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역사가들에게 봉건제 내지 영주제의 폐지는 매우 중요하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봉건적 생산양식의 청산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스혁명에서도 봉건제 폐지를 통해 구체제를 파괴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를 위해 필수적인 일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18세기 프랑스 사회를 봉건적 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혁명 전 수십 년 동안에 귀족들의 봉건적 반동으로 인해 농민에 대한 봉건적 착취가 강화되었다고 주장한다. 혁명은 바로 이 시기에 봉건체제가 강화된 것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은 코반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중세사학자인 강쇼프의 견해를 받아 들여 봉건제(feodalite)는 서유럽에서는 13세기 말부터 정치체계나 사회구조로서 역사적인 면에서 본질적인 성격은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1735년에 다르강송이라는 사람이 쓴 글을 인용하며 당시에 남아 있던 것은 '단지 영주제의 그림자뿐'이었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영주들이 누리던 영주권은 과거의 흔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맑스주의 역사학자들이 18세기 말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봉건제라는 말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당시대인들과 혁명가들은 그 말을 일반적으로 사용했다. 실제로 다양한 모습의 영주권들이 남아 있었고 그것이 농민들에게 불만의 대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그 남아 있던 영주권의 내용과 그 의미를 바로 아는 일이다.
영주권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땅에서 농사짓는 농민들로부터 여러 종류의 세금을 현물이나 화폐로 받았다. 영지에서 초급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방앗간이나 빵 굽는 화덕을 만들어 놓고 사용료를 받은 시설독점권도 갖고 있었다.
주변에서 열리는 시장에 대해 세금을 물리고 통행세도 받았다. 영지내의 수렵권과 어로권도 독차지했다. 교회에서 좋은 좌석이나 좋은 묘지를 차지할 특권을 갖고 있었고 칼을 차는 권리를 갖고 있었다. 직접 노동으로 때워주어야 하는 부역도 일부 남아 있었고 일부 지역에는 농노제도 존재했다.
영주권들이 매우 잡다하여 수십 가지 이상이었으므로 그것을 잘 관리하기는 어려웠다. 이를 위해 변호사나 공증인들이 필요했다. 영주가 관리인을 두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중세 말 이후 왕의 권력이 강화되며 통치체제, 또는 농노제에 기초한 생산양식으로서의 봉건제가 무너진 후 영지들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지들이 재산으로서 사고 팔렸다.
실제로 많은 영지들의 소유권이 돈 많은 평민에게 넘어갔고 그들은 이를 통해 영주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것은 17, 18세기에는 영주권이 상당한 정도로 재산권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 전야에 많은 농민들이 영주권의 폐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지역에 따라 다르다. 영주권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은 지역들도 있다. 또 영주권을 없애야 한다고 하면서도 그 때 영주가 희생이 되어서는 안 되고 구입가격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국민의회의 봉건제 폐지선언
1789년 8월 4일 밤에 국민의회는 봉건제의 폐지를 선언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7월 14일까지도 부르주아 계급은 봉건제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고 영주권을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농민들만의 문제였다. 그러면 부르주아들은 왜 갑자기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그것은 전국적으로 번진 농민소요 때문이었다. 인구가 늘어나며 토지가 부족한 데다 몇 년째 계속된 흉년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진 농촌에서는 봄부터 소요가 일었다. 그리고 도시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그것이 곧 농촌지역으로 본격적으로 파급되었다. 이것을 '대공포'라고 부른다.
특히 7월 하순부터 8월 초까지가 심했는데 이는 혁명을 막기 위해 군대가 동원된다든가 비적이 쳐들어온다는 등의 소문으로 농민들의 신경이 과민해진 탓이다. 그래서 농민들이 스스로 무장을 하고 나섰고 그런 가운데 귀족의 성을 공격하고 봉건문서를 불태우는 등 폭력행위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국민의회 의원들은 이런 사태의 발전 속에서 혁명을 유지하기 위해 농민들의 지지를 얻기를 바랐다. 그래서 부랴부랴 이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고 별 준비도 없는 상황에서 봉건제 폐지를 선언한 것이다. 8월 4일 회의가 밤에 열린 것은 되도록 반대자가 많이 불참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8월 11일까지의 복잡한 논의과정을 거쳐 최종 법안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폐지라는 원칙은 지키되 그 내용은 가능한 한 축소시키는 형태를 취했다.
그 법안은 영주권을 봉건적 재산과 비봉건적 재산의 둘로 구분했다. 그리고 중세의 농노제에서 비롯했다고 판단되는 '인신적 예속과 관련되는' 전자는 즉시 보상 없이 폐지하도록 했다. 농노제나 부역, 수렵권, 초급재판권 같은 것은 봉건재산으로 분류되었다. 교회에 내는 십일조는 영주권과 관련되지는 않으나 봉건적 재산이 되었다.
반면 재산권의 성격을 갖는 후자는 농민이 그것을 되사야 폐지할 수 있도록 했다. 화폐납(cens)이나 수확에 따라 내는 현물세(champart) 같은 지대 성격의 공납이 그런 것이다(이는 1790년 3월의 입법을 통해 투자액의 년 이익률을 4-5%로 쳐서 그 20-25배를 주고 사야 폐지할 수 있게 되었다). 매매관직도 비봉건재산으로 분류되었다. 이는 현 소유자의 소유권을 인정해 주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이 법안의 목적은 적법한 영지의 소유자에게서 그 재산권을 빼앗는 것이 아니었다. 영지를 법적인 면에서 자유보유지로 전환시킴으로써 순수한 재산권으로 인정해주려는 취지였다.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하나 문제는 어떻게 실천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봉건적 재산과 비봉건적 재산이 뒤얽혀 있어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국민의회의 이런 태도에 대해 매우 분개했다.
영주권을 해체하는 시늉만 하고 마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789년에 이루어졌던 부르주아와 농민의 동맹이 깨어졌다. 농촌 지역에서 1793년까지 소요가 이어진 이유이다. 봉건제의 해체가 부르주아계급의 본래의 목표가 아니었다는 것은 이런 사실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문제가 최종 결말을 본 것은 대외전쟁과 파리의 정치적 혼란 때문이다. 급박한 상황에서 혁명가들이 농민들의 지지를 절실하게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농민들을 전쟁에 동원하려면 하는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국민공회는 최종적으로는 1793년 7월의 입법을 통해 영주권의 완전한 무상폐지를 결정했다. 이리하여 프랑스에서 봉건제는 완전히 사라졌고 농민들은 해방을 얻게 되었다.
봉건제의 해체가 혁명의 큰 성과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때의 그 봉건제는 생산양식으로서의 봉건제는 아니다. 코반이 주장하듯 그 유제(遺制)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르페브르도 사실은 그 점을 인정하고 있고 자신의 책들의 곳곳에서 '봉건제의 찌꺼기'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럼에도 다른 한 편에서는 그것이 마치 생산양식인 듯이 '봉건제'라는 표현도 함께 사용함으로써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봉건제에서 부르주아 혁명을 통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맑스주의 도식에 맞추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농촌에서의 '봉건제 해체'는 자본주의 발전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