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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둥이 체의 혁명가 변신은 기차여행 때문"

김영길의 '남미리포트' <297> 체 게바라의 '죽마고우'를 만나다

우연의 일치일까? <프레시안>의 손문상 화백과 <뉴스툰>의 박세열 기자가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여행지 답사를 위해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것과 때를 맞추어 체의 투쟁을 다룬 기록영화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상영됐다.

'볼리비아에서의 체(El che en Bolivia)'라는 제목의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혁명가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투쟁한 기록들과 체의 체포 작전에 투입된 볼리비아군 장.사병들의 증언, 체를 도와 게릴라 활동을 하다 사망한 게릴라들의 유족, 체의 게릴라부대 생존자, 현장취재기자들, 체가 투쟁했던 지역의 주민들, 심지어는 체의 시체에 염을 했던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생생한 증언을 담고 있다.

필자는 손 화백과 박 기자가 부에노스아이레스,, 로사리오, 꼬르도바를 거처 바릴로체로 떠난 날인 지난달 30일 주아 볼리비아 대사관 홍보담당자로부터 한 통의 이 메일을 받았다.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활동을 담은 90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상영 행사에 특별손님으로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 필자와 인터뷰 중인 까를로스 페레르 소리쟈 씨 ⓒ김영길

이날 오후 7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라울 곤살레스 문화원을 찾은 필자는 체의 최후투쟁을 다룬 기록영화의 내용보다는 그 자리에 초대받은 인사들의 면면에 주목 했다. (이 영화의 내용들은 이미 필자가 쓴 남미리포트의 체 게바라 관련 글들과 상당부분 동일했다.)

이 자리에는 체가 청년시절 사귀었던 남녀 친구들은 물론 체의 친지들과 그 후손들이 자리를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수많은 체 게바라 관련 인사들 중에서 단연 필자의 눈길을 끈 인사는 체의 살아생전 '죽마고우'이자 체와 함께 2차 중남미 기차여행을 했던 까를로스 페레르 소리쟈(78) 씨였다.

까를로스 소리쟈 씨는 필자뿐만 아니라 체의 볼리비아투쟁을 다룬 기록영화 시사회참석자 모두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한국에서는 '체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로 인해 체의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알베르또 그라나도가 잘 알려져 있지만 아르헨티나 현지에서는 까를로스 소리쟈 씨가 체의 '죽마고우'로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한국인 기자들의 여행에 행운이 함께 하길"

필자는 장시간 동안 영화에 대한 강평이 끝난 후 급히 자리를 뜨는 까를로스 소리쟈 씨를 문화원 입구에서 간신히 붙잡았다.

내가 한국인 기자임을 소개하고 현재 또 다른 한국인 기자들이 체의 모터사이클 여행지를 답사하고 있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소리쟈 씨는 내 이야기를 듣고 눈만 깜박거리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다시 설명을 하자 그는 "내가 가는 귀가 먹어서 큰소리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가 없다"면서 "한국인 기자들의 여정에 행운이 함께하기를 빈다"고 고함에 가까운 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어 자신의 저서인 <어르네스또가 혁명가(체)가 되기까지>De Ernesto al Che)가 한국에서 곧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라며 한국인들의 체에 대한 관심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필자는 소리쟈 씨가 체의 죽마고우였는데 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여행을 함께 떠나지 않았는가가 우선 궁금했다.

그는 "당시 오토바이는 한대였고 세 사람이 함께 여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라고 말끝을 흐렸다.

다음은 필자가 그와 단독으로 나눈 대화 내용과, 체의 기록영화 강평회 자리에서 청중들과 함께 나눈 체에 대한 그의 회고를 요약, 재구성한 것이다.
▲ 죽마고우였던 체 관련 서적들을 손에 든 소리쟈 씨 ⓒ김영길

"체는 학창시절 바람둥이였다."

"1929년 꼬르도바에서 태어난 나는 3살 때부터 체와 세발자전거를 함께 타면서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다. 물론 알베르또 그라나도도 함께였는데 그라나도가 체의 낭만적인 젊음을 발산하는 유년기적 친구였다면 나와 체는 중남미 서민들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는 혁명가로서의 친구였다.

체는 학창시절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지만 성적은 늘 중위권을 맴돌았다. 그는 건강문제(선천적인 기관지천식)로 결석하는 횟수가 많아서였다. 하지만 그는 청년기 때나 대학시절에는 수많은 여학생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나와 그라나도에 비해 수려한 그의 용모와 거침없이 쾌활한 성격은 여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시세말로 그가 작업을 걸어 넘어가지 않은 여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어떤 때는 3~4명의 여학생들과 동시에 사귀기도 했다.

하지만 체는 여자들과의 관계를 길게 이어가지는 못했다. 그는 여학생들과의 데이트보다는 오히려 여행을 즐기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자전거에다 조그만 모터를 달아 아르헨티나 전역을 여행하는 것을 무엇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사실상 그런 그의 방랑벽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체는 학창시절 정치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의 부모는 반페론주의자였지만 체는 상당부분 페론주의 사상에 지지를 보냈고 또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체가 그라나도와 함께 모터사이클을 타고 중남미 여행을 떠난 결정적인 동기는 그의 가족문제와 무관치 않다. 1950년 그의 부모는 이혼을 했고 그는 그 충격에 집을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는 장거리 여행을 계획하게 됐는데 그게 바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다.

체는 중남미 내륙을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할 계획을 세우고 나와 알베르또를 꼬드기기 시작했다. 중남미 인디오 여인들은 정말로 미인들이라며 함께 가자고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알베르또가 체와 의기투합이 되어 함께 떠나게 됐지만….

제2차 중남미 기차여행에서 혁명가로 변신

▲ 체의 볼리비아 혁명을 기록으로 담은 까를로스 프론사토 감독(왼쪽)과 함께 포즈를 취한 소리쟈 씨 ⓒ김영길

그런데 그가 2년여에 걸친 중남미 여행에서 돌아오자 예전의 바람기는 사라지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서둘러 의사자격증을 딴 체는 나에게 중남미 국가들을 기차로 여행해보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민중들의 삶을 직접 체험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의 성화를 못 견딘 나는 드디어 1953년 7월 7일 체와 기차여행을 결정하게 된다.

당시 우리 호주머니에는 7000 페소 정도가 전 재산(당시 환율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지만 현재 시세로 1000달러가 채 안된 금액 정도)이었고 가방에는 옷가지보다는 책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띠로 역을 떠난 우리는 볼리비아의 라파스에 머물다 페루와 에콰도르로 들어갔다. 에콰도르에 도착한 후 나는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 머물게 되었고 그는 과테말라를 거쳐 멕시코로 건너가 라울 카스트로를 만나게 된다. 그게 그의 인생을 바꾼 여정이 된 것이다.

그라나도와 함께한 모터사이클 여행이 젊음을 발산하는 낭만적인 여행길이었다면 우리의 기차여행은 중남미 빈민들, 특히 토착원주민들과 호흡을 함께하며 고단한 그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는 경험이었다. 낭만적인 청년 체를 혁명가로 변신하게 만든 여행이었다는 말이다.

나는 체의 일생을 세 부분으로 나뉘어 생각하곤 한다. 그의 유년기는 낭만적인 젊은이들의 삶의 표상이라고 한다면 그의 쿠바 투쟁은 혁명가로서 승리자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볼리비아 투쟁은 비록 실패했지만 20세기 저항의 상징으로 우리 곁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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