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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의 '변덕'도 어쨌든 미국에 통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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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YS의 '변덕'도 어쨌든 미국에 통하더라"

MB정부, 북핵위기史에서 배워라 <1> 김영삼 정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지 100일이 지났지만, 남북관계는 아직 해빙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은 지난 3월말 남한 당국자의 군사분계선 통과를 불허한다고 선언한 이후 남한 당국과의 접촉을 일체 거부하고 있고, 남한 정부가 제안한 상설 연락사무소 설치이나 옥수수 5만톤 지원 등에도 호응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남북관계의 경색이 길어지면서 북핵문제에서 한국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한국은 그동안 남북관계의 유지를 바탕으로 6자회담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는데, 남북관계 경색으로 인해 북핵문제에서 한국의 입지가 좁아질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우려는 기우라고 말한다. 한국은 미국과 철저한 공조를 유지하고 있는 만큼, 한국은 이러한 한미공조를 바탕으로 북핵문제에서 적극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남북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도 한국은 정부가 말하는 것처럼 북핵문제에서 적극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일각의 우려처럼 한국은 북핵문제에서 제3자적 위치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있는 것인가?

북한학 박사이자 <SBS>에서 한반도 문제를 취재하고 있는 안정식 기자가 이같은 물음에 대한 답을 발견하게 해 주는 글을 보내왔다. 안 기자는 1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던 김영삼 정부 때부터 북한의 핵실험과 2.13 합의가 있던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북핵문제에 있어 한국은 '중재자'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안 기자는 또한 남북관계가 잘 돌아갈 때만이 '중재자' 역할이 가능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남북관계를 그냥 두더라도 미국과의 공조만 튼튼하면 북핵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는 이명박 정부 정책의 기본 전제를 반박하고 있다. <편집자
>

한국, 미국의 대북정책에 제동을 걸다

북핵문제에 있어 한국의 역할이라는 주제는 대단히 가치지향적인 주제인 만큼 각자의 관점과 논리에 따라 여러 의견이 나올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필자 개인의 '가치'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이 주제에 접근해보려고 한다.

이 글이 살펴보려고 하는 시기는 1993년 북한의 핵비확산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제1차 북핵 위기가 촉발된 이후 지금까지 15년간의 기간인데, 이 기간 동안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보수와 진보세력간의 정권교체가 있었고 위기와 협상 국면도 여러 차례 반복됐던 만큼, 이 시기의 경험을 면밀히 관찰한다면 북핵문제에서 한국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김영삼 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제1차 북핵 위기는 기본적으로 북미간의 협상구도로 진행됐기 때문에 한국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협상 구도에서 소외된 채 미국을 통해 우리의 의사를 전달할 수밖에 없었는데, 국내에서는 '한국의 주도적 역할'이라는 화두가 끊임없이 제기되는 등 김영삼 정부가 받는 국내정치적 압력은 상당했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미국의 행동에 훈수를 두는 방법으로 한국의 역할을 부각시켰는데, 이는 미국이 대북 협상을 해 나가는 데 있어 상당한 제약으로 작용할 정도로 북핵문제에 영향을 미쳤다.

김영삼 정부의 훈수 두기는 북미 제1차 고위급 회담에서부터 시작됐다. 1993년 3월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한 이후, 북한과 미국은 뉴욕에서 고위급 회담을 갖고 북한의 NPT 탈퇴 효력을 정지시키는 합의를 이루었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이를 비판한 것이다.
▲ 김영삼 대통령이 93년 7월 한국을 방문한 클린턴 미 대통령에게 '대도무문' 친필 휘호를 써 주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클린턴에게 북미회담에 대한 한국의 비판적인 여론을 강하게 전달함으로써 미국의 발목을 잡았다. ⓒ연합뉴스

김 대통령의 이러한 비판은 북미 1차 고위급 회담 결과에 대한 국내의 반응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던 데 기인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북미협상은 성공한 반면 남북대화는 답보 상태를 보이고 있는데 대해 불편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던 데다, 미국이 한국을 배제한 채 북한과 독자적인 관계 개선에 나설지 모른다는 우려가 퍼지면서 이른바 '한국 소외론'이 제기되고 있었다. 북미회담에서 북한의 NPT 탈퇴를 보류시키는 성과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북미회담에 대해 이렇게 비판적인 여론이 형성되자, 김영삼 대통령은 외신들과의 회견에서 '미국이 북한에 끌려다니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며 '북한에 추가적인 양보를 해서는 안 된다'고 미국을 비판했다.

김 대통령의 이런 반발은 북미협상의 전과정을 한국에 알려줘 왔던 미국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지만, 미국은 이내 한국 정부를 달래기 위한 작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미국의 국내정치적 상황이 한국의 반발을 무시하고 북한과 협상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북한과 협상을 시도하는 것에 대해 미국 내에서 정치적 지지를 표명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평양의 공산주의 정권과 화해를 한다는 것은 미국 내에서 반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북미 회담의 미국 측 대표인 갈루치는 회담에 앞서 열린 93년 5월 26일의 의회 청문회에서 '북한이 (국제) 조약을 준수하지 않는 데에도 불구하고 보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들어야 했다.

이렇게 대북협상에 대한 미국 내의 지지가 박약한 상황에서, 한반도 문제의 직접당사자이자 강력한 동맹국인 한국의 반발은 클린턴 정부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협상을 통해 북한의 NPT 탈퇴를 간신히 보류시키기는 했지만, 한국의 반발이 계속된다면 그나마 박약한 미국 내의 협상여론은 수그러들게 될 것이었다. 북한과 후속회담을 이어나가야 하는 클린턴 정부의 입장에서 한국의 지지를 확보하지 않고는 후속회담의 성공을 기약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클린턴 대통령은 93년 7월 방한 일정 도중 비무장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북한의 핵무기 사용은 곧 북한의 종말을 의미한다'며 한국내 비판적인 여론을 무마하는 취지의 발언을 해야만 했다. 미국의 대북협상에 대한 한국의 반발이 클린턴 정부를 압박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93년 11월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북핵 협상이 진전을 보지 못하자, 당시 한국과 미국에서는 북핵문제와 북미관계 정상화 등을 일괄타결하자는 '포괄적 접근(comprehensive approach)'이라는 아이디어가 제기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아이디어는 한미 실무진의 논의를 거쳐 93년 11월 한미 정상회담의 합의사항으로 사전 조율돼 있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은 정상회담장에서 이러한 합의를 뒤집었다. 김 대통령이 애초부터 포괄적 접근 방안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데다가, 백악관이 포괄적 접근 방안을 승인했다는 내용이 미국 언론에 사전 유출되면서, 한미 정상회담이 미국의 독주로 끌려갈 것이라는 국내 여론의 비판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실무선의 합의가 정상회담장에서 뒤집어지자 미국 측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결국 미국은 '포괄적 접근'을 '철저하고 광범위한 접근(thorough and broad approach)'이라는 말로 바꾸고, 북미 3차 고위급 회담이 열리기 위해서는 남북 간의 특사 교환이 이뤄져야 한다는 등 한국의 요구를 대폭 수용했다. 당시 미국 내의 상황이 한국의 반발을 그냥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클린턴 정부는 전반적인 인기하락 속에서도 외교정책의 실패로 거센 비판에 직면해 있었다. 특히, 93년 10월초 소말리아에 미군을 투입했다가 미군 병사 백여 명이 사상하는 군사작전 실패와, 아이티의 민주화를 돕기 위해 아이티로 향하던 미군이 군부 지지자들의 시위 때문에 아이티에 상륙도 못하고 회항한 사건 등은 클린턴 정부의 외교무능력을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미국내에서 클린턴 외교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는 가운데, 대통령 취임 뒤 1년간은 휴전을 하겠다던 전임 부시 행정부 관리들까지 클린턴 비판 대열에 가세했다. 클린턴이 회고록에서 고백한대로 이 시기는 클린턴의 '대통령 임기 중 가장 어두웠던 날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핵문제는 클린턴 정부의 외교정책 실패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되기에 충분했다. 북핵문제는 이 무렵 별다른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클린턴 정부의 입장에서는 11월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과 보조를 같이 해 뭔가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북핵 대처방안에 대한 양 정상의 합의가 아마도 그러한 새로운 모습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클린턴 정부의 이러한 구상은 한국의 지지를 최소한의 필요조건으로 하는 것이었다. 미 하원에서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촉구 결의안이 채택되는 등, 대북협상에 대한 미국 내의 지지는 여전히 박약했기 때문이다. 우방인 한국이 지지하는 방안, 적어도 한국이 반대하지 않는 방안이 클린턴 정부에게는 필요했다. 한국과의 불협화음은 북핵문제에 관해서도 클린턴 정부의 외교가 허우적대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클린턴 정부는 이 시기 김 대통령의 요구가 사전에 예상되지 못한 당혹스러운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의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한국의 반발이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 발목을 잡는 주요한 변수로 작용했던 것이다.

해가 바뀐 94년 북핵문제가 점차 위기국면으로 들어가면서 전쟁 가능성이 높아지자, 한국은 이번에는 미국의 전쟁 선택 가능성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북미협상 과정에서 미국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통해 미국의 대북협상에 부담을 주었던 한국이 북한에 대한 전쟁가능성이 높아지는 국면이 되자 이번에는 미국의 대북 강경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미국의 대북강경책에 부담을 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국의 이런 역할은 94년 초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 과정에서부터 시작됐다. 북핵 상황이 해결책을 찾지 못하자, 미국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남한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하고 싶어 했는데, 이러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한반도에는 위기감이 급속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한국 내에서는 미국이 정말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북한은 북한대로 격렬히 반발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미국의 주요 언론들이 한반도 위기 상황을 경쟁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하고 미 상원에서도 대북제재 촉구 결의안이 채택되는 등 한반도 분위기는 급속히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위기가 이렇게 고조돼가자 한국 내에서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에 반대하는 여론이 힘을 얻게 됐는데, 한승주 외무부 장관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94년 2월초 미국을 방문했다. 그런데 한승주 장관이 미국에 도착하기 직전 미국 내에서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클린턴 미 대통령이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2월내 한국 배치를 승인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고어 부통령이나 페리 국방장관 등 미국 측 관계자들은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한국 배치를 확답받기 위해 한 장관을 상대로 전방위적인 설득과 압박을 시작했다.

하지만, 한 장관은 미국 측 관계자들과 논쟁에 가까운 입씨름을 벌이면서도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2월 한국 배치에 끝까지 동의해주지 않았다. 한국내 상황이 결코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수용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 장관은 패트리어트 미사일 한국 배치는 여전히 논의단계라는 말을 남긴 채 미국을 떠났고, 클린턴 대통령이 승인한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2월내 한국 배치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미국의 대북 강경 움직임에 대한 한국내 반대 여론이 미국의 대북정책 수행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한 것이다.

94년 6월의 한반도 위기는 한국에 전쟁이 임박했을 때 한국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지를 예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당시 상황은 전쟁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급박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한국 정부는 미국의 북폭이 임박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의 정점은 94년 6월 16일이었다. 16일 오전 레이니 주한 미 대사는 정종욱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만나 미국의 민간인들을 철수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는데, 이 소식을 보고받은 김영삼 대통령은 전쟁이 목전에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미국 민간인의 철수는 미국이 전쟁 일보 직전에 취하는 조치였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은 곧 레이니 대사를 청와대로 불러 강력히 항의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미국이 우리 땅을 빌려서 전쟁을 할 수는 없'으며, '한국군의 통수권자로서 군인 60만 중에 절대 한 사람도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뜻을 전달했다고 적었다. 이후 위기는 평양을 방문했던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 의해 진정되지만, 만약 카터의 역할이 없었을 경우 현실화됐을 전쟁 위기에서 한국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었을 지는 김 대통령의 16일 반응에서 추론이 가능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전쟁이 목전에 다가왔다고 느낀 김영삼 대통령은 '군인 60만 중에 절대 한 사람도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 측에 강력히 항의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한국은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군사행동을 시작하려고 할 때 미국에 협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미국은 한국의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고려해 볼 때, 한국의 동의 없는 미국의 독자적 군사행동은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한반도에서 전면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장비나 병력 증강이 사전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 논란에서 보듯 한국에 무기나 병력을 증강하는 것은 한국 정부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었다. 즉, 한국이 동의하지 않는 한 한반도로의 무기나 병력 배치는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르려면 주한 미국민의 철수가 이뤄져야 하는데, 한국 정부의 도움 없이는 이것도 쉽지 않았다. 당시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미국인은 10만 명 정도였는데, 미국은 이들을 한국 정부가 제공한 열차 편을 이용해 부산과 같은 남쪽 집결지로 이동시킨 다음, 해상이나 항공편을 이용해 일본으로 대피시킨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따라서, 이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셋째, 한국의 동의 없는 미국의 독자적인 군사행동은 한미동맹의 파탄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한미동맹이 파탄에 이른 상태에서, 아무리 미국이라도 한반도를 전장으로 하는 전쟁을 치르기는 쉽지 않다. 또, 한미동맹의 파탄은 미국의 다른 동맹국들에게 미국이 동맹국의 의사를 묻지 않고 언제라도 독자적인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킴으로서, 세계적 차원에서의 미국의 동맹 전략에 차질을 가져올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점들로 볼 때, 미국이 북한에 대한 군사행동을 감행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동의가 필수적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한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주도할 수 있는 힘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미국에 의한 전쟁을 제어할 수 있는 정도의 역할은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북미회담이 재개된 뒤 양측은 몇 차례의 회담을 거쳐 94년 10월에는 제네바 합의를 95년 6월에는 경수로 공급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제1차 북핵 위기는 일단락됐다. 갈루치(Robert L. Gallucci)는 동료들과 공동 저술한 <북핵위기의 전말>(Going critical: the first North Korean nuclear crisis)이라는 책에서, 북핵협상 과정에서 한국의 입장이 왔다 갔다 했지만 그 영향력만은 변함이 없었다고 적었는데, 이는 한국이 북핵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대북정책에 제약을 가할 정도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의미한다. 이 시기 한국은 북핵문제를 주도하는 역할은 하지 못했지만, 미국의 대북협상이나 대북강경책을 제어하는 정도의 역할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김영삼 대통령은 대북정책에서 냉온탕을 수십차례 오가는 '사우나 외교'를 폈지만,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그를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1996년 제주 한미 정상회담 장면 ⓒ연합뉴스

제네바 합의로 북핵문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이후 남북미 관계는 북미관계는 발전하는 가운데 남북관계는 경색되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북미관계는 6·25 전쟁 때 사망한 미군 유해 송환 협상과 연락사무소 개설 논의 등 여러 갈래의 접촉이 계속됐지만, 남북관계는 김일성 사망 이후의 조문 파동과 95년 쌀 지원 파동 등으로 냉각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한국 내에서는 남북관계의 속도를 뛰어넘는 북미관계의 개선 속도에 대해 불만이 터져 나왔고, 미국은 북미관계 개선에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96년 4월의 '제주선언'과 '4자회담' 제안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한국 정부의 전략이 반영된 것이었다.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 미 대통령은 제주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제주선언' 3원칙과 '4자회담' 제안 방침을 공식 발표했는데, 핵심은 미국이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북한과의 접촉을 진행시켜나간다는 것이었다. 즉,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는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4자회담에서 다루되, 다른 부분의 대북접촉은 한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미국이 자유스럽게 진행할 수 있도록 한국이 양해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구상은 96년 9월 강릉 잠수함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잠수함 사건으로 남북 간의 대치가 심화되면서, 미국은 한국의 요구에 따라 경수로 사업을 유보하고 유해송환 협상이나 미사일 협상 등 북한과의 접촉도 잠시 중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제주선언'이 북미관계를 남북관계의 족쇄에서 풀어준 선언이었다고는 하나, 실질적으로 북미관계는 남북관계의 냉각이라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는 미국의 대북관계 발전에 있어 한국의 영향력이 상당함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한국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북미관계 발전에 충분히 제동을 걸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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