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8월 23일 실미도 부대원 탈출사건 당시 발생한 사망자 20명의 시신이 유족들에게는 사망에 관한 일체의 통보도 없이 벽제 시립묘지에 가매장된 뒤 34년 간 방치돼 온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군은 생존자 4명에 대해서도 구속기소하면서 가족들에게는 일체의 통보도 하지 않았고, 사형집행 뒤에 가족들에게 시신을 인계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실미도 탈출사건 부대원, 사살 뒤 벽제에 가매장한 채 방치**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 목사)는 19일 '실미도 사건'에 관한 중간 조사결과 브리핑에서 "벽제 시립묘지에 가매장된 실미도 부대원 사망자 추정 유해 19구를 발굴했다"며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부대원 탈출사건 이후 시신 처리 및 생존자 재판 과정에서 위법행위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과거사위에 따르면 실미도 부대는 1968년 1.21사태 이후 '북한을 응징하겠다'는 목적 하에 중앙정보부의 지시에 따라 창설됐으며, 공군에 의해 관리돼 온 것으로 확인됐다.
창설 당시 실미도 부대는 31명의 부대원을 모집했는데, 모집과정에서 공군 모집관들이 '교육 수료와 동시에 하사관 및 소위로 임관시켜 주겠으며, 상당액의 특수수당을 지급하겠다'는 등의 조건을 내세워 유인한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유족이 확인된 부대원은 22명이며, 영화 '실미도'에서와 달리 실제 실미도 부대원들은 대부분 일반인들로부터 모집됐다.
과거사위 관계자는 "31명의 부대원 가운데 전과자가 7명"이라며 "그러나 이들은 중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고 젊은 시절에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가벼운 범행이었다"고 말했다.
실미도 부대원들은 혹독한 훈련 및 비인간적 대우, 구타 등 인권을 유린당하면서 갈수록 불만을 키워 갔다. 심지어 무단이탈한 부대원 2명이 교육대장 등의 지시에 따른 동료 부대원들의 구타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실미도 부대원 중 7명이 사망했다.
실미도 부대원들은 예정된 훈련기간인 3개월을 초과해 3년여 간이나 섬에 장기 격리된 데에다 지나친 통제와 열악한 급식상태, 모집 시 약속된 보수의 불지급, 부대 해체설 등에 불만을 품고 1971년 8월 23일 탈출을 감행했다.
***생존자 4명,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사형 뒤 야산에 매장**
탈출과정에서 사살된 부대원은 20명이고, 생존자는 4명이었다. 군은 그러나 현장에서 사살된 부대원 20명에 대해 유족에게 통보하지도 않고 벽제 시립묘지에 시신을 가매장하고 34년 간 방치하는 위법을 저질렀다. 과거사위는 이 중 19구의 시신을 발굴했으며, 이들 시신에 대해 서울대 법의학교실에 DNA분석을 의뢰해 놓은 상태다.
생존자 4명도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다. 군은 가족들에게 구속기소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변호사 선임권도 부여하지 않았다. 이는 군법회의법 및 군행형법 위반이다. 군은 또한 이들에 대한 사형을 집행한 뒤에도 가족들에게 시신을 인계하지 않고 서울 구로구 오류동 야산에 암매장했다. 과거사위는 내년 4월에 이들 4명의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을 벌일 계획이다.
과거사위는 또한 생존자 4명이 사형을 선고 받은 뒤 민간 법정인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계속 조사할 계획이다.
과거사위는 이밖에 실미도 부대에 대한 중앙정보부, 국방부, 공군본부 등의 조종·통제 정도, 예산 편성 및 지원 등에 대해서도 집중 조사할 방침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