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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바마 스토리 <상> 몸으로 역사를 가르쳐준 그들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급격한 상승세가 미니 슈퍼화요일을 기점으로 주춤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8일 실시된 와이오밍 코커스에서 다시 승리함으로써 연승 행진을 재가동했다.

득표율에 따라 대의원을 확보하는 민주당 경선의 특성상 힐러리 클린턴이 남은 경선에서 모두 60% 이상 득표하지 못한다면 오바마와의 차이를 좁힐 수 없다는 미국 주요 언론들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선출직 대의원 확보로 드러난 민심을 8월 전당대회에서 당연직 대의원이 뒤집기도 어렵다. 따라서 미니 슈퍼화요일은 오바마에게 '숨고르기'의 시간이었을 뿐 승산은 여전히 오바마가 높다는 평가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견해를 달리 한다 하더라도 세계의 지도자들과 개인적 유대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짐작컨대 한미동맹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과 인간적인 유대감을 만드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애석한' 사실은 그런 밀월의 시간이 매우 짧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지금으로부터 1년 후부터 임기가 끝날 때까지 부시가 아닌 다른 미국 대통령을 상대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당선 가능권에 들어온 세 명의 후보는 부시와 사뭇 다른 사람들이다.

그중에서 이 대통령과 가장 다른 가치체계를 가진 후보는 아마도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일 것이다. 자서전과 평론집, 연설문,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만난 오바마는 열거하기조차 힘든 많은 면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달랐다.

오바마는 과연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오바마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프레시안>은 오바마의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과 평론집 <희망의 담대함>, 그리고 각종 언론보도를 통해 드러난 오바마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순서를 마련했다.


아버지, 흑인, 아내라는 3대 키워드를 통해 오바마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그가 무엇을 위해 미국 대통령에 나왔고 어떤 가치지향을 가졌는지 살펴본다. <편집자>

오바마에게는 세 명의 '아버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외할아버지 스탠리 던햄이다. 유년기와 청년기의 오바마를 키운 외할아버지는 실제 아버지에 버금가는 존재였다. 두 번째는 인도네시아인 계부 롤로 소에토로. 오바마는 그를 따라 6살 때부터 10살까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살았다. 아들에게 이름을 물려줬지만 그 아들의 머릿속에는 단 한번의 만남으로만 남아 있는 케냐인 생부는 세 번째 아버지다.

그 아버지들은 각자 자신이 처했던 역사의 한 복판에서 성공하고 또 좌절하며 어린 오바마를 키워냈다. 그 속에서 자란 오바마는 자연스럽게 역사와 정치를 몸으로 배웠고 다민족적 정체성을 갖게 됐다. 그들은 오늘의 오바마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영원한 '수호천사' 외할아버지
▲ 어린 시절 하와이 해변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로이터=뉴시스

파란 많은 인생역정이 될 뻔 했던 오바마의 유소년기를 잡아줬던 것은 외조부였다. 오바마가 태어나던 1961년부터 하와이의 명문 푸나우 아카데미를 졸업하던 1979년까지, 외할아버지는 그가 인도네시아에 살았던 4년을 제외하고 14년 동안 오바마를 지켜줬다.

오바마가 10살이 된 이후부터 어머니가 인류학 연구를 위해 전세계를 떠돌아도, 생부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져도, 계부 역시 10살 이후 없어졌어도 외할아버지는 언제나 그의 옆자리에 있었다.

외조부는 오바마에게 미국의 백인 중산층 가정의 언어와 문화, 세계관을 터득케 했다. 케냐인과 미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흑백혼혈이자 자카르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오바마였지만 정체성의 혼란을 딛고 다문화적 장점만을 받아들인 인물로 성장하게 한 것은 외조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외할아버지가 겪고 오바마에게 전해준 역사는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었다. 캔자스 남부 위치타에서 태어난 그는 대공황을 겪은 후 1941년 진주만 공격 이후 입대, 유럽에서 군복무를 했다.

1959년 사업을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에 정착한 그가 미국 50개 주(州) 중 절반이 흑백 결혼을 중죄로 여기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딸과 케냐인의 결혼을 승낙한 것은 언제나 자유를 갈망했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오바마는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서 "늘 새로운 출발을 찾고 눈에 익은 것들로부터 도망쳤다"라고 외할아버지를 묘사했다.

던햄의 역마살을 다스린 것은 오바마의 탄생이었다. 오바마가 태어난 후 그는 하와이에 완전히 정착해 손자를 뒷바라지하며 자신이 겪은 경험이며 역사를 대물림했다.
▲ 콜롬비아 대학 교정을 찾은 조부모와 함께 ⓒ로이터=뉴시스

특히 외할아버지는 소년 오바마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흑인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오바마의 피부색에 얼굴을 찌푸리거나 혀를 차는 관광객들을 향해 경멸을 태도를 보이며 그의 상처를 달래줬다.

"너희들만 잘 되면 그게 다야. 내가 바라는 건."

외할아버지는 평생 오바마에게 이 말을 되풀이하며 부모의 사랑에 목마른 손자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한 뒤 1992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여전히 생존해 있는데, 'CNN 중독자'가 되어 외손자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벅찬 가슴으로 지켜보고 있다. 가끔은 유세장에도 나간다.

계부, 타협한 엘리트주의

계부 롤로는 생부와 마찬가지로 하와이대 동서센터 유학생이었다. 오바마가 그를 따라 자카르타로 건너간 것은 1967년이었다. 수하르토가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를 무력으로 진압한 뒤 수카르노로부터 권력을 찬탈한,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 최고의 격변기로 기록되던 바로 그 해였다.
▲ 자카르타 시절. 왼쪽이 계부 롤로 가운데가 어머니와 이복동생 오른쪽이 오바마다. ⓒ로이터=뉴시스

롤로는 당시 가장 급진적인 제3세계 지도자로 꼽혔던 수카르노 대통령에 의해 장학생으로 뽑혀 유학을 갔었다. 그러나 수하르토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후 여권이 취소되어 귀국했고, 1년간 강제 징집됐다.

그런 롤로는 오바마를 친아들처럼 아꼈다. 그러나 오바마가 본 것은 절망 끝에 세상과 타협해 버리는 전형적인 엘리트의 모습이었다.

군에서 나온 롤로는 오바마의 표현대로 "아무런 위장도 하지 않은 채 벌거벗은 몸뚱어리 그대로 늘 생경하게 존재"하고 있는 권력에 의해 길들여졌고, "권력과 손을 잡고 망각의 지혜를 배웠다." 석유회사에 취직해 돈과 권력을 맛봤지만 탈세 혐의로 몰락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롤로는 자신의 행태에 대해 '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몰아붙이는 오바마의 어머니에게 "죄의식은 외국인이나 가질 수 있는 사치"라고 쏘아붙였고, 둘은 불화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공작으로 집권한 수하르토 치하에서 과거를 버리고 타협해 버린 롤로. 그런 그에게 '양심'을 이야기 하는 미국인 어머니의 다툼 속에서 어린 오바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바마는 롤로가 "가난과 부패와 자기 안전을 위한 끊임없는 쟁탈에 대해 설명했다"면서 "그의 설명은 내게 늘 가까이 남아 있었고 내 안의 몰인정한 회의주의에 자양분이 됐다"고 고백했다.
▲ 인도네시아 학교에 다니던 시절 ⓒ로이터=뉴시스

이런 혼란에서 빛을 발했던 것은 어머니 앤의 존재였다. 앤은 롤로의 체념이 아들 오바마에게 전도되지 않도록 엄격하게 교육했고, 아들을 자부심 강하고 예의 바른 인물로 만들었다. 형편이 허락지 않아 오바마를 국제학교가 아닌 인도네시아 학교에 보내는 대신 매일 새벽 4시 아들을 깨워 미국식 교육을 시켰다.

그리고 앤은 아들에게 언제나 생부 얘기를 들려줬다. 아버지가 얼마나 가난하게 자랐는지, 그렇지만 얼마나 부지런하고 정직했는지를 되풀이 해 들려줬다. 오바마는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의 유일한 동맹군"이라고 말했다.

아버지, 몰락한 우상

계부가 투항으로 몰락한 엘리트였다면 친아버지 오바마 시니어는 저항으로 몰락한 엘리트였다.

케냐 정부 장학금으로 하와이에 유학을 와 오바마를 낳은 그는 아들이 2살 되던 해 부인과 이혼하고 하버드 대학으로 떠났다. 거기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다른 미국인과 결혼해 케냐로 돌아간 그는 대통령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고위직에 올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새 조국 케냐의 건설을 주도했고 부와 명예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케냐는 최대 부족인 키쿠유족과 제2의 부족인 루오족의 갈등으로 심각한 위기 국면에 휩싸였다. 작년 12월 대통령 선거 후 소요사태로 16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케냐의 부족갈등은 40년의 뿌리를 가진 것이었다.

루오족 출신인 아버지 오바마는 같은 루오족 출신인 부통령 라일라 오딩가와 함께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현재 케냐 야당 오렌지민주운동의 지도자 오딩가가 미국의 유력 대선후보인 오바마를 두고 자신의 조카라고 주장하는 건 아버지 오바마와의 직접적인 인연 때문이다.

아버지 오바마는 오딩가와 함께 케냐의 정치가들이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고 제국주의자들이 두고 간 재산을 차지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고 비난했다. 최대 부족이 만들어 가는 기득권에 타협하는 이들이 속출하는 가운데서도 오바마는 대통령의 만류까지 뿌리치며 강력히 저항했다.

정부는 그런 오바마를 거세게 탄압했다. 공직에서 해임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갑자기 닥친 불행을 술로 달래던 오바마는 권토중래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982년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하는 비운을 맞았다.
▲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생부를 만났던 당시의 모습 ⓒ로이터=뉴시스

아버지 오바마가 꿈에 그리던 아들을 데려갈 요량으로 하와이를 찾았던 것은 어쩌면 마지막 희망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외조부 밑에서 반듯하게 잘 자라고 있는 아들을 데려가겠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오바마는 그런 아버지의 시련을 뒤늦게 듣게 됐다. 그것은 우상의 몰락이었다. "명석한 학자, 관대한 남자, 탁월한 지도자라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부서져 연기처럼 사라졌다." 소수파로서의 제약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아버지를 통해 미국 사회의 마이너리티로 살아가야 할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다.

화해, 그리고 자유
▲ 연설하는 오바마 ⓒ로이터=뉴시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오바마가 아버지에게 절망할 이유는 없었다. 명예와 원칙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아버지. 부끄러운 생을 살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는 오히려 오바마가 좇아야 할 그 무엇이었다.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잘 나가는 변호사의 길을 마다하고 시카고 빈민가의 공동체조직가로 뛰어든 것은 아버지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다.

'나는 누구인가'에 답하기 위해 찾은 아버지의 땅 케냐에서 오바마는 결국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고 그래서 아버지와 화해했다. "공포 그 자체는 부끄러움이 아니다. 공포가 만들어 낸 침묵이 부끄러운 것이다." 케냐에서 만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오바마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려 했던 게 무엇이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됐다.

오바마는 흑인으로서의 삶, 소년 시절의 절망, 시카고에서 목격한 분노와 희망이 대서양 건너 케냐의 작은 마을과 이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침묵하지 않는 삶을 살겠노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우상은 무너졌지만 그 잔해 속에 그 무엇보다 값진 게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왕의 동상은 무너졌고 우상은 사라졌다. 진실을 가렸던 에메랄드 빛 커튼이 걷혔다. 그래 좋다, 내가 할 일은 얼마든지 잘할 수 있다. 어떻게 해도 아버지보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아버지의 음성은 여전히 내 등을 떠밀며 격려했다. 배리, 넌 마땅히 해야 할 만큼 열심히 하지 않는구나. 더 힘을 내. 네 민족의 투쟁을 도와야지. 일어나라, 흑인의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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