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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길은 어디에 있는가?"

[시론] 광우병 논란 속에 생각 나는 2권의 책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급기야 광우병 쇠고기 괴담은 좌파 불순 세력의 배후 조종이라는 색깔론까지 등장한다. 조만간 간첩단 사건까지 나올지 모른다는 얘기도 들린다.

사실 새삼스럽지도 않다. 이미 우리는 근 반세기 이상을 미국이라는 상전을 받들어 모시는 데 이골이 나 있다. 반미는 곧 반국가사범이었고 좌익의 음모였다. 어디 감히 미국을 비판한단 말인가. 우리는 그런 시절을 살아 왔고 민주정부 10년 동안 잠시 그런 인식이 주춤하다가 이명박 정부 들어 새삼 다시 그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른바 근대 국가를 설계하고 만든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미군정 3년이라는 임신기간을 통해 대한민국을 낳은 어머니였다. 3년의 한국전쟁은 대한민국의 모든 인민들이 그 사실을 체화하는 고통스런 피의 '각인기간'이었다. 친일파라는 말은 곧 반민족, 반국가라는 말과 동의어이나 친미파라는 말은 그 정반대였다. 미국은 우리에게는 모든 가치의 기준이며 우리 삶의 표준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은 미국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그저 미국만 따르면 될 뿐이다. 미국이 달가워 하지 않고 하지 않아서 그렇지,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된다면 그런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한 마디로 미국은 우리가 가야만 하는 길의 최종 종착지였다. 그리고 그런 미국으로 가는 길 가운데 가장 유력한 도구가 종교였다. 오늘날 미 대사관에서 기념패까지 전달하는 친미 집회와 시위의 주력군은 한국 개신교인들이다.

그럼에도 한국전쟁 이후 미국으로 가는 길을 애써 버리고 다른 길을 찾는 불순분자(!?)들이 늘 있었다. 그들은 미국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자본주의의 불평등 사회로, 한국을 식민지로 착취하고 억압하면서 동시에 한국인을 더럽고 열등한 황인종으로 인종 차별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인식했다. 당연히 그런 사람들 가운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단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그 까닭 하나만으로 목숨을 잃었고 감옥에 처박혔으며 속된 말로 인생을 망쳤다. 얼마나 많은 고문과 폭력과 어처구니 없는 야만이 횡행했는지 정말이지 우리는 그 기억을 잃어버리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런 불순분자들이 그나마 우리에게 미국이 아닌 다른 길을, 미국식 가치관이 만능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본주의 공업화의 길만이 외통수 길이 아니라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덕택으로 이제 우리는 그나마 친미파가 민족반역자인지 아닌지 토론 정도는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 열린 공간이 닫히려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런 공간 폐쇄족과 우리는 싸워야 한다. 요즘은 잘 약발이 듣지 않는 좌익 딱지 만병통치약도 내팽개쳐야 한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제 무수히 많은 새로운 삶과 사회, 새로운 국가의 길을 열어 젖히고 만들고 실험하고 그리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오늘날 현실의 도로는 너무나 많다. 고속도로와 국도가 넘치고 넘치는데도 여전히 굉음을 울리는 포크레인과 기계들이 더 많은 도로를 만든다. 사실 이제 도로는 더 이상 소통과 교통의 도로가 아니다. 인간과 인간을, 마을과 마을을, 공동체와 공동체를 갈갈이 찢고 분열시키는 단절과 불통의 괴물로 변한 지 오래이다. 자본주의와 토건족들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자동차에 중독된 사람들이 만든 슬픈 자화상이다.

강제윤 시인과 김기석 목사는 그런 현실의 도로와는 다른 길을, 다른 길의 고통스러움을, 미국식 종교와는 다른 종교의 길을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종교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 삶의 근원에 내재되어 있는 사람의 삶과 사회, 국가의 종교성 자체에 대해 강제윤과 김기석은 시인의 감수성으로 우리들 눈 앞에 불러내 대면하게 만든다.

강제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강재윤 지음, 예담 펴냄). ⓒ프레시안

강제윤의 티벳 여행기는 "신들이 모두 사후세계로 쫓겨난" 뒤의 자본주의 산업사회 풍경을, 자본주의로의 고속도로를, 그 속도의 유혹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성찰이다. 불교 왕국 티베트에서 기쁨의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오로지 슬픔의 부처님을 친견하고 돌아온 슬픈 보고서이다. 평등을 포기한 중국 사회를 더 이상 사회주의라 할 수 있는가 묻는, 절에 가서 불전함을 보고도 절의 보살과 스님을 앵벌이로 만드는 게 누구인지 묻는 질문지이다.

"사람은 누구나 태생적 여행자이며 길의 자녀들이다. 지구는 은하계를 여행하는 우주선이다. 이 순간에도 우리가 탑승한 지구는 시속 11만 킬로미터의 놀라운 속도로 우주를 항해한다. 자기가 살던 마을의 동구 밖도 나가보지 못한 노인마저 은하여행자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정처없는 은하 여행자들, 시간 속의 나그네들...."

"돈만 밝히는 세속화된 불교는 더 이상 부처님의 종교가 아니다. 세상의 정의나 자비에는 무관심하고 극한의 정신적 추구를 통한 자기 구원에만 몰두하는 불교 또한 부처님의 교단은 아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이론도 부처님의 교리는 아니다. 복잡한 것은 진리가 아니다. 어려운 것도 진리가 아니다. 진리날 쉽고 단순하다. 부처님 말씀에는 못알아들을 소리가 한 마디도 없으나 불제자를 자처하는 주석가들의 말은 도무지 알아들을 소리가 한 마디도 없다."

"인류가 저지른 잔악한 행위는 대체로 물질에 대한 욕망에 기인한다. 하지만 물질에 대한 욕망보다 더 무서운 것이 정신에 대한 욕망이다. 물질에 대한 욕망이 약탈과 살육을 불러 왔다면 정신에 대한 욕망은 사람의 씨를 말린다. 인류의 수많은 전쟁을 보라... 성전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종교전쟁과 살육들, 홀로코스트는 또 어떤가... 4백만 유태인을 학살한 히틀러가 이루고자 한 것이 물질의 욕망이었는가. 2백만 인민을 학살한 크메르루즈나 좌우대립으로 수백만이 학살된 해방 전후의 한국..."

"물질이 사악한 것이 아니다. 나주지 않는 것이 사악한 것이다... 나눔은 내가 쓰고 남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진 전부를 나누는 것이다. 부처님 뿐만 아니라 많은 종교의 창시자들은 사랑과 자비의 삶을 가르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원 밖에서 선한 삶을 살기보다는 죄를 짓고 사원을 찾아가 자신의 죄 사함을 비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나는 사람들이 어째서 사람에게 지은 악행을 사원이나 교회에서 비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사람에게 지은 죄는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지 않는 것일까. "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서는 평등하다. 죽음을 담보로 한 최고의 장사는 종교이다. 티베트는 마치 죽음의 도매시장과 같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일과 다음 생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찾아 올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하는" 오늘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함을 지적한다. 그것은 곧바로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 나를 둘러싼 존재들을 보다 자비롭게 대해야 한다는 깨우침이기도 하다. 자기 구원에만 매달리는 수많은 명상 글에 대해 강제윤이 선뜻 긍정하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보리로 만든 짬파가 티베트의 주식이다. 중국은 티베트 침략 이후에 티베트 땅에 강제로 밀과 쌀을 심도록 했다. 기후와 풍토에 적합하지 않은 작물을 억지로 심은 결과 대흉년이 들고 말았다.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힘이 있다고 해서 지혜까지 있는 것은 아니다. 티베트의 들판에는 다시 보리가 심어졌고 강제윤은 그 보리밭에 부는 바람소리를 듣고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준다.

김기석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김기석 지음, 청림출판 펴냄). ⓒ프레시안

김기석은 초대 교회의 별명인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그 길인 예수의 길을 걷는 기독교 목사로서 흔치 않은 사색의 오솔길과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한국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당신들의 천국'으로 비아냥을 듣고 있는 현실을 가슴 아파하는 참으로 속깊은 감수성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오지 않을 수도 있었을 봄을 예민하게 느끼는 흔치 않은 생태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목회자라기보다 차라리 시인이다. 그가 목회를 하고 있고 올해 100주년을 맞이한 청파교회가 녹색교회를 내건 까닭을 그의 책은 웅변해 주고 있다.

김기석의 책은 어느 곳을 들추어도 김기석의 진심이 담긴 차분한 목소리가 길어 올려지는, 마르지 않는 우물물을 마시는 것만 같다. 그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다시 골똘히 생각하게 만드는 길을 안내한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의식하게 만드는, 자신을 존중하게 만드는 자존의 인간으로 다시 일어서도록 만드는 능력이란 참으로 흔치 않은 능력이다. 그런 능력은 스스로 진심어린 성찰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김기석은 그런 새로운 길, 새로운 경지를 열어제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길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나는 넘실거리는 요단강 물에 첫 발을 내디딘 제사장들의 가슴 서늘한 결의를 떠올린다. 물론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걷겠다고 나섰던 베드로의 비상한 마음도 떠오른다. 길이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걷는 이가 있어서 길이 생긴다지 않는가?"

"때로 예수님은 무력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분은 인간의 조건 속에서 인간을 사랑합니다. 의례화된 종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죄인과 의인을 가로지르며 소통의 다리를 놓았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교권주의자들에게 사로잡힌 예수님은 오히려 장벽이 되어 사람들을 가르고 있습니다. '저 죄악 세상'과 '구원의 방주'를 대비하는 기도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는 예수님의 외로움과 상실감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벽을 무너뜨리려 오신 예수님이 벽을 쌓는 분으로 인식되는 현실이 두렵기만 합니다. 이스라엘 도처에 세워진 분리의 장벽을 보셨는지요? 저는 몇 해전 멀리서 그 장벽을 바라보다가 가슴에 납덩이가 내려앉는 것을 느꼈습니다."

김기석은 농업공동체의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 산업문명, 자동차가 점령해버린 넓고 넓은 도로 그 어느 구석에서도 길을 찾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벗이자 이웃인 예수를 설파한다. 모든 사람과 함께 가고자 한 사람, 병들고 가난하고 절망에 쓰러진 사람 곁에서 치료할 능력도 없고 돈도 없고 그렇다고 희망이 넘치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옆에서 안타깝게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이다.

김기석이 보기에 예수의 삶은 거룩의 정치학이 아닌 자비의 정치학을 설파하는 삶이었다. 예수님은 계산없이 사랑하신 분, 그리고 우리를 그런 자리에 부르시는 분, 한 마디로 혁명을 하자는 분이었다. "장일순 선생이 혁명이란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처럼 예수님의 삶을 잘 요약한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 김기석의 예수님이란 그러므로 미국으로의 일방통행 도로만 닦았던 한국 교회가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혁명의 예수님이다.

교회의 크기가 영성의 크기라고 믿는 목회자들, 평화도 생명도 한쪽으로 밀쳐놓고 오로지 교인 수 늘리는 데만 골몰하는 종교 장사꾼들이 넘치고 넘치는 곳이 한국 교회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가 부정되는 현실, 동남아시아 쓰나미 피해를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기독교인들, 카타리나 피해를 동성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기독교인들, 이들이 볼 수 없는 예수님을 김기석은 보았고 그리고 증언한다. 그것은 "숲을 산책하는 것도 경전 읽기이며, 매순간 우리 의식이 깨어 있다면 우리가 머무는 그곳이 바로 성전이라는" 의식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김기석의 말처럼 종교란 생명의 신비에 대한 반응이며 우주의 무한함에 대한 외경심이다. 도처에서 "시간의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인간 중심의 문명이 저지르고 있는 폭력과 야만들"이, 새만금에서 천성산에서 경부대운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21세기 한국에서 도대체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모든 교회와 성당과 절이 노숙자들의 거처가 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김기석은 말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구분보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자와 타인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싸우는 자로 먼저 구분하자고. 딱딱한 얼음을 깨는 데는 망치보다 바늘이 유용하듯 자본주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사람 하나면 충분하고 자본이 지배하는 교회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정신의 독립을 이룬 바른 신앙인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한다고.

그럼에도 공동체란 공동체는 다 해체되고 사회안전망이란 오로지 가족과 친구뿐인, 지금 여기 한국에서 다시 묻고 싶다.

도대체 길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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