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말 전역을 앞둔 대한민국 최초의 여군 헬기 조종사인 피우진 중령의 고백이다. 그가 철저히 남성중심적 조직인 군대에서 지난 27년 간 온갖 편견과 부조리에 맞서 싸운 '역사'를 기록한 책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삼인)를 펴냈다.
특히 그는 이 책을 통해 성희롱을 포함해 군대에 만연한 성차별을 고발해 주목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여군들은 남성 군인과 동료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남성들은 끊임없이 여군에게 '여성'이기를 강요하는 현실을 비판했다.
피우진 중령은… 1979년 소위로 임관해 여군 훈련소 중대장, 특전사 중대장, 202항공대대 헬기 조종사, 88사격단 여군 중대장, 1군사령부 여군대장, 12항공단 205항공대대 중대장, 5군단 항공대 운항반장, 16항공대 부대장, 11항공단 본부 부단장, 항공학교 학생대 학생대장 등을 거쳤다. 그는 지난 2002년 왼쪽 가슴에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그는 혹이 있는 부위만 제거할 수도 있었으나 평소 군 생활을 하면서 불편하게 느껴졌던 가슴을 양쪽 다 절제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암이 완치돼 소속 부대로 돌아가서 3년 동안 아무런 문제 없이 군생활을 해 왔으나, 신체검사 과정에서 양쪽 가슴이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신체 일부가 없다는 이유로 장애등급 2위를 받아 전역 대상이 된 것. 그는 암 환자가 30%를 웃돌고 있는 상황에서 이같은 규정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육군참모총장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그러나 규정 개정 작업이 계속 늦어져 지난 9월 최종적인 퇴역 처분을 받았다. 현재 한달 가까이 국토순례 중인 그의 유일한 소망은 강제로 전역당하기보다 3년 남은 군 생활을 마치고 명예롭게 전역하는 것이다. |
"호텔 나이트클럽에 군사령관이 혼자 계십니다."
"예전 조종사 시절 신체검사 받을 때였다. 남군 조종사들과 함께 서울 수도병원에 가서 각방을 돌아다니다가 심전도 검사실에 이르렀다. 남자 장교 두 명과 함께 들어갔더니 심전도 검사라면서 웃옷을 벗어야 한다고 했다. 검사하는 사람들도 여군이 들어오자 좀 당황했는지 남자 장교들을 내보냈다. 그러나 검사를 하는 건 여전히 남자 사병이었다. 아무리 검사라지만 여성이고 장교인데 남자 사병 앞에서 가슴을 드러낸다는 게 꺼림칙했다. 그래도 티를 내고 싶지 않아 그대로 검사를 마쳤다. 검사를 마치고 나와 대기석에 앉아 있는데 내 뒤에 들어간 남군 조종사들이 사병들과 말을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 어떻더냐? 커, 작아?' 그러면서 장교와 사병이 함께 낄낄거렸다. 나는 그제서야 간호장교를 불러달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군대 회식은 질펀한 객기와 엄격한 상하관계가 함께 작용돼 아주 곤혹스러웠다. 회식에 가면 여성은 무조건 최상급자 주위에 앉히려고 한다. 마치 접대부를 앉히는 식의 그런 일을 중간 간부들이 알아서 한다. 그래서 나는 회식이 있으면 늘 가장 먼저 가서 아랫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술자리 내내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태도를 분명히 해도 자꾸 자기들 곁으로 불러올리려는 간부들의 요청을 매번 사양하는 게 얼마나 곤혹스러운지 모른다. 술 한 잔 마신 상사가 숙소까지 데려다 주겠다면서 차 안에서 슬그머니 손을 잡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때마다 손을 뿌리치면서 정색해야 하는 것도 못할 짓이다."
"어느 날 밤 11시쯤 되었는데 영내 숙소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상사 계급으로 군사령관 공관을 관리하는 공관장이었다. 군사령관이 찾는다고 했다. '00관광호텔나이트클럽에 계십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공관장은 지금 거기에서 기무부대장 등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갔고 군사령관 혼자 계신다고 했다. 장소와 시간도 그렇거니와 술 취해 혼자 계시면서 날 부르는 게 말이 안 됐다. 내가 못 간다고 하자 공관장은 깜짝 놀랐다. 군사령관이 부르는데 어떻게 안 올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군 사령관이 골프를 치고 난 후 몇 분과 함께 낮술을 시작했다며 여군 부사관들을 보내라고 했다. 10분 간격으로 빨리 보내라는 전화가 왔다. 나중에는 원스타인 본부사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서는 마구 욕을 해댔다. 더 이상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생각 끝에 여군 부사관들에게 전투복을 입고 나가도록 했다. 결국 그 일로 군사령관이 크게 화나고 말았다."
엄격한 위계질서에 기반한 상명하복의 군대 문화는 이처럼 일상적인 성추행, 성희롱을 가능케 했고, 그 안에서 피해자인 여군들이 문제제기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누구나 다 알지만 '쉬쉬'하는 문제였다.
지난 2001년 언론을 통해 크게 보도됐던 '사단장 성추행 사건'은 바로 군의 왜곡된 성 문화가 마침내 곪아터져 나온 것이었다. 이 사건은 모 사단의 사단장이 같은 부대 내 여군 장교를 회식이 끝난 뒤 공관으로 불러 억지로 입을 맞추는 등 수 차례로 강제로 성추행했으며, 이 여군 장교가 사단장을 고소하면서 외부에 알려졌다. 모 사단장은 처음에는 3개월 정직이라는 가벼운 징계를 받았지만, 언론 등을 통해 비판여론이 쇄도하자 결국 전역을 하게 됐다. 피 중령은 당시 여군에서 유일하게 언론과 인터뷰를 해 여군들의 입장을 대변했었다.
"힘든 훈련을 받을 때마다 붕대로 가슴을 칭칭 동여매곤 했다"
여군을 동료가 아닌 여성으로 대하는 왜곡된 성 인식은 왜곡된 제도를 낳을 수밖에 없다. 특히 제도는 개인의 저항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수많은 여군들을 좌절시켰다.
결혼은 할 수 있지만 아이를 낳으면 바로 전역해야 하는 규정으로 인해 그와 함께 1981년 조종사 시험에 합격했던 여군 동료들이 모두 정조종사가 되지 못하고 항공단을 떠나야만 했다. 부사관은 아예 결혼조차 할 수 없다. 피 중령은 "이건 비합리적인 제도가 아니라 비인간적인 제도"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또 진급과 승진 과정에서도 여성 차별은 곳곳에 있었다. 여군이라는 이유로 각종 교육과 훈련에서 배제돼 남성들보다 진급이 늦어진다. 그러다 보니 조종도 늦게 시작하고 계급도 낮은 남군이 정조종사가 되는데 여군은 부조종사에 머물러야 한다. 피 중령은 "이런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남군 조종사들이 여군 조종사를 동등한 동료로 보지 않는 분위기가 생겨난다"고 지적했다.
여군들은 이같은 제도적 장벽을 뛰어 넘기 위해 스스로의 여성성을 제거하곤 한다. 피 중령은 "나는 힘든 훈련을 받을 때면 붕대로 가슴을 칭칭 동여매곤 했다"고 밝혔다. 오죽하면 가슴 절제 수술을 받은 뒤 울먹이는 가족들에게 던진 한 마디가 "이제야 홀가분하다"는 것이었을까.
그는 "우리 여군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그 어떤 특권을 요구하지 않는다"며 "우리는 결코 치마를 내세우려고 들어온 것이 아니지만 현실은 우리 여군에게 치마를 강요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군이 여군들에게 어떤 능력을 요구하는지 강한 회의감이 들었다"고 회고한다.
비록 억울한 전역을 앞두고 있지만 군인을 천직으로 여기면서 누구보다도 강한 자부심으로 일해 온 피 중령이 이 책을 낸 것은 그의 뒤에 올 여군 후배들을 위한 배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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