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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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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

전주 이씨가 함경도로 간 까닭은

조선(朝鮮)이라는 새 나라를 연 것은 다 알다시피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입니다. 그는 임금이 되고 난 뒤 이름을 단(旦)으로 고쳤습니다. ‘아침’이라는 뜻인데, 재미있게도 나라 이름 ‘조선’에도 ‘아침’이 들어 있군요.

옛날에 어른이 된 뒤에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자(字)ㆍ호(號)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성계의 자는 군진(君晉), 호는 송헌(松軒)이었습니다.

이성계가 전주(全州) 이씨라는 것 역시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는 고려 말 동북면(東北面, 함경도) 호족의 자손입니다. 물론 지금은 본관(本貫)과 고향이 다른 경우가 더 많지만, 조선 초까지만 해도 본관이란 바로 고향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주가 본관인 이성계는 함경도 출신입니다. 왜 그럴까요?

당연히 그의 집안도 조상 때는 전주에 살았습니다. 신라 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라는 인물이 시조로 돼 있고, 그 17대손인 이안사(李安社)가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입니다. 전주를 떠나 동북면에 새로 터전을 잡은 사람이 바로 나중에 목조(穆祖)라는 이름으로 임금 대우를 받는 이 이안사였습니다.

그는 “용맹과 지략이 뛰어났다”는 실록의 의례적인 칭찬이 무색하게도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엉뚱한 사고를 칩니다. 기생 문제였어요. 고을에 온 관원과 기생을 다투었던가 봅니다. 고을 수령이 괘씸하게 여겨 위에 보고하고는 군사를 풀어 잡으려 했지요.

36계 줄행랑. 그냥 그 근처 어디로 잠시 숨은 정도가 아닙니다. 당시로서는 완전히 딴 나라만큼이나 멀었을 지금의 강원도 삼척(三陟)까지 도망갔으니, 이만저만한 사고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를 따라 거기까지 도망간 백성이 1백70여 호였다고 합니다. 그가 주변에 신망이 두터웠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정말로 그 많은 사람들이 따라갔다면 이건 단순한 기생 문제가 아니었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거기도 편안치는 않았습니다. 왜구가 쳐들어오자 배를 만들어 막기도 했지만, 원(元)나라 군사가 들어올 때는 나라가 통째로 넘어가는 상황이니 어쩝니까? 산속으로 숨어 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그 뒤에 터졌습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전주에서 마찰을 빚었던 관원이 하필 그 지방에 안렴사(按廉使, 도지사)로 올 건 또 뭡니까? 또 도망가야지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뱃길 따라 북쪽으로 가 닿은 곳이 동북면의 의주(宜州, 德原)였습니다. 백성 1백70여 호는 또 따라갔다지요?

거기서 그는 고려 조정으로부터 의주 병마사(兵馬使)라는 벼슬을 받습니다. 과정이야 분명치 않지만 그는 지역의 군사 책임자 격인 ‘유지(有志)’가 돼서 원나라 땅인 쌍성(雙城, 永興) 바로 남쪽의 고원(高原)에서 원나라와 대치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는 원나라를 막으라는 소임을 저버리고 그만 원나라에 항복하고 맙니다. 두어 번 윽박질러 항복을 받아낸 원나라 대장은 잔치를 열어 대접하고 옥으로 만든 술잔까지 주며 정을 표시했고, 이안사는 집안 여자를 그에게 바쳐 항복의 징표로 삼았습니다.

항복한 이안사는 다시 두만강 부근까지 갑니다. 경흥(慶興) 동쪽 30리 지점에 있는 알동(斡東)이라는 곳에 정착하고 주변 지역 여러 곳에 흙과 돌로 성을 쌓아 목축을 하며 살았습니다. 원나라에서는 그를 알동 천호로 삼아 남경(南京) 등 다섯 지역 천호를 관할하는 우두머리 천호 겸 다루가치(지방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안사는 1274년 그곳에서 죽어 공주(孔州, 경흥) 성 남쪽에 장사지냈습니다. 나중에 이성계가 임금이 된 뒤 이안사가 임금 대우를 받으면서 덕릉(德陵)이라는 능 이름도 붙고, 태종 때 여진의 침략 때문에 함흥으로 옮겨 장사지내게 되지요.

그 부인은 이(李)씨입니다. 동성동본? 물론 아니죠. 천우위(千牛衛) 장사(長史)라는 벼슬을 지낸 이공숙(李公肅)의 딸이랍니다.

이안사의 아들이 나중에 익조(翼祖)라는 이름을 받는 이성계의 증조할아버지 이행리(李行里)입니다. 이행리는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아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원나라의 일본 정벌 때는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다가 고려 충렬왕(忠烈王)을 만나 그 아비가 원나라에 투항한 잘못을 빌기도 했습니다.

앞서 이행리의 아버지 이안사는 천호가 되자 주변의 여진 천호들과 서로 왕래하면서 사귀었습니다. 그런데 이행리 대에 내려와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진 천호들이 작당을 하고 이행리를 해칠 계획을 세웠습니다. ‘굴러온 돌’ 이행리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여진 천호들이 시기한 것이었겠지요.

어쨌든 천호들은 북쪽으로 사냥을 간다며 20일 뒤에나 보자고 했습니다. 날짜가 돼도 오지 않아 이행리가 가보니 남자는 없고 노약자ㆍ부녀자뿐이었습니다. 사냥감이 많아서 늦는다는 말을 믿고 돌아가려는데, 뜻밖의 제보를 받았습니다. 목이 말라 물을 청하는 이행리에게 물을 떠주던 어느 할멈이, 사람들이 군사를 청해다 그를 치려는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이행리는 황급히 도망 길에 나섰습니다. 식구들과 세간은 배에 실어 두만강 하류로 보내고 자신은 부인과 따로 출발해 적도(赤島)라는 곳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아마 두만강 안에 있는 섬인 모양이죠? 서울의 노들섬(中之島)처럼요.

여진인들의 추격도 이미 시작됐습니다. 이행리가 강 북쪽 기슭에 닿았을 때는 여진의 선봉 3백여 명이 거의 따라붙었습니다. 약속한 배는 오지 않고 6백보나 되는 강물은 깊이를 알 수 없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적이 일어났답니다. 바로 ‘모세의 기적’이었습니다. 그곳은 밀물ㆍ썰물이 없는 곳이었는데, 갑자기 물이 빠져 강폭이 1백여 보로 줄고 물도 얕아져 건널 만해졌다는 것이지요. 일행이 건너자 ‘정석(定石)’대로 물은 다시 불어 추격자들을 따돌렸구요. 어디서 많이 들은 얘기 같지요?

일행은 적도에서 얼마 동안 살았고, 공주 백성들이 다시 ‘장꾼이 장에 가듯’ 따라와 함께 살았답니다. 그러다가 다시 그곳을 떠나 배를 타고 이안사가 처음 자리잡았던 의주로 돌아와 살았는데, 공주 백성들은 또 따라왔답니다.

이행리는 죽은 연도가 확실치 않은 모양입니다. 다만 처가 근처에서 살았던 모양이어서, 무덤은 안변에 있습니다. 나중에 지릉(智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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