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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사람, 정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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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사람, 정운영

[김민웅 칼럼] 성찰이 실종된 시대에 떠오르는 이름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딸 정유신이 아버지 정운영의 원고를 모아 만든 그의 마지막 칼럼집 제목이다. 그가 결국 평생을 통해 그 마음의 진실을 압축한 유언이다. 오늘로 벌써 3주기가 되었다. 그의 마지막 이론저작은 <자본주의 경제 산책>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 그러니까 이윤율 저하의 법칙과 관련한 그의 연구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어조에 실려 유연하게 성찰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목소리가 되어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김수행, 조정래 선생과 새벽 발인에 참석, 그를 못내 그리워하는 이야기를 추도사로 했던 것이 2005년이었다. 그 시절 그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최전선에서 격파하는 분위기보다는, 현실에서 난공불락의 힘을 과시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최선으로 가능한 실질적 희망은 과연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그는 다른 쪽에서는 노선이탈로 질타를, 또 다른 쪽에서는 여전히 색깔에 관련된 의혹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물론 여러 이유로 안타까워 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격한 어조가 아니라, 유연한 말과 지적 성찰로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마음을 뜨겁게 품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저런 세상의 소문에 그가 상처입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욕망을 극대화한 제국주의와 자유주의가 20세기에 힘을 합해 저질러놓은 그 참극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이른바 세계화의 시대에 사는 지식인의 사명이 아닌가?" 하는 그의 토로 내지는 일깨움은 세상의 진보를 바라는 이 모두에게 어렵지 않게 공유될 수 있는 논리와 사상의 방향이었다.
  
  정운영, 그는 얼마나 화려하고 박학한 지식의 저장소이자 유통의 본산이기도 했던가? 거침없는 동서고금의 지식 제공과 쉬운 비유로 어려운 이론의 핵심을 설명해내는 능력은 한국 지식사회에서 따를 이가 없을 정도였다 하겠다. MBC TV의 <100분 토론>은 정운영으로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가 긴 얼굴을 손으로 괴고 진지한 눈길로 상대를 응시하는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그 자신의 자세 하나로 한국사회에 "성찰의 태도"를 환기시켰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폴 스위지를 회고하면서 그는 미국 자본주의 안에서 이단아로 94년의 생애를 버틴 그의 모습에 부러움을 고백한다. 사실 폴 스위지의 저작들은 오늘날 미국이 겪는 위기를 그대로 예견하고 실체적으로 분석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정운영은 미국의 금융자본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모순에 대해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결국 그런 체제 안에서 금융시장의 폭발(financial explosion)이 불가피해질 것임을 전망하고 그길로 가는 이 나라를 매우 걱정했다.
  
  소주와 백세주를 섞어 오십세주를 만들어 따라주던 그는 오랜 미국 생활에서 그와 같은 주조법이 낯설었던 나를 향해, 세상이 이렇게 서로 자기를 내주면서 새로운 작품이 되는 길을 왜 모를까 하고 파안대소했다. 그가 든 칼은 날카롭지만 상대를 베어도 피를 흘리지 않게 하는 솜씨, 그러면서 칼을 맞은 자국은 남아 생각을 파고들게 하는 이. 사회과학자이면서 탁월한 인문주의자. 노예는 반란이 마땅하고, 식민지는 청산되어야 하며 세계 자본주의의 패권은 결국 정리될 수밖에 없다면서 자신의 심장은 여전히 왼쪽에서 뛰고 있음을 말한 그의 명료하면서도 정겨운 눈매가 그립다.
  
  무조건 밀어붙이면 된다고 여기는 권력 앞에서 좌절하기에는 이르다. 잠시의 퇴각이 역사에서 후퇴는 아니다. 성찰의 능력이 남아있는 한, 논리는 서고 이론은 몸을 입고 역사의 현장에 다시 투신할 시간을 기다린다. 전열은 정비되고 전망은 진화하며 우리의 능력은 기력을 회복하면서 솟구칠 것이다.
  
  정운영은 이런 말을 남겼다. "애초에 길이 있어서 사람이 다닌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꾸 다니다보니 길이 생긴 것이 아니겠는가?........길이 안 보인다고 주저앉을 것이 아니라 자꾸 부딪히면서 길 자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한민족의 고단한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왕 고단하다면 그걸 흥겹게 감당하는 것이다. 길게 보고 터덜터덜 가면서 여유를 부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돌진할 때 달리면 된다.
  
  성찰의 가치를 업신여기고 있는 권력과 현실 앞에서 정운영을 떠올리는 것은 그 자체로 주장이다. 그 자체로 진보다. 인간의 실존과 역사의 진실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세상을 꿈꾼 정운영, 자꾸만 삭막해져가는 이 시대에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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