'의 변화였다. 이 부대는 당초 월별로 선·후임을 나누고 있었다. 심한 부대는 주단위로 나누기도 하고, 일단위로 나누는 부대도 있었다. 그런데 이 부대는 동기를 분기로 나누기로 하고 기존 병사들을 제외한 신병들에게 새로운 동기 개념을 주입했다. 1~3월에 입대한 병사들이 한 동기이고, 4~6월에 입대한 병사들이 또다른 동기였던 것이다.

자연히 부대 내에서 한 개인을 기준으로 한 '선임병'과 '후임병'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월별로 동기를 나눌 때 부대 내의 위계에 의한 계급이 24개(복무기간 기준)라면, 분기별로 나누면 8개로 줄어들게 된다.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진급이 월별로 이뤄지다보니 동기 중에도 일병이 있는가 하면 상병도 생길 수 있었기 때문에 "군 내 지휘계통이 문란해질 수 있다"는 문제제기가 이뤄졌다. 하지만 병사들 사이의 명령과 지시가 금지돼 있음을 감안하면 큰 문제는 아니었다.

또 간혹 4월 군번과 6월 군번 사이에 '짬밥'을 두고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지만, 이는 '월초 군번'과 '월말 군번'이 불과 며칠을 두고 으르렁 거리던 것을 감안하면 큰 문제될 것이 없었다. 다만 '병사들 전체를 동기로 만든다'는 목표는 실현되지 못했다.

■'병영생활 개선' 간부들이 먼저 변해야 : 부사관 이상 간부들의 의식개혁도 중요했다. 이 부대에서 병 상호간 욕설, 폭언, 가혹행위 금지를 강력하게 추진하면서도 일부 간부는 병사들을 상대로 한 얼차려 등의 가혹행위와 욕설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자기들은 욕하고 패는데 왜 우리만…"이라는 불만이 터져 나왔고, 일부 간부들은 징계를 받기도 했다.

간부들의 불필요한 '관습적인 행태'도 제거됐다. 일요일에 부대를 책임지는 '당직사령'이 생각 없이 내린 '전원 종교행사 참석'과 같은 지시사항으로 인해 종교행사에 가고 싶지 않은 병사들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종교행사에 가게 되고, 결국 그 책임은 후임병들이 떠안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 이러한 통제 편의주의적 발상 자체가 결국 수많은 병영생활 부조리의 온상이었다.

이 부대도 아침 점호를 시작으로 아침식사 집합, 오전 일과 집합, 점심식사 집합, 오후 일과 집합, 청소 집합, 저녁 식사 집합, 근무자 신고, 정신교육 집합, 저녁점호까지 하루 종일 전부대원을 한 자리에 모으는 집합이 9번이나 있었다. 바로 식당 옆 부서에서 근무하는 병사도 연병장까지 내려와 집합한 뒤 지루한 인원파악이 끝나고 나서야 군가를 부르며 식당으로 행진해야 했는데, 모두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군대니까'라며 불편을 감수했다.

하지만 병영생활 선진화 추진 이후 이런 집합들이 불필요하다는 판단에 집합 횟수를 점호 두 차례와 오전 일과 집합으로 최소화하고 그밖의 인원 통제는 분대장에게 맡겼다.

간부에 의한 강제적 집합이 사라지자 분대장이 아닌 일부 고참급 선임병들이 분대장의 통제에서 벗어나 "알아서 보고하라"며 제멋대로 행동하기도 했지만, 일과에서 집합이 차지하는 비효율적 낭비가 제거됐고, 집합시간이 다가오면 어디 한적한 곳에 숨어 있는 전역 직전의 '말년' 선임병을 찾아 부대 곳곳을 헤매고 다니는 후임병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사실 말년 병장이 탈영할 리는 없지 않은가.

▲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군 기강'은 진정한 권위에서 출발 :
우리나라 군대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역시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지금도 2005년에 입대해 병장이 된 선임병들이 갓 입대한 신병들에게 "요즘 군대가 군대냐. 군대 많이 좋아졌다"는 말을 한다고 한다. 사실 병영생활을 아무리 선진화 한다 해도 사회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던 젊은이들이 반강제로 끌려가는 군대가 결코 '즐거운 곳'이 될 수는 없다.

아직도 군대에서는 식기세척용 세제 2통을 물에 풀어 전 소대원이 한 달 동안 사용하고, 병사 1인당 두루마리 휴지 16개를 갖고 1년을 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에서 내놓는 병영생활 관련 정책들을 보면 대부분 병영생활 부조리의 원인을 병사들에게 두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군 내부 일각에서도 이번 입법에 대해 "군 기강을 해이하게 한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과연 진정한 권위라는 것이 어디에서 생기는가부터 우리 군 간부들은 곰곰이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다. 계급장 하나 믿고 폭력적으로 행사되는 강압적인 언사와 가혹행위에 의해 유지되는 권위가 군 기강이라면 실제 전투에서 그 기강이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권위라는 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한다. 더불어 계급과 직책에 맞는 실력을 갖추고 있을 때 비로소 권위가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거의 대부분 군대에 가서 처음으로 계급사회의 '권력'이라는 '단 맛'을 경험하게 된다. 그동안 폭력적 상하관계에 기댄 채 권위 없는 '권력'만을 누리던 젊은이들에게 이제 진정한 권위를 가르쳐 제대로 된 군 기강을 세워야 할 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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