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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변화, 그 노력과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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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변화, 그 노력과 좌절

[기획특집] 대한민국 60년, 한반도의 좌표와 미래는? (2)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평화나눔센터가 운영하는 웹사이트 <북한채널>이 '대한민국 60년, 한반도의 좌표와 미래는?'을 주제로 신년 기획연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연재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지난 60년간의 한반도 역사를 재조명하고 특히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정세를 분석·검토하기 위한 것으로 학계·언론계·시민사회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 9명이 참여했다.

<프레시안>은 <북한채널>의 협조를 받아 이 연재를 공동 게재한다. 연재의 순서는 아래와 같다.

⑴ (1월 2일) 남북관계 60년 (김현경: 문화방송 기자)
⑵ (1월 4일) 북한의 변화 노력과 좌절 (정영철: 이화여대 연구교수)
⑶ (1월 7일) 통일운동의 발전과 진통 (정현곤: 민화협 사무처장)
⑷ (1월 9일) 북미관계와 북핵문제: 진통과 변화 (김정환: 한국방송 기자)
⑸ (1월 11일) 대북지원운동의 성과와 과제 (이종무: 평화나눔센터 소장)
⑹ (1월 14일) 한미관계의 변화와 발전 (이근: 서울대 교수)
⑺ (1월 16일) 대북인식의 변화와 남남갈등 (김학성: 충남대 교수)
⑻ (1월 18일) 북한의 대남정책과 통일정책 (정창현: 민족21 편집주간)
⑼ (1월 21일) 2008년 한반도의 좌표와 미래 (김근식: 북한채널 편집위원장) <편집자>

(
☞ <북한채널> 바로가기)

1. 들어가며

오늘날 북한을 둘러싸고 '변화론'과 '불변론'이 대립하고 있다. 2002년의 '7.1 조치' 이후의 상황을 놓고 북한이 변화하고 있으며 개혁·개방의 길을 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측과 북한의 대남, 외교, 통일정책의 본질은 하나도 변화하지 않았으며, 정치 체제 및 권력 구조의 변화는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측이 대립하고 있다.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철학적 문제를 떠나, 일반적인 상식에 기대어 본다면 북한은 지난 시기 끊임없이 변화해왔으며, 최근에는 이러한 변화들이 보다 더 강화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것은 사회의 변화가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오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변화의 누적을 통해 질적 비약을 이루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 60여 년간 북한은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단지 그 변화의 방향과 결과가 우리가 원했던 혹은 지금 우리가 원하고 있는 것과 일치하지 않았을 뿐이며, 때로는 정반대였을 뿐이었다. 자본주의를 끝없는 '창조적 파괴'로 보았던 슘페터의 주장을 사회주의에 적용한다면, 사회주의 역시 끝없는 변화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변화를 포기한 순간 사회주의는 과거에 그러했듯이, 역사의 한 페이지만을 남기고 존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북한 역시 그러할 것이며, 그러기 때문에 북한은 자신들 나름대로의 변화를 추구하며, 변화를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2. 지난 60년간의 북한 사회: 변화와 그 한계

지난 60년 동안 북한 역시 나름대로의 변화를 추구하였다. 1958년까지 이루어진 제도화의 과정 - 농업, 상업의 협동화 및 사회주의적 개조 등 - 이 사회주의적 변혁의 길이었다면, 60년대는 경제성장에 기반하여 새로운 기술적 진보와 자립경제의 제도화를 위한 변화의 시기였다. '주체'로 상징되는 50-60년대는 정치-군사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북한이 원하는 방향으로의 성공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 1960년대까지 북한은 정치적으로 수령제 체제의 확립, 군사적인 동원체제와 자주, 자립, 자위로 상징되는 외교적, 경제적 성과를 거두었다.

1967년의 수령제 확립은 '역사적 단절'을 통한 발전의 새로운 모색이었다. 즉, 과거의 반봉건적 사회구조의 변화와 사회주의적 구조의 형성, 수령제의 확립이라는 절대권력체계의 구축을 통해 북한의 특수성을 만들어가는 시기였다. '주체'의 등장과 더불어 경제적으로는 자립의 구조를 갖추어갔으며, 자체의 기술적 혁신과 내부의 자원을 총 동원한 성장이 이 시기를 특징지었다.

그러나 50-60년대를 뒤로하고, 북한 역시 내부 및 외부의 환경 변화에 따른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미 내부의 자원을 총동원하여 얻어낸 경제 성장은 내포적 성장의 한계에 부딪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고, 때마침 찾아온 데땅트는 북한으로 하여금 적극적인 대외 무역의 기회를 제공했다. 흔히들 북한의 '1차 개방'으로 불리는 70년대의 대서방 무역 확대는 경제적 변화의 첫 시도였고, 결과는 연이은 '오일 쇼크'와 대외 무역 환경의 악화 등으로 인한 좌절이었다. 사회주의권을 넘어선 경제 관계의 확대, 나아가 정치 관계의 확대의 시도와 좌절은 결과적으로 북한을 더욱 더 움츠러들게 하였고, 세계 경제와 보다 더 많은 거리감을 안겨주었다. 대서방 무역확대의 실패는 또한 세계로부터 북한의 대외신인도를 하락시켰고, 자립경제의 한계를 치유할 기회의 창을 닫도록 하였다.

두 번째 주요한 변화의 시도는 1980년대였다. 신냉전의 국제환경과 점차 한계를 더해가는 자립경제의 압력 속에서 부분적인 개방 조치로서 '합영법'의 도입과 대외무역의 강화조치를 취했지만, 결과적으로 '조-조' 합영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목적했던 서구의 자본과 기술의 유치에는 실패하였다. 1980년대의 변화와 좌절은 곧 사회주의 붕괴로 인한 깊은 좌절의 서곡이었던 셈이다.

세 번째의 변화는 1980년대 말의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중국, 베트남 등의 개혁 사회주의 체제의 성장, 그리고 북한을 둘러싼 국제환경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1990년대의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사망, 식량난으로 대표되는 경제 붕괴 그리고 북-미간 핵대결로 압축되는 국제적인 긴장 속에서 새로운 발전전략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색은 2000년 정상회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실행되기 시작하였다.

지나온 역사에서 북한의 변화는 사회주의적 개조의 성공과 사회주의 자체의 혁신에서의 좌절이라는 굴절의 과정이었다. 무엇보다도 '발전'을 위한 변화의 모색은 기술혁신, 경제관리의 부단한 변화로 나타났지만, 내부적으로는 사회주의 체제의 비효율성, 외부적으로는 경제봉쇄와 국방비의 부담으로 인한 자원의 낭비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를 노정하고 말았다. 이제 이러한 한계를 뒤로 하고, 2000년 정상회담을 계기로 과거와는 다른 모습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비효율성의 극복과 대외적 여건의 개선이라는 두 가지 과제의 해결로 모아지고 있다.
▲ 평양 창광거리의 신여성. 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던 지난해 10월 3일 평양시 창광거리에서 단발 머리의 북한 신여성이 여성 교통안전 보안원 옆을 지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3. 정상회담 이후의 북한: 북한식 개혁·개방의 추구와 한계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은 북한에게 과거와는 다른 발전전략을 요구하였다. 내부 자원이 고갈된 상태에서 성장을 위한 자원의 도입은 불가피하였고, 과거를 반복하는 노동체제, 가격체제 등 경제구조의 변화 역시 불가피하였다. 1990년대 말부터 제기되었던 '신사고', '실리' 그리고 '개건과 개선'은 이러한 변화에의 적응과 필요성을 의미하였다. 한편으로는 체제의 고수를 위한 '붉은기 사상'이 주장되었지만, 체제의 수호만으로는 미래를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북한 역시 개혁·개방을 조심스럽게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의 개혁·개방을 위한 변수는 미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국제환경 그리고 남북관계였다. 1994년의 제네바 합의, 그리고 1998년의 금창리 위기를 넘긴 북한은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연착륙 정책에 편승하여 국제관계에서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더욱이 북한은 1998년 등장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에서도 질적으로 다른 여건을 맞이하게 되었고 결국은 2000년 정상회담을 통해 비약적인 관계 개선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조건은 북한의 변화에 분명 긍정적인 배경이었다. 즉, 북한으로서는 정상회담 이후, 남북 경협이 활성화됨으로써 남한으로부터의 자원 도입을 확대하고, 금강산 관광 및 개성 공단 건설 등 추가적인 경제적 실리를 취할 수 있었다. 또한, 북-미관계의 일정한 진전과 남북관계의 개선은 북한의 내부 체제 개혁을 위한 대외적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즉, 1990년대 말부터 제기된 '실리'와 '신사고' 그리고 '개건과 개선'을 제도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대외적 여건이 어느 정도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과거와는 다른 변화의 모색과 실험에 진입할 수 있었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2007년 정상회담까지 북한의 변화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원에서 눈여겨 볼 수 있다. 먼저, 북한 내부의 경제적 요구에 따른 개혁 조치이다. 2002년 '7.1 조치' 로 대표되는 북한식 개혁·개방은 기업 자율성의 강화와 분권화 조치, 물가의 인상과 가격의 현실화, 그리고 시장의 합법화를 제도화하였다. 이는 상당부분 1990년대에 '아래로부터' 진행되던 현실을 제도적으로 반영한 것이자, 단순한 '기술적 효율성'의 증대를 넘어선 '분배적 효율성'의 제고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즉, 90년대 말의 '제도의 변화없는 개혁'을 넘어 '체제의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국가 계획의 틀 속에서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했던 기업, 공장들의 생산활동이 일정하게 자율성을 갖추게 되었고, 제품의 생산과 판매, 이윤의 기업 유보 강화 등 분권적 권한이 강화되었다. 나아가 그동안 사회주의적 온정주의에 의해 생산 비용과는 괴리되었던 가격체제와 노동보수체계의 변화도 가져왔다. 가장 큰 변화는 시장의 합법화에 따른 물자거래의 다변화와 주민들의 가치관 변화이다. 시장을 중심으로 한 소비물자의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주민들의 상행위가 확대되고, 상품-화폐 관계가 확대되어 주민들은 이제 일하는 것만큼, 혹은 자기가 소득을 올리는 것만큼 소득과 소비 수준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곧 개인주의적 가치관의 확대를 가져왔으며, 최근 사회 곳곳에서 이러한 현상이 강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정상회담은 그 동안 북한의 개혁·개방의 장애물이었던 국제적인 관계에서의 변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비록 결말을 맺지는 못했지만, 미국과의 관계정상의 문턱에까지 다다랐으며, 유럽연합의 대부분의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하였다. 정상회담이 가져다 준 외교적 변화는 구 소련까지 포함하여, 러시아 연방 역사상 처음으로 최고 지도자인 푸틴 대통령이 평양을 직접 방문하는가 하면,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가 2002년과 2004년 두 번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여 양국간 현안을 논의한 것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외교관계의 확대는 북한의 대외무역 확대 조치, 즉, 경제관계의 확대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비록 2002년 제임스 켈리의 방북에 이은 '제2차 핵위기'로 인해 남북 정상회담이 가져다 준 북한의 외교적 동력이 급격히 축소되었지만, 북한의 대외관계 확대 및 러시아, 중국과의 협력관계 강화, 남북 경협의 지속적인 확대, 미-일 등과의 대화의 지속 등은 북한이 정상회담을 계기로 얻어낸 외교적 열매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당시 남북관계의 확대와 북-미관계의 개선이 지속되었더라면 북한의 개혁·개방을 통한 변화는 지금보다 훨씬 더 멀리 진전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2000년 정상회담은 북한의 대남정책의 변화를 가져왔다. 정상회담 이후, 남한 주민들에게 북한이 적으로서보다는 민족 혹은 동포로서의 인식이 높아진 것만큼, 북한의 주민들에게 남한도 역시 적으로서보다는 동포로서의 인식이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 당국의 대남 정책이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금강산 관광을 시작으로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남북 경제협력이 보다 활성화되고 휴전선 최전방 군사도시인 개성에 남북 산업 협력단지가 조성되면서 이제는 적대적 관계에서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전변되었고, 북한 역시도 화해·협력의 남북관계를 퇴보시키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태도는 2006년 핵·미사일 실험으로 인해 남북관계가 경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의 사업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북한의 의지 표명에서도 분명히 읽을 수 있다. 또한, 북한은 당면의 경제 재건을 위해 남북협력이 필수적임을 인식하면서 남한을 통한 경제적 지원과 외부 세계로부터의 자원 도입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 평양 시내에 우리가 지원한 <대한민국>이라는 글씨가 큼직막하게 쓰인 쌀과 비료의 포장지를 들고 다니는 풍경은 적어도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이 적대국가가 아니라 동포 혹은 자신들을 지원하는 국가라는 인식이 자리잡았음을 말해준다. 2007년의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남한의 지원에 사의를 표명한 것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북한의 변화는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을 지나고,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당면의 경제재건, 그를 위한 우호적인 대외적 조건, 그리고 남북관계의 개선이라는 전략적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최종 목적지는 북한의 표현으로는 '강성대국'이며, 외부 세계의 눈으로는 '체제의 수호'와 '경제재건'으로 모아지고 있다. 2006년 핵실험 이후 오늘날까지 눈에 띄게 강조되고 있는 '경제 강국 건설'의 구호는 북한의 현재의 고민, 변화를 위한 몸부림, 그리고 그를 위한 체제 개혁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노력은 몇 가지 점에서 문제에 부딪히고 있고, 당면의 장애를 극복할 때만이 추진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북한의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는 우선, 제2차 북핵위기로 인한 대외적 조건의 굴곡이다. 체제수호를 가장 우선적인 목표로 하는 북한의 입장에서 '제2차 핵위기'는 사활을 건 미국과의 대립을 의미하며, 이의 해결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더 많은 개혁조치를 취하기 어렵게 되었다.

둘째로, 화해협력의 남북관계에도 불구하고 근본문제의 미해결은 더 높은 수준의 남북협력을 이루기 어려운 조건이 되고 있다. 즉, 경제, 문화적 협력의 진전에 비해 전면적인 남북협력을 가능케 할 정치-군사 분야에서의 더딘 관계개선이 그것이다. 2007년 정상회담을 통해 이러한 문제의 합의가 일정하게 이루어졌지만, 그 실행을 둘러싼 환경은 불확실한 것이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한계는 북한의 실리주의적 개혁 조치의 한계이다.

북한의 개혁 추진과 변화에 대외적 조건과 남북관계가 중요한 변수이긴 하지만, 북한 스스로의 변화와 적극성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제대로 된 개혁은 요원할 뿐이다. 특히, 경제적 자율성을 뒷받침하는 정치적 변화가 없는 조건에서, 경제개혁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현재의 북한 개혁은 '정치적 변화없는 개혁'이라는 점에서 초기 중국의 모습과 유사하다. 이런 점에서 2002년 '7.1 조치' 이후, 더 나아간 개혁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얼마전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 학보> 에서도 나왔듯이 시장/계획, 통제/자율, 개혁/체제수호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는 북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4. 북한의 변화: 앞으로의 과제와 전망

2007년 정상회담과 최근의 북-미관계의 개선 등으로 북한이 마주했던 장애물이 해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발전을 위한 북한의 결단이 점차 더 요구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북한의 변화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이미 북한은 2000년 정상회담에서 2007년 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의 변화를 추구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북한의 변화를 가로막는 문제와 한계 또한 분명하다. 문제와 한계는 외부적이면서 동시에 내부적이다. 앞으로도 북한의 변화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대외관계, 남북관계에 의해 영향 받게 될 것이다. 이 중에서도 남북관계의 개선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2007년 정상회담에서 이루어진 합의가 제대로 실행되느냐가 앞으로의 북한 변화에 중요한 작용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북한은 적지 않은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북한 체제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요구로부터 그러하고, 또 하나는 2007년 정상회담 합의 사항의 이행이 북한의 변화를 일정하게 추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선 과거의 변화를 위한 노력을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적지 않은 과제 또한 안고 있다.

우선, 최근의 북한의 본격적인 변화는 '7.1 조치'의 경제개혁과 그에 따른 사회적 변화라고 볼 수 있다. '7.1 조치'가 북한의 '체제의 개혁'을 의미하지만, 개혁은 정치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경제 개혁을 위해 요구되는 정치적 변화는 경제 개혁에 요구되는 가치관의 변화, 제도적 변화를 포괄하며 중국, 베트남 등에서 보듯이 경제개혁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변화가 필연적이다. 특히, 법적, 제도적 뒷받침은 변화를 공고화하고, 중도에 흔들릴 가능성을 제거한다는 점에서나 외부세계에 신뢰를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과제로 제기된다. 지금까지 북한은 정치적 변화를 최소화하는 방식의 경제 개혁으로만 변화를 한정하였다. 앞으로의 개혁과 사회적 변화가 성공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수준에서의 정치적 변화도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 김원균 명창 평양음악대학 성악과 학생들의 어학공부 장면 ⓒ청와대 사진기자단

둘째, 개혁과 변화는 이를 앞서 이끌고 가야할 새로운 주체들을 요구한다. 최근 북한에서 세대교체와 내각의 경제 엘리트의 진출이 두드러지고 있지만, 전임 박봉주 총리의 전격적인 해임 등에서 보듯이, 실리주의로 무장한 엘리트의 양성은 시급한 과제로 제기된다. 국제적인 감각과 경제 개혁, 북한의 현실을 고려한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가 나서지 않는 한 북한의 변화는 올바로 이어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북관계와 대외관계는 북한의 변화에 대해 성격과 속도, 방향을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변수이다. 따라서 북한으로서는 자신들의 성공적인 개혁을 위해서 남북관계와 대외관계 특히, 북미관계의 개선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2.13 합의'에 따른 북미간의 '행동 대 행동'의 북핵위기 해결에 성의있게 나서야 하며, 2007년 정상회담에서 마련된 '10.4 선언'의 후속 합의와 실행에도 적극적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특히, 남한에서의 신정부의 등장은 북한에 대한 보다 엄격한 이행과 행동을 요구할 것이며, 과거와는 사뭇 다른 정책 지향을 보일 것이다. 북한이 과거와 같은 호기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북한이 자신들의 변화를 올바로 이끌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과제 못지않게 남한의 신정부로서도 북한과의 관계나 북한의 변화에 대한 올바른 정책적 내용을 가져야 할 것이다. 채찍만으로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것은 이미 지나온 10여 년의 남북관계에서 확인되었다.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유추해본다면, 북한의 변화는 주변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북관계의 진전과 북미관계의 개선이 보다 더 효과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02년의 '7.1 조치'도 그러했고, '2.13 합의' 이후의 현재의 모습이나, 2007년 정상회담의 합의 내용도 그러했다. 물론, 이러한 조건을 소위 '화평연변(和平演變)' 전략으로 추진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남북관계나 북한의 변화를 움츠러들게 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과거 김대중 정부 시절, 햇볕정책에 대한 북한의 의구심이 상당 시간 지속되었던 것을 염두에 두면 신정부로서도 북한과의 관계에서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먼저, 2007년 정상회담 등의 합의 사항 등 남북간에 합의된 사항들에 대해서는 이념적 지향을 떠나 합의에 대한 존중과 이행을 성실하게 추진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는 남북의 합의가 법적으로 고착되지 않은 조건에서 상대방과의 신뢰를 높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합의된 사항들의 성실한 이행은 향후 신정부가 대북 협상이나 요구에서 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해주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오늘날 북한의 변화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밑바탕에는 정부 차원의 대화와 협력뿐 아니라 민간차원의 지속적인 협력이 놓여있다. 따라서 신정부에서도 민간차원의 대북 협력이 위축되지 않도록 민간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민-관의 역할분담을 변화한 환경에 맞게 조정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정부의 과제는 현재 북한이 당면하고 있는 개혁의 과제와 문제점에 집중하여 지원할 것은 지원하고, 요구할 것은 요구하는 정책적 방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 정부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와 중재자로서 해야 할 문제, 그리고 우리 정부가 아닌 국제사회가 책임져야 할 과제와 영역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핵문제의 해결은 감성적으로 우리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이의 해결은 우리 정부라기보다는 북-미간 혹은 6자회담의 틀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따라서 이의 해결을 남북관계의 전제조건으로 삼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만 낳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 아직 예단하기는 성급하지만, 북-미관계의 변화에 따라 한반도에 평화체제의 수립과 북미관계 정상화 등이 가시적인 영역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 한반도는 평화와 번영을 위한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되고, 이는 북한의 변화를 추동하는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신정부의 북한에 대한 강제적 변화의 요구 혹은 압력은 자칫 한반도를 둘러싼 변화의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마땅히 가져야 할 권리를 놓치거나 소외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신정부는 대외적인 환경 변화와 남북관계, 그리고 현재의 북한의 현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계승과 혁신'의 관점에서 대북정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현재 남북관계는 2007년 정상회담을 계기로 구체화된 사업의 이행 국면으로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이행을 위해서는 NLL을 위시한 군사적 문제가 일정하게 해결되어야 한다. 아마도 신정부는 군사 문제에서부터 시험대에 오르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의 설치나 해주경제특구, 베이징 올림픽 공동응원단의 경의선 이용 등의 거의 모든 문제가 NLL과 남북의 군사적 보장과 맞물려있다.

사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나 해주경제특구 등은 북한의 변화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7.1 조치'가 북한의 내부적 요구에 따른 자신들 방식의 변화의 추구였다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나 해주경제특구 등은 남북관계의 진전에 따른 남북 협력 방식의 변화 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곧 북한의 개혁·개방이 남북관계를 통해 추동되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한 것은 남북관계의 정치적-군사적 협력이 보다 더 깊어질수록 북한의 변화 또한 깊어진다는 것이다. 신정부가 북한에 채찍만을 고집하지 않겠다면, 북한의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정치-군사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협력에 한편으로는 계승을, 한편으로는 혁신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북한은 변화의 중요한 기로에서 주로는 대외관계와 남북관계로 인해 좌절했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는 체제의 유지와 고수를 위한 우선적 고려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북한으로서는 또 다시 변화의 과정에서 중요한 순간에 맞닥뜨리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가 그러하고, 남한의 신정부의 등장이 그러하다. 북한의 변화를 늦출 것인가, 아니면 변화를 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북한 당국의 의지만이 아니라 남한 신정부의 태도 역시 대단히 중요한 시점에 있다. 남북 모두에게서 지혜로운 해결의 길이 찾아질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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