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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한국영화, 세상을 고민하지 않는다

[영화시론] 스크린쿼터 투쟁을 배반하는 영화들

한국영화가 상반기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며 완벽하게 대세 굳히기에 나서는 분위기다. 지난 주말 전국 박스오피스 결과가 이를 반영하고 있다. 한국영화는 박스오피스 10위권 안에 무려 7작품이나 랭크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개봉과 동시에 1위에 오른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을 필두로 '방과후 옥상'과 '데이지' '로망스' '음란서생' '왕의 남자' 그리고 '구세주'에 이르기까지, 전문가들은 오히려 이건 좀 너무하다 싶은 표정들이다. 이에 비해 할리우드 영화는 '브이 포 벤데타'가 선전한 것을 제외하고 '앙코르'와 '브로크백 마운틴'이 올라있을 뿐이다. 일각에서는 이제 한국시장은 완전히 한국영화 판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건 약이 아니라 자칫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 아닌 걱정이 드는 게 웬일인지 모르겠다. 산업적으로도 그렇고, 미학적으로도 그렇다. 산업적으로는, 형식논리상으로 지금 장외에서 끈질기게 또 가열차게 전개되고 있는 스크린쿼터 투쟁과 어긋나는 국면을 만들어내고 있는 점이 문제다. 멕시코의 마리아 노바로 감독 같은 이가 '멕시코의 전철을 밟지 말라'며 한국의 스크린쿼터 시스템이 반드시 원상회복되기를, 그리고 한국 영화인들의 투쟁이 결실을 맺기를 간절히 바라는 서한을 보냈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라면 노바로 감독의 걱정을 일반대중들에게 올바로 전달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한국영화는 지난 2월 한 달에만 무려 74%대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했으며 이런 고공행진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스크린쿼터 시스템의 존재적 당위성은 산업의 상승국면에서가 아니라 하강국면 혹은 저점국면에서 찾아져야 한다. 따라서 현재 한국영화가 시장에서 강력한 파워를 보여주고 있다 한들 그것과 스크린쿼터 투쟁은 별개의 문제로 간주돼야 할 것이다. 보호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최고의 상황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이고 한국영화가 언제, 어느 때 또 다시 곤두박질칠지 그 누구도 쉽게 예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운동(movement)의 과정에 있을 때는 좀더 정교한 작업방식이 요구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스크린쿼터 운동을 통해 우리 영화계가 이루어내려고 하는 전략적 목표의 지점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를 좀더 명확하게 함으로써 운동적 대의명분을 확고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쿼터 진영의 전술적 슬로건을 보다 구체적으로 그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다. 단순하게 한국영화의 '생명'을 지킨다는 추상적 슬로건보다는 어떠한 한국영화들을 지켜낼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저예산 독립영화나 예술영화, 비상업영화들의 상영권 확대, 그럼으로써 국내 영화문화의 다양성 확보라는 문제가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과 얼마만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는가를 보여줘야 할 때다. 쿼터 진영의 일부 논객들은 흔히들 "스크린쿼터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라고 주장해 왔다. 그 말은 맞다. 하지만 간과하고 있는 사실 한 가지는 대중들은 '스크린쿼터 운동'만큼은 영화계 각종 현안에 있어서 '만병통치약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이다. 연일 고공행진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는 한국영화에 대해 걱정이 되는 또 한가지 이유는 미학적인 측면에서도 비롯된다. <왕의 남자>나 <음란서생> 등 몇 편의 작품을 제외하고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한국영화들로는 격변하고 있는 세상의 흐름을 읽어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데이지>같은 영화에서, <구세주>같은 영화에서 세상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가? 드 빌팽 총리가 만든 최초고용법안으로 인해 프랑스 청년들이 왜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는지, 그리고 그 법안의 문제가 우리의 비정규직 법안과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는지, 노엄 촘스키가 왜 중남미 국가가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얘기했으며, 그런 맥락에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와 칠레의 바첼렛 정권의 탄생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아프간과 이란과 이라크에서 여성들이 지금 얼마나 혹독한 성적 차별에 시달리고 있는지, 아프리카 우간다 같은 나라에서는 어린이들이 어떻게 굶어죽고 있으며 또 어떻게 인종학살을 당하고 있는지, 국내 영화를 통해서는 도통 그런 '인간적' 고민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고민은 최근의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보여진다. <굿 나잇 앤 굿 럭>을 통해 미국 영화인들은 1950년대 매카시 시대로 돌아간 지금의 부시 정권을 공격하고 있으며 <시리아나>란 영화를 통해서는 최근의 국제분쟁이 미국의 석유재벌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스파이크 리 감독의 최근작인 <인사이드 맨>은 9.11 테러 후 비교적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가 얼마만큼이나 혼돈의 시대를 겪고 있는지를 고백한다. 스파이크 리는 특히 미국인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타 인종 혹은 타 종교권에 의한 테러공격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들어낸 왜곡된 공포의식 때문이라는 것을 갈파한다. <크래쉬>란 작품은 또 어떤가. 미국인들 스스로 자신들이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인종문제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자책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더욱더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영화들이 극단적으로 상업성을 추구하는 일군의 '한국영화'들에 의해 국내시장에서 거의 완벽하게 무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이런 할리우드 영화들 역시 국내 흥행에서 성공하기란 하늘에 별을 따는 일만큼 힘든 일이 돼버렸다. 자, 그러니 지금의 한국영화 상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단순하게 낙관론이니 비관론이니 하는 것으로 편을 가르고 논쟁을 벌일 일이 아니다. 모두들 조금 더 신중하고, 자성하는 마음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다. 지금의 한국영화들은 정녕코 우리가 보고 싶어 했던 영화들인 것인가. 우리는 어떤 영화를 우선적으로 지켜내야 할 것인가. 다시 한번 토론과 합의를 위한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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