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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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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5>

납합출을 물리쳐 운명을 바꾸다

이성계는 스물두 살 때인 공민왕 5년(1356)에 처음 벼슬을 했습니다. 그 아버지 이자춘이 이미 절반쯤 중앙 무대에 발을 들여 놓은 상태라 이성계도 중앙군에 편입돼 외적 토벌 등에 자주 나갔습니다.

1361년에 서북면(평안도)의 독로강(禿魯江) 만호 박의(朴儀)가 반란을 일으키자 금오위(金吾衛) 상장군 겸 동북면(함경도) 상만호이던 이성계는 친병 1천5백명을 거느리고 가 토벌했습니다. 그해 겨울 홍건적 20만 명이 쳐들어와 도성을 빼앗겼는데, 이듬해 1월 도성을 수복하는 데도 친병 2천명을 거느리고 동대문을 공략해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성계를 고려 말의 대표적인 장수로 우뚝 일어서게 것은, 첫 번째가 원나라 납합출(納哈出)과의 싸움이고, 두 번째가 남부 지방을 휩쓴 아기발도(阿其拔都) 왜구의 격퇴였습니다. 이 두 사건은 조선 건국 후 노래로까지 만들어지는 등 이성계의 공적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됩니다.

만주 지역을 다스리던 원나라 심양행성(瀋陽行省) 승상 납합출은 1362년 2월 동북면 지역에 쳐들어왔습니다. 이 지역 군사 책임자는 다른 사람이었는데, 거듭 패하자 이성계가 동북면 병마사로 나가 싸움을 도왔습니다.

7월에 납합출이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홍원(洪原) 달단동(韃靼洞)에 진을 쳤습니다. 이성계는 덕산동(德山洞) 등지에서 이들을 쳐부수고, 함관령(咸關嶺) 차유령(車踰嶺) 두 재에서 거의 섬멸했습니다. 그들이 버린 갑옷과 병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 이성계가 도착해 장수들에게 거푸 패한 까닭을 물으니, 장수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참 싸우다 보면 붉은 기꼬리로 장식한 쇠갑옷을 입은 적의 장수 한 사람이 창을 휘두르면서 갑자기 뛰어나오는데, 모두 무너져 감히 맞설 사람이 없습니다.”

이성계는 그 사람을 찾아 대적하려고 거짓으로 패해 달아났습니다. 과연 그 사람이 앞으로 달려나왔습니다. 그가 조급히 창을 찔러대자 이성계는 몸을 뒤집어 말 옆에 붙었습니다. 적의 장수가 헛찌르면서 창과 함께 거꾸러지니, 이성계는 곧 안장에 걸터앉아 쏘아 죽였습니다. 적은 낭패해 북으로 도망쳤습니다.

납합출의 아내가 납합출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오랫동안 온갖 싸움터를 다 돌아다녔지만, 이런 장수가 어디 또 있습디까? 빨리 피해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납합출은 듣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이성계가 함관령을 넘어 바로 달단동으로 갔습니다. 납합출 역시 진을 치고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진 앞에 마주나왔습니다. 이성계도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진 앞에 나가 서로 대면하니, 납합출이 거짓으로 말했습니다.

“내가 처음 올 때는 본디 사유(沙劉) 관선생(關先生) 반성(潘誠) 등을 뒤쫓아 온 것일 뿐, 귀국 땅을 침범하려는 것은 아니었소. 지금 내가 여러 번 패전해 군사 만여 명을 죽이고 부하 장수 몇 사람을 잃어 형세가 매우 궁색하게 됐소. 그만 싸웁시다. 말만 하시면 그대로 따르겠소.”

이때 적의 병세(兵勢)는 매우 강성해 이성계는 그 말이 거짓임을 알았습니다. 이성계가 납합출 곁에 있는 장수를 쏘아 죽이고 다시 납합출의 말을 쏘았습니다. 납합출이 말을 바꿔 타자 또 말을 쏘아 죽였습니다. 일진일퇴하며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다가 이성계가 납합출을 몰아 쫓으니, 납합출이 급히 말했습니다.

“이(李) 만호, 장수끼리 서로 핍박할 필요가 무에 있소?”
그러고는 말을 돌렸습니다. 이성계가 또 그 말을 쏘아 죽이자 납합출의 부하 군사가 제 말을 주어 겨우 벗어났습니다.

며칠 뒤에 납합출과 함흥 들판에서 만났습니다. 이성계는 혼자 돌진하면서 적을 떠보았습니다. 적의 날랜 장수 셋이 한꺼번에 곧장 앞으로 달려오자 이성계는 거짓으로 패해 달아났습니다. 세 장수가 가까이 왔을 때 이성계는 휙 말머리를 돌리니 세 장수의 말이 흥분해 미처 고삐를 당기지 못하고 쑥 앞으로 나갔습니다.

이성계는 뒤에서 그들을 쏘아 넘어뜨리고 적을 복병 쪽으로 유인해 크게 쳐부수었습니다. 납합출은 당할 수 없음을 알고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도망쳤습니다. 은패(銀牌)와 구리 도장 등을 주워 임금에게 바쳤고, 그 밖에 주운 물건들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이로써 동북 변방이 모두 평정됐습니다. 나중에 납합출은 사람을 보내 화해를 청하면서 임금에게 말을 바치고, 또 북 하나와 좋은 말 한 필을 이성계에게 주어 존경의 뜻을 표했습니다.

납합출의 누이동생이 군중에서 이성계의 뛰어난 무용을 보고는 감동해, 이런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자춘이 전에 원나라에 들어가다가 납합출에게 들러 이성계의 재주를 칭찬한 적이 있는데, 이때에 납합출이 패하고 돌아가서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고 탄식했습니다.

나중에 고려 사신이 오자 납합출이 말했습니다.
“내가 본디 고려와 싸우려고 한 것이 아닌데, 공민왕이 젊은 이(李) 장군을 보내 치는 바람에 죽을 뻔했소. 이 장군께서는 평안하시오? 나이는 젊어도 군사 쓰는 것이 귀신 같으니, 참으로 하늘이 낸 재주요. 장차 그대 나라에서 큰일을 맡을 것이오.”

공민왕 13년(1364)에는 원나라에서 벼슬하고 있던 우리 나라 출신의 최유(崔濡)라는 사람이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德興君)이라는 왕족을 세우려고 요동 군사를 내어 쳐들어왔습니다. 최유는 역시 우리 나라 출신으로 원나라 황후가 된 기(奇) 황후를 등에 업고 있었습니다.

임금은 찬성사(贊成事) 안우경(安遇慶) 등을 보내 막았으나 거듭 패해 안주(安州)까지 물러났습니다. 임금은 다시 찬성사 최영(崔瑩)에게 지휘를 맡겼습니다. 이성계도 지시를 받고 동북면에서 정예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가 참여했습니다.

이성계는 앞서 패한 장수들을 겁쟁이라고 비난했다가 혼자 싸우라는 핀잔을 들었지만, 어쨌든 그의 분전으로 적은 크게 쳐부수었습니다.

이성계는 이 싸움에 나갔다가 본거지를 잃을 뻔했습니다. 이성계와 인척 관계에 있던 삼선(三善) 삼개(三介) 형제가 여진족을 끌어들여 변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들은 여진 땅에서 나서 자랐는데, 힘이 세고 말타기 활쏘기에도 능해 젊은 불량배들을 모아 북쪽 변방을 휘젓고 다녔지만 이성계가 두려워 방자하게 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이성계가 서북면으로 가자 이들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함주(咸州, 함흥)를 함락시켰습니다. 지키던 장수들이 도망쳐 철관(鐵關)까지 물러나니 화주(和州, 영흥) 이북 지방이 모두 넘어갔습니다.

이 사태는 2월에 이성계가 서북면에서 돌아오고서야 해결됐습니다. 화주 함주 등 고을은 모두 수복되고 삼선 삼개는 여진 땅으로 달아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성계는 밀직사(密直司) 부사(副使)로 승진하고 단성양절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이성계는 또 이때 공주(孔州, 경원)를 점거하고 있던 원나라 장수 조무(趙武)를 치고 그를 사로잡아 휘하에 두었습니다. 조무는 뒤에 벼슬이 공조 전서(典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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