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경제에 대한 전통적 견해와 문제점
월러스틴은 아시아로 간 귀금속은 대체로 가치를 저장하는 수단으로 금고 속에 보관되거나 사치품으로 사용되었으며 무역 수지는 언제나 아시아에 불리했다고 주장한다. 아시아의 경제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시아 경제는 유럽 세계-경제의 바깥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실 해묵은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19세기부터 아시아 경제를 보통 '강제'에 의해 움직이는 통제경제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경제 논리가 아니라 통치자의 정치적 뜻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에 바치는 세금까지도 '공납 모드'라는 묘한 이름으로 부른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에 따르면 아시아의 전근대국가들에도 사기업가가 이끄는 상당한 규모의 활력 있는 상업부문이나 금융업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 규모도 유럽의 기업들보다 훨씬 더 컸다. 따라서 같은 은이 유럽에서는 투자로 이어져 자본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고 아시아에서는 금고 속에 쳐박히거나 귀족들의 사치로 낭비되었다는 주장은 별로 근거가 없어 보인다.
위에서 말했지만 1500-1800년 사이에 유럽에서 아시아로 유입된 금, 은은 엄청난 양이다. 그 가운데 중국의 경우만을 보자. 중국이 이 사이에 무역을 통해 얻은 은은 유럽과 서아시아, 인도로부터 들어온 양에다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8천-9천 톤, 멕시코와의 직접 교역에 의한 1천 톤을 합쳐 약 6만8천 톤에 달한다. 유럽이 아메리카에서 얻은 은의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
그러면 왜 이 엄청난 양의 귀금속이 300년 동안이나 계속 아시아로 흘러 들어갔을까. 이것은 아시아에서 은의 가치가 유럽보다 높기도 했으나 주로 무역흑자의 결과이다. 번영하는 아시아에 대해 유럽인들이 갖다 팔 물건이 별로 없었으므로 거의 유일한 수출품이 은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1660-1720년 사이에 아시아에 판 상품의 87%가 은이었고 나머지만이 유럽산 상품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의 동인도회사도 아시아로 수출하는 상품의 10%를 영국제품으로 채우도록 규정했었다. 그러나 그 적은 양도 잘 지킬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은이 아시아 상품의 수입을 위한 결제 수단으로 결정적인 비중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이 세계경제의 중심이었나
일부 서양 역사가들은 중국경제가 유럽에서와 같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생태계에 대한 인구 압력이 컸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인구의 증가로 목재나 연료 등 자연자원이 부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간할 땅도 부족하고 지력도 소모되었으므로 중국인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단위 경작에 더 많은 노동력을 쏟아 부음으로써 생산량을 늘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노동력을 계속 더 늘려도 생산량의 증가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으며 결국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그들은 '안으로 말려들어간다'는 의미의 인벌루션(involuton)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한다.
그래서 중국 경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약간 성장하는 것 같아도 내실이 없었다. 즉 '발전 없는 성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중국경제는 어느 시점에 가면 정체되고 결과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중국경제는 산업화의 문턱에서 좌절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근대에 들어와 중국 경제와 유럽경제 사이에 결정적 차이가 생겨난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아시아 경제에 대한 재평가는 이런 과거의 주장을 불식시키고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 학파로 불리는 미국의 연구자들 가운데에는 <변화된 중국>을 쓴 중국계 학자인 웡(R.Bin Wong), <거대한 분기점>을 쓴 포머란츠(K.Pomeranz), <리오리엔트>를 쓴 프랭크(A.G.Frank) 등 많은 사람들이 포함된다. 이 가운데 특히 웡이나 포머란츠 같은 사람들은 기존의 일본이나 중국 연구자들의 연구와 원사료를 통해 중국경제를 재평가하고 있고 그 점에서 강한 설득력을 보여준다.
이들에 의하면 18세기의 중국은 엄청나게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생태학적 압력은 유럽의 선진 지역보다 덜 받고 있었다. 삼림의 황폐화나 연료의 고갈, 건축재의 부족이라는 점에서 중국이 유럽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또 유럽인들이 인구를 조절한 데 비해 중국인은 그렇지 못했다는 전통적인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중국인도 산아제한을 통해 과도한 인구 증가를 막았다는 것이다.
또 18세기 중국에서 경제가 발전한 양자강 하류 지역의 생활수준이나 소비수준은 지금까지 서양학자들이 주장해온 것과는 다르다. 많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칼로리 섭취, 설탕, 직물, 가구 등의 소비에서 잉글랜드 남부와 같은 유럽의 발전된 지역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1800년경까지의 중국 양자강 하류 지역, 일본과 인도의 선진 지역을 영국과 비교해 보면 인구, 임금, 기술, 법적 제도, 신용 등 모든 면에서 유럽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19세기에 와서 유럽이 산업화를 통해 큰 차이를 만들어냈지만 그것은 똑 같이 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한 유럽이 석탄 같은 새로운 에너지원을 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식민착취를 통해 아메리카 등 해외의 막대한 자원을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19세기에 나타난 차이는 중국경제의 쇠퇴 때문이 아니라 유럽 경제성장의 가속화 때문이고 그것은 특히 영국에서 철과 석탄자원을 결합하고 아메리카의 자원을 이용함으로써 산업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우연의 결과라는 것이다.
실제로 18세기 이전의 상황을 보면, 1500-1750년 사이에 중국의 인구는 1억2천5백만 명에서 2억5천만 명으로 약 100% 정도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 인구가 230만 명에서 370만명으로 증가한 것보다 증가율이 더 높다. 이는 대량의 은이 들어와 경제가 크게 활성화되며 경작지가 증가하고 2모작의 도입으로 식량증산이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국경제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그 뒤를 잇는 정치적 혼란 때문에 17세기에 잠시 침체했으나 17세기 말에 다시 회복되었다. 양자강 유역에서는 면직물, 견직물 산업이 크게 성장했고 그 밖에 자기, 담배, 염료인 인디고, 종이 등의 산업도 발전했다. 특히 광동성 등 남부지역의 산업은 해외무역의 증가로 크게 자극을 받았다.
이에 따라 농업이 점차 상업화되고 도시화도 가속화되었다. 그리하여 프랭크 같은 사람은 당시에 세계경제가 여러 중심을 가지고 있었을 수는 있으나 어느 하나가 가장 중요했다면 그것은 유럽이 아니라 중국경제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유럽이 아니라 중국이 당시 세계경제의 '중심'이었다는 것이다.
아시아 경제에 편승한 유럽
일본경제도 16-17세기에 막대한 은의 생산과 수출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국제무역이 크게 증대하여 말라카까지 진출했고 중국과는 직접 무역이 불가능했으므로 필리핀의 마닐라와 베트남의 호이안을 거점으로 중개무역을 했다. 국내산업이 급격히 발전하며 1658년에는 중국으로부터 자기 수입을 중단했을 뿐 아니라 일본산의 유명한 이마리 자기를 유럽에까지 수출할 정도가 되었다.
경제발전으로 인구도 급증하여 1500년의 1,600만에서 1750년의 3,200만으로 증가했다. 경제가 급속히 상업화하고 도시화하며 18세기의 도시 인구비율은 중국이나 유럽보다 높다. 이것은 결코 정체되고 폐쇄되어 있는 사회라고는 할 수 없다.
인도도 마찬가지이다. 인도는 무굴 제국 성립 이전에도 세계 직물산업을 지배했었는데 제국의 성립으로 인도가 하나로 통합되며 도시화와 상업화가 크게 진척되었다. 인도의 전체 인구는 1500년의 약 5,400만-7,900만에서 1750년에는 약 1억 3천만 명에서 2억 정도로 크게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아그라, 델리, 라호르 같은 도시는 17세기에 인구 50만의 대도시로 번성했다.
17세기는 인도 해양무역의 황금기로서 인도는 유럽에 대해 큰 무역 흑자를 냈고 서아시아에 대해서도 약간의 흑자를 냈다. 이는 주로 보다 효율적인 생산으로 가격 경쟁력을 가진 직물과 특산품인 후추 등의 향신료 때문이다.
그래서 프랭크는 1750년 세계전체의 총생산량은 1,480억 달러인데 그 가운데 세계인구의 2/3인 아시아 인구가 4/5를 생산했고 세계인구의 1/5인 유럽인이 아프리카, 아메리카인과 함께 나머지 1/5을 생산했다고 추산하고 있을 정도이다.
또 16-18세기 동안 유럽은 아시아에 대해 300년간 무역역조를 냈는데 이렇게 막대한 무역 역조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산업경쟁력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따라서 아메리카에서 막대한 양의 은이 유입되지 않았다면 유럽인들은 아시아로부터 아무 것도 수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메리카의 은이야말로 유럽 경제를 아시아 경제에 연결시키는 중요한 끈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프랭크는 근대 초 유럽에 가장 영향을 준 것은 아메리카의 귀금속이 공급된 것으로 이것 때문에 유럽인들은 이미 잘 확립된 유라시아 경제에 '올라 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유럽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세계경제체제나 자본주의를 직접 창조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월러스틴이 주장하는 유럽 세계-경제가 탄생하기 오래 전에, 그리고 그것이 나타난 한참 후에도, 실제의 세계경제는 광범한 노동 분업과 정교한 무역체계를 갖고 있는 아시아적인 것이었으며, 그 한 가운데 중국이 있었다는 것이다. 프랭크가 중국중심적인 경향을 강하게 보이는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아시아의 이런 상황과 당시 아시아에 대한 유럽의 의존을 고려하면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갖는 한계는 분명하다고 하겠다.
당시의 아시아 경제 상황에 대해서는 18세기 사람으로 <국부론>을 쓴 영국의 뛰어난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관찰이 적절해 보인다. '중국과 이집트, 인도는 세계의 어떤 나라들보다 부유하다. 중국은 유럽의 어느 곳보다도 훨씬 부유한 나라'라는 것이다.
사실 18세기까지, 아시아 경제에 대한 유럽인들의 평가는 매우 높았다. 그것이 달라지는 것은 유럽인들이 산업혁명에 성공한 이후이다. 그러니까 19세기에 와서 아시아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스미스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여 보자.
'아메리카 발견 후에 유럽의 대부분이 잘 살게 되었다. 이는 잉글랜드, 홀랜드, 프랑스 , 독일뿐이 아니다. 스웨덴, 덴마크, 러시아까지도 농업과 제조업을 발전시켰다. ‥‥아메리카의 발견이 가장 중요하다. 새로운 광대한 시장이 생김으로써 새로운 노동 분업, 기술의 발전이 가능했는데 이는 과거의 좁은 시장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노동생산성이 높아지고 유럽 모든 나라에서 생산량이 증가했다. 이와 함께 유럽인들은 부유해졌다. 동인도는 아메리카 은의 새로운 시장이었다. 금 · 은은 항상, 지금도 그렇지만, 유럽으로부터 인도로 가져갈 매우 이익이 많이 나는 상품이다. 은이야말로 두 극단의 대륙을 하나로 잇는 주된 상품이다. 이것으로 이 먼 지역이 서로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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